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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사랑은 왜 멈추어서는 안 되는가/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채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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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35회 작성일 11-12-3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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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사랑은 왜 멈추어서는 안 되는가/김수영 시 사랑의 변주곡/채상우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의 시는 그의 산문과 더불어 특히 그의 몰후 새로운 시적 기획들의 토양과 사후 승인 자료로 자주 호명되어 왔다. 그 까닭들이야 여럿이겠지만 아무래도 시와 세계에 대한 김수영의 태도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온몸의 시학’으로 요약할 수 있는 김수영의 시론만큼 생을 다해 시인이 걸어가야 할 자세를 도저하게 선언한 사례를 한국문학사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선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표 불가능한 어떤 사태를 선취하는 행위다. 이미 알려진 바를 정식화하는 일은 진정한 의미의 선언이 아니다.) 그의 유명한 산문에서 김수영은 ‘온몸의 시학’을 “자유의 이행”이라고 지정한다. 그리고 “자유의 이행”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시여, 침을 뱉어라」, 전집 2, p.401),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는 것(「눈」, 전집 1), 혹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괴로운 설사”(「설사의 알리바이」, 전집·1)라고 적는다. 그런데 이 일련의 행위들을 비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의 요청을 존중하자는 맥락에서가 아니다(“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단념하라”: 「설사의 알리바이」). 만약 이 행위들을 비유로 취급한다면, 그것들 자체의 사건적 의의는 휘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행위들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설사의 알리바이」) 선언―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그 이전과 이후를 완벽히 단절시키는 사건으로서의 순간, “자유의 과잉”, “혼돈”의 “시작”(「시여, 침을 뱉어라」, p.403)을 촉구하는 선언인 셈이다. 「사랑의 변주곡」은 김수영의 이런 선언-사건이 어떻게 “사랑”으로 전화되는가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는 시다.

    「사랑의 변주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난감한 일이다. “사랑”의 진원지가 “욕망”이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변주하고 있는 주제 선율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뜻이 아닌가. 사태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짚어 보자. “발견”의 사전적 의미를 존중한다면 “욕망” 내에는 이미 “사랑”이 거주하는 셈이다. 적어도 김수영은 그렇게 여긴다. 다만 아직 모르고 있거나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과연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두 번째―그 일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욕망”의 정체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욕망”이 “사랑”으로 지양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말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이와 관련된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와 산문 등 여기저기에서 “욕망”과 관련된 문장들을 끌어오면 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욕망”을 하나 혹은 여러 항목들로 지목하거나 대체한다고 해서 이 첫 문장의 느닷없음이 해결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 사실 이 시구를 힘겹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소이연은 어쩌면 그 갑작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욕망”(과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떼어 숨을 고르고 다시 더듬어야 할 점은 느닷없는 명령과 갑작스러운 선언으로 짜인 문형 자체다. 문형에 주목한다면 사실 “욕망”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욕망”(과 “사랑”)은 이 문형에 의해 비로소 작동하는 일종의 개념-기계라고 봐야 옳다. 즉 “욕망”은 김수영의 호명에 따라 불러 세워지고 김수영의 명령에 따라 어떤 행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욕망”의 “입” “속”은 김수영이 “사랑을 발견”하는 장소 달리 말해 김수영에 의해 “사랑”이 구성되는 공간이다. 다시 강조하겠다. 이는 모두 김수영의 급작스러운 선언의 효과인 셈이다. 「사랑의 변주곡」에서 “욕망”이 다시 말해질 필요가 없는 까닭 또한 이것이다.

    김수영의 이 느닷없는 선언의 파장은 1연과 2연 전체의 행 배열까지 흔든다. 채 완결되지 않은 구절 혹은 문장으로 행을 끊고 다음 행에 그 피수식어(구)를 배치함으로써 발생하는 김수영 식의 빠르고 울퉁불퉁한 리듬은 “과잉”과 “혼돈”을 가중시키며 무언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 전집 2, p.416)이 벌어지는 장으로 시를 이끌어 간다. 보라. “도시의 끝에/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는 다음 행에서 “사랑”―“처럼”으로 긍정되고 또한 즉시 부정된 뒤 소멸한다(“지워지는”).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곧이어 “라디오의” 이 불편한 소음이 “지워지는” 장소로 “강”이 등장한다. “강”은 일단 “사랑”을 대신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강”은 김수영이 적은 그대로 흐른다. 흘러서 사라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김수영은 “강 건너” “암흑”을 바라본다. 그곳엔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는 “마른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저쪽에”는 “쪽빛/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슬픔처럼 자라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도야지 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 끊이지 않는 “과잉”과 “혼돈” 그리고 번복의 과정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어느 순간 “사랑”이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김수영(과 “우리들”)의 실천적 태도로 문득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김수영은 단지 “암흑”을 “사랑”이라고 명명하거나 그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암흑”이라고 직접 적는다. 여기에서 “사랑하는”은 “암흑”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모두 의미하는 인식―실천practice의 표시다. 물론 이를 두고 “암흑” 속에서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는 “마른 나무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읽기는 “마른 나무들이” 어떻게 해서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안을 미리 작성해 두어야 가능하다. 또한 “그 봉오리의/속삭임”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서울의 등불을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은 실은 다음과 같다: 그것“까지도 사랑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왜 그러한가? 이제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라고 적은 김수영에게 두 번째 질문(그렇다면 그 일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을 할 때가 다가왔다. 이를 위해 다시 처음부터 되짚어 보자. 앞선 선언은 어떤 상황과 조건을 초래한다. 그것은 “사랑”이 “욕망”의 “입” “속”에 있으며, “사랑”은 그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 “욕망”의 “입” “속”에 “사랑”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은 정말이지 오인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러한 가정은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 의지에는 불가피함을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일관성을 부여한다. 앞 문장에는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라는 행을 두 가지 차원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는 점을 부기해야 한다. 즉 첫 행에는 “욕망” 안에 “사랑”이 내재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욕망”을 발화하도록 명령하는 장면이 겹쳐 있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맥락은 김수영이 왜 “사랑”을 “욕망”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욕망”이 왜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지(=지속될 수밖에 없는지)를 암시한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발화는 “욕망”을 결코 온전히 다 말할 수 없다. 즉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은 순전하게 표명될 수 없으며, 끝끝내 실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실현 불가능성은 “사랑”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그리고 이 재생산 과정은 “사랑”이라는 타대상(objet [petit] a)에 의해 일관성을 갖춘다. 이런 맥락에서 1연과 2연에 걸쳐 등장하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 “강”, “암흑”, “마른 나무들”, “쪽빛/산”이 왜 끊임없이 “사랑”을 대신할 항목들로 제시되었다간 유보되는지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김수영은 이 과정에 하나를 추가하는데, 그것은 위 항목들을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시적’ 운운하며 긍정하는 일은 ‘비논리적’이라 질책하는 손가락보다 오히려 무능하다. 비록 그것이 어떤 결여를 동반하고 있을지라도 이는 선언―사건에 의해 비롯된 상황을 그 상황 내에서 사고하고 극한까지 밀어 나가(고자 하)는 실천적 개입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스스로 설정한 정언명령―‘사랑하라, 끝까지 사랑하라’를 쉬지 않고 충실히 수행한다. 물론 이런 윤리가 “신념”―“광신”의 차원으로 귀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라는 확신은 공허하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김수영이 제시한 사랑하기의 무한한 반복은 단속적斷續的이다. 그것은 끊겼다가 이어진다: “간단(間斷)도 사랑/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김수영이 행하는 사랑의 제작술은 요컨대 “눈을 떴다 감는” 행위의 반복이다. 그것은 “실패한 것”의 반복 즉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단지 기억하거나 되사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폭풍의 간악한/신념”으로 전락할 게 뻔하다) “도시의 피로에서” 다시 “단단한 고요함”을, 그 이루지 못했던 가능성을 “배”우고, “가슴에/새”기고, “명상”하는 일 말이다. 김수영이 “과오를 더 저지르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시작 노트」, 전집 2, p.460)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라’는 윤리는 간단없는 반복 속에서 스스로의 “과오”를 지속적으로 삭제함으로써 미세한 차이들을 생산하고 이를 동력으로 하여 “사랑”을 다시 정립하는 실천이다. 요컨대 “사랑은 최초의 명명에 대한 끝나지 않는 충실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끊임없이 “변주”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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