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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신인상/손비아(시)/지문에서 자라는 풀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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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비아
지문에서 자라는 풀 외 4편
괄호 속,
쭈글쭈글한 거푸집에서 지문을 퍼낸다.
난해한 이정표에 낙서를 하는
배신한 사랑에 스위치를 내리는
기호와 군무가 난교하는 현장의
곱추와 거인의 굽은 등 쓰다듬는
벼랑 끝의 소나무를 끌어안는
임종하는 장의사에게 화관을 씌우는,
땟국물 얼룩진, 물에 불린, 빛의 정원을 더듬는, 팔월의 옥수숫대 냄새 맡는, 부활절의 달걀 같은, 망명객의 향수 어린, 사진관 벽에 걸린 아기 손가락 그 여린 DNA를 닮고 싶은, 지문에서 자라는 풀.
자석에 이끌려 나온 하수구 속 동전 한 닢 굴러가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동전 속에 담기네. 파랗게 일어난 풀밭, 동전을 향해 주저앉은 아이의 눈동자가 풀을 헤치네. 찌그러진 운명선에 후우 바람을 불어주네. 괄호 밖의 말들이 쑥쑥 자라네. 두 근 두 근 거리네.
비둘기 날다
비둘기는 고래다, 라고 팔십년 대의 그들은 쓴다.
무한의 배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면 녹색 벨벳이 깔린 의자들, 오징어와 귤 꾸러미 일렬종대로 누운 선반과 태어나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창이 있다. 손때 묻은 창자는 마디를 겨우 지탱하고 덜컹거리는 레일 위를 끝도 없이 날아간다. 날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비둘기 자신 뿐 포경의 아침을 향해 펄떡이는 팔십년 대의 그들은 늙은 새의 날갯짓이 미덥지 않다. 아무리 기염을 토해도 쿡쿡 코웃음 참을 길 없는데, 어이할거나 비둘기는 진화하고 싶다. 녹슨 발톱으로는 저절로 떨어진 모이 하나 쫄 수 없고 붉은 눈 욱신거려 길이 까마득하다. 해진 엉덩이 구겨 넣고 가슴의 총대에 기대 잠든 팔십년 대의 그들을 늘어진 살가죽으로 품는 물결 풍성한 고래 혹은 어머니, 낯가림 잃어버린 당신의 아이들은 휙휙 지나가는 대양을 보지 못한 채 지친 대륙의 밤을 앓고 있다. 얼어붙은 술병 빨며 목이 터지게 고래를 부르는 저 지친 완행의 청춘. 창을 깨고 날고 싶은 고래 힘줄 같은 팔십년 대 그들의.
애연
편지를 쓰는 대신,
편지를 부치는 대신,
편지를 찢거나 불태우는 대신,
편지를 다시 쓰는 대신,
답장을 기다리는 대신,
답장을 읽는 대신,
답장을 찢거나 불태우는 대신,
답장에 대한 답장을 쓰는 대신,
너에게 가는 대신,
담배 한 개비 걸쭉한 타액 묻혀 피우다가,
부치지 않은 봉투에 화인을 찍는 중독
해독되지 않는,
스치다
시장통의 떼쓰는 아이 입에서 꽃 한 송이 피어나고,
그 꽃잎 옷깃에 꽂는 할머니의 굽은 손등으로
채소장수 손바닥의 푸른 물이 스치듯 번지고,
넘실넘실 녹즙이 하수구로 흘러넘치고,
공사장 흙먼지로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고,
집 짓던 인부의 깔깔한 입 속을 적시고,
함바집 아주머니의 발꿈치로 꽃등이 밝혀지고,
꽃 진 자리 열매 맺어 주렁주렁 가로수에 걸리고,
뒤뚱거리는 비둘기 달콤해져서 깃털을 떨어뜨리고,
깃털을 단 수레가 신나게 동네를 돌아다니고,
골목길 뛰어가던 택배 기사가 수레에 갈아타고,
아이들이 와아와아 그 뒤를 쫓아 달리고,
시장통의 떼쓰던 아이 행렬 속에서 울음을 뚝 그치고,
대문 밖을 얼씬거리던 강아지가 아이를 향해 짖고,
할머니가 푸른 손을 저으며 강아지를 불러들이고,
귀가하던 공사장 인부가 할머니 손에 풀빵 봉지를 쥐어주고,
풀빵 냄새 담장을 지나 시장으로 흘러들며 다시 파래지고,
새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서로를 포개며 향기로워지고,
백 리 밖의 사랑
태양을 등에 업은 늑대 한 마리 구름 위를 달린다. 눈발에 가려진 여우의 발자국을 뒤로 하고 욱신거리는 주둥이로 피 뚝뚝 흐르는 하얀 가슴털을 흔들어 턴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왕의 여자를 찾아 녹슨 꼬리 빳빳이 세우고 백 리를 달린다. 백 리를 가면 백 리만큼 멀어지는 그녀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깊은 울음이 유령처럼 따라온다. 더 깊이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아픈 몸을 찾아 한 방향으로만 간다. 앙상한 나목이 얼어붙은 길에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발바닥이 창백한 설화를 씹고 우두둑 산등성 무너지는 환청이 빈속에 찬다. 홀로 가는 목숨이 뜨거워 실핏줄 터지면 빼문 혀에서 줄줄 새는 피를 뒤엉킨 바람결에 풀어낸다. 죽어도 돌아서지 않으리라. 검은 구름까지 갔다가 구름 너머 메아리를 삼키다가 그녀가 한번쯤 멈추었을 바위에 올라 하늘과 땅에 머리를 찧는다. 협곡에 떨어져 낙석에 몸을 묻는 개죽음이면 어떠랴. 서늘한 눈빛의 눈물 한 방울이면 족하다. 백 리에 백 리가 더해지고 백 리가 만 리가 되고 설원에 빠진 발자국들이 봉분이 되다 무너진다. 백 리 밖 늑대의 전설 비굴하게 남을지라도 사랑이 다 그런 것이다 하고 그냥 간다. 굳이 좁히려 들지 않고 백 리만 백 리만 하며 평생을 간다.
소감/당신의 발과 나의 발에
이를 테면 발의 얼굴. 구멍 난 양말 밖으로 비죽 나온 때 낀 발톱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나 부끄러움 같은, 조금 뻔뻔하고 안쓰러운, 뒤축 닳은 신발 속에서 계속 숨을까 내놓을까 망설이는 당신의 발을, 보고서도 못 본 척, 괜찮아요, 당신처럼 나의 발도 수줍음이 많거든요. 냄새 나고 부르터서 잠들 녘이 되어서야 겨우 꺼내놓는 그 발에 나의 발을 대어 볼 거거든요. 당신과 나의 닮은 점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것을 말해 줄 거거든요. 발의 숨결과 발의 상처, 발의 자유에 대한 그리고 당신에게 건네주고 싶은 꿰맨 양말에 대한 노래. 언어로 말하고 싶을 때마다 시를 쓰겠습니다. 그러다 어떤 날 시가 되지 않을 때면 당신의 발을 보러 가겠습니다. 안으려 할 때면 숨어버리는 가장자리 기워 신고 당신의 심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추천해주신 강우식, 장종권, 고명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격려해준 동인들과 소소한 집안일에 무능한 저를 묵묵히 바라봐 준 가족에게도 감사드립니다./손비아
추천평/시의 드라마적 표현이 독특해
손인숙 시인은 드라마작가이다. 그래서인지 시에 드라마적 서술 표현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드라마적 표현이라 하는 것은 드라마에서 어떤 풍경이나 상황을 표현할 때 나열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작품 「지문에서 자라는 풀」의 2연이나 「비둘기 날다」에서 보이는 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비둘기와 잘 교합한 묘사가 그러하다. 나는 시가 무슨 큰 메시지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지만 한 편의 시에서 매듭을 짓지 않고 끝내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게 보면 시의 여백미일 수도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손비아 시인은 이런 미세한 문제조차도 스스로 잘 해결해 나가리라 믿으며 신인으로 추천한다./추천위원: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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