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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시, 자기 부정과 성찰의 처소處所/이상 시 회환의 장/한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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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625회 작성일 11-12-3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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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깊이 읽기/시, 자기 부정과 성찰의 처소處所/이상 시 회환의 장/한세정

 

 

        회환의 장

        이상

 

 

가장 무력無力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女性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나태懶怠는 안심安心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職務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歷史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辭表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버렸다

도서관圖書館에서 온 소환장召喚狀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봉분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적다

나에겐 그 무엇을 이해理解해야 하는 고통苦痛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완전히 비겁卑怯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

(유정 번역, 문학사상, 1976. 6.)



프롤로그

여기 한 젊은 시인의 페이지가 있다. 그의 페이지에는 절망의 견고한 더께가 그득하다. 그는 지나치리만큼 무미건조한 문체로 자신의 페이지를 담담하게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시가 안 써질 때 나는 「회한悔恨의 장」을 읽는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절망에 빠진 젊은 이상의 목소리와 만난다. 그 고백을 들으며 나는 현재의 나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내 참담해진다. 내가 가진 절망과 슬픔은 ‘위악僞惡’과 가짜의 ‘포즈’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이상이 「회한悔恨의 장」에서 발설하는 자기 부정과 절망감은 청춘이 감내해야 할 성장통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자기 부정과 절망은 자기모멸과 부정의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 부정과 절망에 고뇌하는 젊은이의 내면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현재적이지만, 그러한 자기 부정과 절망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 시는 ‘미래적’이다.



자기 부정의 본원적 의미

「회한悔恨의 장」은 이상의 사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시는 1966년 7월 ≪현대문학≫에 원문인 일문으로 최초로 발표되었다가 이후 유정의 번역으로 ≪문학사상≫에 다시 실렸다. ≪문학사상≫에 수록될 당시 조연현이 소장했던 이상의 유고작품이란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 사후 발굴작이지만 이 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상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의 다른 시와 유사한 이미지나 구절이 발견된다는 사실 역시 이 시가 그의 작품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 준다. 예를 들어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라는 구절은 오감도烏瞰圖 제십오호第十五號의 “내꿈을지배支配하는자는내가아니다”라는 구절을 상기시키며, 이 시의 제목인 「회한悔恨의 장」은 <조선일보>에 발표했던 「육친肉親의 장」과 제목 간의 유사성을 보인다. 이밖에도 이 시의 주된 비유로 활용된 “문자”, “도서관圖書館” 등의 시어 역시 이상의 다른 작품에서 발견되는 문자 관련 비유와 관련성을 보인다.

15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부정법의 빈번한 사용이다. 의미론적 층위에서 ‘없다’, ‘~할 수 없다’, ‘~지 못하다’, ‘아니하다’ 등의 부정어는 ‘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내밀하게 관련된다. 

화자는 “한 여성”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영역을 비롯해서 “직무職務”와 “일”이 뜻하는 사회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가장 무력無力한 사내”가 되기 위해 얼굴이 보기 흉하게 얽인 “얼금뱅이”가 되었다는 진술이나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職務를 회피한다”는 고백은 화자의 소외가 의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드러낸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부정적 상황을 일시적으로나마 은폐하려는 위장술에 불과하다. 이 같은 위장술은 오히려 화자의 절망감을 우리에게 환기喚起시킨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시행 역시 그러한 내면이 노출되어 있다. 이 진술은 지배에 대한 화자의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세상의 질서와 규제를 의미하는 지배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로부터 완전히 일탈될 때 엄습하는 공포와 소외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는 3연에서도 전개된다. 화자는 개인적 시 · 공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역사”와 생활인으로서 “세상”과 맺은 사회적 관계를 “무거운 짐”이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자신을 억압하는 것일지라도 그러한 세상의 규율로부터 벗어나는 “사표쓰기”는 더더욱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때문에 절망감은 더욱 심화된다. 이 절망적 인식은 마침내 화자로 하여금 “나의 문자”를 가두어 버리고 “도서관圖書館에서 온 소환장召喚狀”을 읽지 못하게 만든다. 이처럼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의 매개체였던 “나의 문자”를 버릴 때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완전한 소외가 이루어진다. 

화자는 자신을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명명한다.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 “의무”나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苦痛”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의무로부터의 해방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패배감을 안겨준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으며, 자신 역시 “아무것에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한 자신의 삶을 “卑怯”하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비겁하다고 평가하는 이 순간은 이 시에서 가장 의미있는 순간이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처음으로” “완전히”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패배의 목소리를 통해 이상은 스스로에 대한 적확한 인식을 마련한다.

이 시에서 이루어진 자기 부정과 폭로는 이 시의 제목과 관련해 살필 때 더욱 의미가 확장된다.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뜻의 “회한悔恨”은 자신의 부정적 상황을 폭로하고 자각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현재 삶에 대한 반성을 연동한다. 주된 어법으로 쓰인 부정법은 이 같은 자기 성찰의 바탕이 된다. 부정법은 ‘나’의 부정성과 한계를 자각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인식을 이끌어낸다.

이상의 많은 시편에서 ‘나’는 화자인 동시에 화자가 관찰하는 시적 대상으로 위치한다. 그러한 시편에서 ‘나’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부정한다. 하지만 ‘나’에 대한 부정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그와는 대별되는 참다운 존재로서의 ‘나’가 위치한다. 이상 시의 자기 부정의 이면에는 그가 갈망했던 진정한 ‘나’에 대한 염원이 투영되어 있다. 이상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直視하면서 ‘나’의 참모습에 대해 고뇌한다. 따라서 이상 시의 자기 부정은 ‘나’를 냉철하게 인식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운데 참된 ‘나’의 존재 의미를 고찰했던 것이다.


시, 문자로 그린 자화상自畵像

그렇다면 이상은 왜 그토록 자기를 모멸하고 부정하면서까지 참다운 ‘나’에 대해 몰두했을까?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여기는어느나라의떼드마스크다. 떼드마스크는도적盜賊마젓다는소문도잇다. 풀이극북極北에서 파과破瓜하지안튼이수염은절망絶望을알아차리고생식生殖하지안는다. 천고千古로창천蒼天이허방빠저잇는함정陷穽에유언遺言이석비石碑처럼은근히침몰沈沒되어잇다. 그러면이곁을생소生疎한손짓발짓의신호信號가지나가면서무사無事히스스로워한다.  점잔튼내용內容이이래저래구기기시작이다.

―이상, 「자상自像」 전문(<조선일보> 1936. 10. 9)


화자는 죽은 이의 얼굴을 본 떠 만든 “떼드마스크”로 자신의 얼굴을 비유한다. 죽은 이의 정지된 시간 속에서 데드 마스크의 수염은 더 이상 “생식生殖”하지 않고 “절망絶望”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데드 마스크의 절망적 얼굴을 바라보며 이상은 “유언遺言”, “내용內容”이 상기하는 자기 고백으로서의 ‘시쓰기’를 떠올린다. 

이상에게 ‘시’란 자기 부정과 고백의 처소處所이자, 스스로를 되비치는 거울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스스로의 페이지를 시화詩化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상이 자기 자신에 골몰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집필했던 이유는 그가 열망했던 진정한 ‘나’의 탐색과 ‘시쓰기’가 서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시’란 ‘나’의 병약한 분신分身들이 모여 만든 ‘문자로 된 자화상’이다. 「회한悔恨의 장」에서 그는 자기 부정의 절망적 순간까지도 문자, 도서관, 읽기 등 ‘시쓰기’와 관련된 연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24세歲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육친肉親의 장」)는 시행 역시 산고産苦의 시간을 관통해 어머니가 ‘나’를 낳았던 것처럼 24세 청년 이상 역시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 “무엇”은 「육친肉親의 장」이란 제목에서 유추되듯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눈 혈육 같은 ‘시’를 낳는 것, 즉 ‘시를 쓰는 것’이다. 이상은 그것만이 진정한 자기 성찰의 귀결점이자 자화상을 완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에필로그 

이상은 스물여덟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시인이고 싶었으나 아직 시인이지 못했던 스물여덟의 봄에 나는 이상 시를 다시 만났다. 내가 그때 이상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그의 정직한 시선 때문이었다. 이상이 자신을 향해 ‘위악僞惡’이며 ‘포즈’라고 말한 행간行間까지도 나는 그가 언제고 진실만을 말했다는 것을 잘 안다. 어느덧 나는 이상의 마지막 나이를 넘겼고 시인이 되었다. 시가 안 되는 날에,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힘겨운 날에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린다.

「회한悔恨의 장」을 넘기며 오늘도 나는 이상과 같은 마음으로 절망한다. 하지만 이 절망과 패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내게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나의 ‘회한’이 깊은 성찰을 거쳐 정직한 한 편의 ‘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이상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시가 지녀야 할 미적 의식을 생각한다. 어떤 선험적 슬픔도 거짓말이라는 것,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결국 나는 세기의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하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리멸렬하게 나의 얼굴이 단 하나의 과녁이 될 때까지 응시할 것, 그것이 이상이 나에게 말해준 뼈아픈 진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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