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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정우영의 시평에세이/시비하라/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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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정우영의 시평에세이/시비하라/정우영
1. 시비하는 시들을 찾아서
오늘 나는 “시비하라!” 하고 쓸 수밖에는 없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였던 스테판 에셀은 최근 사람들에게 ‘분노하라’고 촉구했지만, 나는 “시비하라”고 외치고 싶다. 지금 시詩는 세상을 향해 시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시비, 그렇다. 시비是非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발 그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자는 것이다. 시비는 또한 시비時悲이다. 이 땅 여기저기 서려 있는 비통함을 위로해 주자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비는 시비侍婢 같은 정권과 그 하수인들을 향해 날리는 시비矢匕이기도 하다. 시는 때로 화살과 비수가 되어 부조리의 심장부를 찔러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 평화로운 세상이 오고 사람들 삶이 평온해지면 시인도 강호한정江湖閑情을 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 꿈은 요원하다 싶지만, 어쨌든 그러한 시대를 건너가게 될 때, 시도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아직은 아니다.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망가뜨리는 숱한 조짐들이 우리의 육신을 옥죄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쓰는 시詩는 시비是非를 가리고 시비時悲를 달래주며 시비矢匕를 날려야 한다. 조금 무겁게 말하면 시가 곧 무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벼리는 무기, 부조리를 절단내는 무기, 사람의 삿됨을 잘라내는 무기, 그리고 사람을 위무하는 무기.
너도 나도 다 희망 없는 사회로 내몰리는 이때,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시인 송경동을, 후배지만 경외로 바라본다. 그는, 그의 시는 근래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격렬한 시비矢匕이다. 대추리 싸움부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타기 운동까지 그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온몸을 던져 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다 송경동이 될 수는 없다. 송경동 식 시비는 송경동에게 맡기고 다른 시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시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내 우려와는 달리 많은 시인들이 각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이미 시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이른 바 대중성 있는 문예지들에는 그런 시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를 바꿔 말하면 나름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들은 이런 시비에서 슬쩍 비켜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역사 어느 구비를 봐도 시를 무기 삼을 때 그들은 소수 아닌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소수는 결국 다수를 이끌고 저 반동의 격랑을 헤쳐 넘고는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시비하지 않는 시의 안타까움은 금방 잊어버리려 한다.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시비하는 시인 까닭이다. 시비하는 시들을 기리기에도 나는 역량이 모자란다. 그런 모자람을 무릅쓰고 곳곳에서 시비하는 시들을 여기 모셔와 본다.
2. 생존의 벼랑으로 내모는 노동 현실에 시비하다!
김진숙을 아는가. 그는 200일 넘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35M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이다. 박일환 시인은 그 김진숙을 만나러 희망버스를 타고 농성장으로 향했다.
영도조선소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김진숙은 만나지 못하고
용만이 형만 만나고 왔네
온종일 퍼부어댄 장대비에
멀리서 온 벗들 양말이 젖었을까봐
새 양말 스무 켤레를 가방에 넣어온
용만이 형 손에 이끌려 간 자갈치횟집
가지런히 썰려 나온 회들은 연하고 부드러웠으나
미안하고 고맙다며, 소주를 따라주는
용만이 형 손은 뭉툭하고 거칠었네
눈물 나는 일들이야 영도다리 아래로
소줏잔 비워내듯 털어버리고 싶었으나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이나
평생 연장에 매여 살아온 용만이 형 앞에서
내가 먼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으나
차벽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것들이
자꾸만 명치끝을 눌러대는 바람에
급하게 용만이 형 가방에서 양말 하나 뺏어 신고
찔끔 눈물 한 방울 흘렸던가
피할 수 없는 고립을 감내하는 일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지 모르는 나는
용만이 형이 김진숙이고
김진숙이 용만이 형이라고,
용만이 형한테 얻어 신은 양말이
실은 김진숙이 보내준 거라고,
애써 자위하며 돌아섰네
용만이 형 가방에서 나온 양말을 신고
영도조선소 앞 봉래 로터리를 떠나왔네
―박일환, 「용만이 형이 준 양말」 전문(‘리얼리스트 100’ 홈페이지 게재)
박일환은 위의 시에서 한 줄로, “영도조선소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라고 썼지만, 우리는 안다. 처절한 다툼이 그 속에 숨어 있음을. 길이 먼 게 아니라, 차벽을 동원하는 등 정권의 방해가 두터웠기 때문임을. 그리하여 시인은 “김진숙은 만나지 못하고/용만이 형만 만나고 왔다.” 김진숙은 크레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가리킴을 알겠는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김용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시를 쓰는 김용만이며 평생 노동자로 살고 있다. 그 용만이 형이, “온종일 퍼부어댄 장대비에/멀리서 온 벗들 양말이 젖었을까봐/새 양말 스무 켤레를 가방에 넣어온”다. 그런데도 그 형은 외려 “미안하고 고맙다며, 소주를 따라”준다. 아, 그런데 소주를 따라주는 그 “형 손은 뭉툭하고 거칠었”다. 그는 평생 연장에 매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눈물겹지 않은가, 용만이 형의 이 따뜻한 배려가. ‘희망버스’ 타고 부산까지 온 찾아온 벗들 양말 젖었을까봐 새 양말 챙기는 그의 정성이 갸륵해서 나는 속이 다 싸해진다. 그런데도 거꾸로 그가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그의 접대를 받는 시인은, “내가 먼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으나/차벽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것들이/자꾸만 명치끝을 눌러대는 바람에/급하게 용만이 형 가방에서 양말 하나 뺏어 신고/찔끔 눈물 한 방울 흘”릴 뿐이다.
나는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자꾸만 명치끝을 눌러대는” “차벽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것들”에 주목한다. 이게 무얼까. 실천하는 노동자와 우물거리는 지식인의 계급적 차이인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김진숙을 저 고공 위 크레인에 올라가도록 만든 것이며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움직이도록 이끈, 바로 그것, ‘우리의 현실’이다. 팍팍한 삶에 내몰리다가 마침내 죽어나자빠질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참혹한 노동 현실인 것이다.
시인은 용만이 형한테서 바로 그 참혹한 현실을 본다. 그러니 어찌 “내가 먼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쉽게 내뱉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현실을 통해 시인은 자각하게 된다. 실은 “용만이 형이 김진숙이고/김진숙이 용만이 형”임을. 고공 농성하는 김진숙이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는 김용만이며 여기의 김용만이 저기의 김진숙임을. 그러므로 “용만이 형한테 얻어 신은 양말이/실은 김진숙이 보내준 거라”는 시인의 믿음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다. 아마도 그 양말에는 김용만과 김진숙의 마음만이 아니라,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모든 노동형제들의 온정이 다사롭게 스며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꼭 저렇게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할 수밖에 없느냐고. 그러면 그들이 달리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사회의 모든 창구는 다 가진 자들에게 열린 상태에서 없는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무기가 목숨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찍소리 못하고 굴속에서 사는 ‘요상한 동물’들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이 땅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이와 같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꼬리가 깁니다
자르고 달아나면 다시 자라나지요
지하에서 지하로 옮겨 다니며
그냥 주문대로 샘플을 보고 가방을 만드는데
형사들이 백여우라 부르며 잡으러 다니지요
샘플이 어떻게 굴러 오는지 모르지만
똑같이 만들어내는 데는 귀신이랍니다
원가에 삼천 원을 붙여 넘긴 가방이
어디에서 명품으로 둔갑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만든 만 원짜리 가방이 수백만 원짜리 명품으로 팔린다는 말을 들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지요
명품만 찾는 요상한 세상에서
도망 다니느라 귀는 커지고 자라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명품족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요
나는 명품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샘플도 짝퉁이거든요
아는 것이라고는 가방 만드는 재주밖에 없어
전문가도 속아 넘어간다는 솜씨로
입에 풀칠하기 위해 명품딱지 붙은 가방을 만듭니다
굴 속 같은 방에서 긴 꼬리는 숨기고 삽니다
―장성혜, 「요상한 동물」 전문(반연간문예지 ≪리얼리스트≫ 4집 게재)
이 시에는 눈물겨운 아이러니가 배면에 깔려 있다. “전문가도 속아 넘어간다는 솜씨로” 짝퉁 가방 만드는 노동자는, 기실 명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가 샘플로 삼은 가방도 짝퉁이기 때문이다. 그의 손재주는 대단해서 그런 샘플로 “수백만 원짜리 명품으로 팔”리는 짝퉁 가방을 만들지만, 그는 굴속 같은 방에서 숨어 산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꼬리 긴 요상한 동물’쯤 되겠다. “아는 것이라고는 가방 만드는 재주밖에 없어”, “입에 풀칠하기 위해 명품딱지 붙은 가방을 만”드는 노동자인 그가 왜 이렇듯 ‘요상한 동물’, “백여우”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이득을 위해 사육되는 노예이기 때문이며, 드러나면 안 되는 화려한 자본의 음습한 그늘인 까닭이다. 그가 백여우가 되는 데에 그의 의지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는 마치 기계처럼 시키는 대로 재주껏 가방을 만들 뿐이다.
장성혜의 이 시를 두고 어떤 이는 극단적인 예라고 짚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극단이 아니라 현실로 읽는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내몰린 노동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상당수의 이주노동자들이 이와 같은 상황들을 메워주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뭐가 다르랴. 그들은 우리 노동자 아닌가. 실제로 노동 현실은 그들이 더 열악하다.
발전의 직접적인 담당자이면서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언제나 이처럼 핍박받거나 소외되어 왔다. 자본 집중이 심화되고 양극화가 극대화되는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정말 살기 어려운 시대로 돌입했다. 정권도 법제도도 자본의 입맛대로 운용된다. 노동자들의 삶은 노숙자와 다름없다. 자칫하면 발가벗겨져 거리에 내몰린다.
강병길 시인은 도루코 노동자들을 그렇게 거리에서 만났다. 시집 ������도배일기������로 등단한 그의 시선에 잡힌 노동자들 모습은 이렇다.
도루코 칼날은 잘 든다
열 개들이 한 통이면 집 한 채 벽지도 바르고 장판도 깐다
무뎌진 칼끝을 톡톡 떼어내며 새날처럼 쓰는 도루코 칼날은 도배장이들이 즐겨 쓰는 소모품이다
칼날 만드는 공장이 우리 동네에 있고
그 사거리들을 사람들은 도루코사거리라고 부른다
칼 만드는 공장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도루코사거리에 서서 일 년 넘게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며 망루를 세우고 현수막을 걸었다
‘도루코의 칼날은 비정규직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잘라야 합니다’
잘린 비정규직들이 표어를 앞뒤로 걸머메고 부러진 칼날처럼 녹슬어 갔다
‘왜 우리 마음 속에 칼을 갈게 하는가’
무딘 칼날을 벼리듯 사계절 버티고 선 그들의 구호는 날이 서 있었다.
―강병길, 「도루코 칼날-도배일기·3」 전문(시집 ������도배일기������, 지혜 2011)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칼날 만드는 도루코 공장 노동자들이다. 그 현장을 도배공 강병길 시인은, “칼 만드는 공장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도루코사거리에 서서 일 년 넘게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며 망루를 세우고 현수막을 걸었다”라고 쓴다. 한 문장에 밀어 넣었지만, 일 년이다. 일 년 동안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무엇으로 밥을 먹었을까 생각하니 절로 한숨만 나온다. 도루코 노동자들은 말한다. ‘도루코의 칼날은 비정규직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잘라야 합니다’라고. 그러나 이 절실한 요구를 저들이 받아 줄까. 그럴 리가! “잘린 비정규직들은 표어를 앞뒤로 걸머메고 부러진 칼날처럼 녹슬어 갔다.” 이제 노동자들은 “마음속에 칼을 갈” 수밖에는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무딘 칼날을 벼리듯 사계절 버티고 선 그들의 구호는 날이 서 있었다.”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무엇일까. 목숨을 건 투쟁이다. 김진숙은 이렇게 하여 탄생한다. 노동 탄압이 있는 곳 어디서든 김진숙은 나타난다. 고공농성을 하는 저 김진숙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70년대 전태일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처럼.
3. 인류 공멸을 예비하는 탐욕에 시비하다!
노동 탄압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연 환경 파괴도 못지않게 심각하다. 4대강은 아마 두고두고 우리의 미래를 압박해 올 것이다. 그 불똥이 이젠 제주로 튀었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조정 시인의 시비를 들어보자.
돌이 부서지는 사진을 보았을 뿐인데
눈이 아팠다
내 앞을 지나가는 시간의 옷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돌도 혈연이구나
돌과 돌들을 짊어지기 위해
밥을 굶는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 잘 웃는 책무 하나 얼굴에 새긴 붉은발말똥게
이 하찮은 녀석이
하느님처럼 웃는
강정 오지 맙서
해군님들, 토건족님들
우리가 내어줄 수 없는 것은
한낱 돌들
한 판 순정인 구럼비
돌도 혈연인 줄 알았을 뿐인데
천 년 전 조부님이 보이고 백 년 후 손손자들이 보인다
눈이 밝았구나
심장 펄떡이는 돌틈에 사람이 깃들어 사는
우리가 결코 내어줄 수 없는
돌들을 위하여
강정 오지 맙서
―조정, 「돌을 위한 부탁」(한국작가회의 ‘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블로그 게재)
그리하여 조정은 강정마을로 갔다. 강정마을이 어떤 곳인가. 강정마을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호구역이자 제주도에서 지정한 절대보전지역이다. 천연기념물인 연산호 군락지와 붉은발말똥게의 서식처가 있는 곳이다. 넓은 바다를 향해 기묘하게 서 있는 구럼비 바위가 있고 그 사이로 용천수가 샘솟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땅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호구역과 제주도에서 지전정한 절대보전지역은 안중에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해군기지에 미군이 들어올 경우,라는 가정이 더 두렵다. 그렇게 되면 강정마을과 제주도는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는 화약고가 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 환경 파괴가 문제겠는가. 평화의 섬 제주가 아니라, 일촉즉발의 섬 제주가 되고 말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러는 한편으로 ‘제주가 세계7대자연경관에 선정되기를 바란다’는 홍보 선전을 뿌려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7대자연경관’과 ‘해군기지 건설’을 동시에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이 정도면 세계적이다.
조정은 위의 시에서 점령군 같은 “해군님들, 토건족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잘 웃는 책무 하나 얼굴에 새긴 붉은발말똥게/이 하찮은 녀석이/하느님처럼 웃는” 강정에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 말은 부드럽지만, 나는 이 속에서 무녀의 서릿발 간은 신기神氣를 본다. 그 신기에는 “심장 펄떡이는 돌틈에 사람이 깃들어 사는” “천 년 전 조부님이 보이고 백 년 후 손손자들이 보인다.” 강정은 그냥 강정이 아닌 것이다. 천 년 역사의 우리 땅이며 다시 또 백 년 후 손손자들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 땅이다. 그러니 “돌이 부서지는 사진을 보았을 뿐인데”도 마치 혈연처럼 “눈이 아”픈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천 년 함께 살면 돌도 혈연이 된다. 어디 돌뿐일까. 물도 나무도 풀도 바람도 지나가는 새도 혈연처럼 여겨질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당부한다. “우리가 결코 내어줄 수 없는/돌들을 위하여//강정 오지 맙서” 하고. 그러나 이건 실은 당부가 아니다. 단호한 선언이다. 나는 여기서 시인이 꼬아놓은 굵은 금줄을 본다. ‘해군님들 귀신, 토건족님들 귀신’을 향한 액막이 처방이다. 이것에는 강정마을만이 아니라, 평화로이 살고자 하는 모든 살것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죽임을 끌고 오는 저 귀신들을 향해 던지는 시비矢匕가 무겁고 단호하다.
이미 저질러진 환경 파괴의 실상이 어떤지 새만금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는 까닭에 조정 시인의 발언이 더욱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단산한 여자처럼 누워 있는 새만금 개펄
퇴박맞고 나뒹구는 몸뚱이 여기저기 마른버짐 피우고 있다
죽은 농게 눈에 화석처럼 박힌 갯내, 무딘 게걸음으로 걸어와 코 끝 지분거리는데
잘못 왔다, 길을 잘못 들었어,
빈 부리 치켜든 청둥오리가 개펄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뻘 속에 묻혀 살다 뻘이 되어버린 아낙들 속 빈 백합을 캐고 있다 끊임없이 헛손질만 하고 있다
갈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뻘의 입 옥니처럼 꼭 다물고 놓지 않는다 무언가 단단히 하소연할 게 있다는 눈치다
먼 서역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누란은 있다
소실된 왕국의 유적처럼 쓸쓸한 패총만 남은 마른 개펄 위
자멸하듯, 석양이
아낙들 등에 칼을 꽂는다
―이정원, 「누란樓蘭에 서다」 전문(≪시와시≫ 2011년 여름호)
새만금은 인간의 욕망이 만든 재앙이다. 새만금은 원래 이렇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들이 이웃하며 살아가는 기름진 갯벌이었다. 그때에는 사람들도 약탈자가 아니라 갯벌을 이용하는 살가운 이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갯벌을 돈으로 보기 시작했다. 갯벌을 드넓은 땅으로 간척하면 무궁무진한 보고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갯벌은 무궁무진한 보고였다. 사람들이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후손들까지 아주 오래도록 갯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은 거기 터잡고 사는 이들 이외에는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바닷물의 순환을 인위적으로 막고 개발한 지금, 새만금은 어떤가. “단산한 여자처럼 누워 있는 새만금 개펄/퇴박맞고 나뒹구는 몸뚱이 여기저기 마른버짐 피우고 있다.”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른버짐 같은 땅덩어리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누란이 따로 없다. 누란이 어디인가.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한때 번성했던 누란제국은 사막화로 물이 말라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거의 없다. 시인은 새만금에서 바로 그 누란을 본 것이다. “먼 서역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누란은 있다.”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참혹한 미래를 예감하는 전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탐욕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탐욕을 제어하지 않으면 “소실된 왕국의 유적처럼 쓸쓸한” 인간 흔적의 “패총만” 지구상에 남게 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무언가 단단히 하소연할 게 있다는 눈치”인 “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귀담아 들어야 한다. “빈 부리 치켜든 청둥오리”의 신음 들을 줄 아는 귀가 열리고 “죽은 농게 눈에 화석처럼 박힌 갯내” 맡을 있는 코가 뚫리는 날, 비로소 인간의 심안心眼도 열릴 것이다. 그때까지 양식 있는 시인들의 이와 같은 시비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리라.
4. 사랑을 지킬 텐가, 시비하고 시비하라
이처럼 현실에 시비하면서 마침내 시인들은 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열릴지 그려보아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소간 비관적이다. 인간과 자본 탐욕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라, 대재앙이 이미 우리 곁에 수차례나 몰려왔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자연재해가 일어나 전지구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급기야 이웃 일본에서는 큰 지진과 대해일로 수천 명이 죽거나 다치고, 방사능 누출과 오염 수준이 치명적일 만큼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반면,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하고, 곧 망각 속으로 잠기고 만다. 천만에, 천만에!다. 우리라고 해서 자연재앙이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원자력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우리 원자력 기술이 결코 일본의 우위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원자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원자력 발전을 확 줄이거나 포기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는 있다. 지진이나 화산활동, 태풍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들을 인간이 무슨 수로 제어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환경재해인 원자력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인간이 덜 쓰거나 대체하거나 혹은 안 쓰면 된다. 사소한 실수 하나로 전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는 게 원자력이다. 그냥 덮어둘 사안이 절대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찌 원자력뿐일까. 이밖에도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요소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틀어쥐어야 할 것이 인간과 자본의 탐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에서 시들을 통해 일부 확인한 것처럼 전지구적 오염덩어리는 다 여기서 비롯한다.
그런데도 시인들이여, 침묵할 것인가. 인간과 자본의 탐욕에 관한 한, 지구 공멸을 일으킬 수도 있는 원자력에 관한 한, 생존을 저해하는 그 모든 움직임에 관한 한 끊임없이 시비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 눈 앞에서 바로 그것들로 인해 죽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시비하는 것은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며 우리의 생존을 지켜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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