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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쩔름거리며 따라 걷는 천 리 황톳길/한하운 시 길로 가는 길/차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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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914회 작성일 11-12-3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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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쩔름거리며 따라 걷는 천 리 황톳길/한하운 시 길로 가는 길/차민기

 

 

全羅道 길-小鹿島로 가는 길에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문둥병 시인’ 한하운(1919∼1975)은 함경도 사람이다. 그의 시에 흘러내리던 피고름을 처음 보았던 때는 내 나이 열다섯이었다. 병을 다스리고자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세속의 말이 붉은 먼지처럼 나라 안을 떠돌던 그 때에 ‘천형天刑’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그의 시, 「全羅道 길-小鹿島로 가는 길」에서였다.

전라도까지 천릿길을 시인은 여덟 발가락 떨어져 나간 걸음으로 “쩔름거리며” 걸었다. “낯선 친구”일망정 “문둥이끼리 반갑다.” 참혹한 세월 앞에 동병상련의 처지가 서로를 껴안게 한다. “숨막히는 더위 속”을 걸으면 어디선지도 모르게 툭, 툭, 떨어져 나간 발가락들. “남은 두 개의 발가락” 힘만으로 남은 천릿길을 간다.

천형의 시인. 그에게 세상은 어떠했을까? “호적도 없이/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었으리라(「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한센인들은 일찍이 ‘처치의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편견과 오해, 그리고 ‘낙인’이라는 사회적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어린 사슴을 닮았다 해서 ‘사슴섬’이라 불리던 이름을 일제는 ‘소록도小鹿島’로 고쳐 썼다. 내지인들에게 혐오감을 준다하여 한센인들을 강제로 사슴섬 안으로 밀어 넣은 때는,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그 몇 해 뒤인 1916년의 일이었다. 이때 일제가 내세운 이유는 ‘보건 위생’과 ‘미관의 문제’였다. 그 이면에는 한센인들을 격리 수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통합을 유도하고, 한센인들의 배제를 통해 근대적 지배 권력의 강화를 꾀하려는 책략이 있었다. 그리고 그 폭력의 한켠에 오래도록 우리들의 편견도 보태어져 왔다.

참혹한 삶의 길 한가운데서도 시가 “막돼먹은 세상을 구원하리라” 시인은 굳게 믿으며 그 길을 걸었다. 그리고 “시인들이 그 구원의 맨 앞자리에서 봉화불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新文藝≫, 1958년 9월호)라며 시인의 자리를 일깨웠다. 그래서 시인은, 함께 걷는 동료들과 “꽃같이 아름다”웠다. 천릿길을 걸어내리며 서로의 발가락을 주워주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피고름을 닦아주기도 하면서. “모두가/꽃같이 아름답고/……꽃같이 서러”운 까닭이었다(「生命의 노래」). 아직도 곳곳이 붉은 전라도 길을 가노라면 물컹, 디디는 자리마다 처연한 그의 시구가 밟힌다.

이후로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곳은 잘 다듬어진 다리를 건너 서울에서도 한 나절이면 가닿는 곳이 되었다. 때문에 주말이면 여느 관광지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빈다. 성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시인이 손가락 발가락 떨구며 걷던 피 어린 황톳길에는 이제 꺼멓게 아스콘이 딱지처럼 눌러 붙었다.

그러나 섬 안의 이저쪽은 여전히 핏멍울 얼룩이 그대로다. 군데군데 철조망으로 찢기고 기워진 자리가 천형의 흉터로 남아 몸서리치게 한다. 한때 그 철조망의 안과 밖, 한 핏줄을 나눈 피붙이들이 바람에 맞서야할 때가 있었다. 행여 ‘천형의 먼지가 피붙이들에게로 날아들까’ 염려스러웠던 까닭이다.


“‘한센병’에 걸린 부모를 두었지만, 병에는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이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수탄장(슬픔과 탄식의 길)에서 면회가 이뤄졌다. 행여 병균이 아이들 쪽으로 날아갈까봐 부모들은 바람을 맞고 서서 3∼4미터 건너편에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배 아파 낳은 내 새끼가 정 보고 싶으면 당시 섬을 반으로 나누던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몰래 만나는 방법도 있었다.”

―김범석, 「‘당연한 것’을 빼앗긴 소록도 이야기」(<중앙일보>, 2008. 7. 12.)


‘수탄장愁嘆場’ 풍경이다.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눠 선 부모와 자식들이 눈물로 안부를 묻고 울먹이며 대답하던 자리다. 서너 발자국만 떼어 옮기면 제 새끼 뺨을 부비고, 머리를 쓰다듬을 만큼의 거리는 마냥 아득하기만 했다.

변변찮은 나날살이에서 사소함으로 마음을 다쳐 주저앉는 날이 여럿이다. 자잘한 생채기 하나에도 요란을 떨며 엄살을 피는 나날살이가 그의 시 앞에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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