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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작시/임서령/억새꽃 피었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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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서령
억새꽃 피었다 외 1편
지금 부평역사 광장은 억새밭이다
오전 열한 시
구수한 밥내가 역 광장에 내려앉으면
지하도 계단 빼곡히
하얗게 머리가 센 억새꽃 남실댄다
나무뿌리처럼 불거진 힘줄
거무죽죽 갈퀴 같은,
한때 저 억센 손으로 세상을 감아
쥐고 흔들던 때가 있었건만
바람에 대책 없이 흔들리던
빈 대궁을 돌아나오는 외로움이
급하게 식판을 삼킨다
먹어도 먹어도 헛헛한
저 질긴 꽃
밥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억새의 하얀 빛깔에는
왈칵 솟구치는 허기가 있다
은혼銀婚이 지나는 동안
홈플러스에서 장을 본다.
구매 금액에 따라 주는 스티커를
종이판에 붙여 오면 수입 냄비나 프라이팬을 준단다
수저 두 벌, 공기 대접 두 벌,
밥솥 하나 국솥 하나가 전부였던 신혼
고등어지짐을 좋아하는 각시는 날마다 김치찌개를 끓였다
하나 밖에 없는 국솥은 언제나 신랑이 좋아하는 찌개를 담고 보글거렸다
닷새를 콩나물국으로 때우고서야 석유곤로 위에 올라앉은
반짝반짝 빛나는 천 원짜리 양은냄비
어린 각시는 묵은지 넣고 푹 지진 고등어지짐 한 냄비를 맛나게 해치웠다
아랫배가 도도록 불러오고, 식구가 늘어났고, 집의 평수가 늘었다
크고 작은 냄비도 여덟 개로 늘었다
사이좋게 이마를 맞대고 스티커를 한 장씩 붙인다
“젤로 좋은 냄비를 타 와서 거기엔 당신이 먹고 싶은 것만 끓여 먹구려
나도 아이들도 말고 당신만을 위한 걸로”
귀밑머리 희어진 신랑
‘참 잘 했어요’ 도장 찍듯, 스티커를 꾸욱 눌러 붙인다
임서령∙2010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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