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3호(가을호)흐름 진단/특이점과 영겁회귀/박찬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62회 작성일 11-12-31 22:32

본문

  흐름 진단/특이점과 영겁회귀/박찬일

 

 

 

 

∙이경우, 「풍경을 그리다」(≪시와환상≫, 2011. 여름)

정숙자,  「순수이성과 지평」(≪애지≫, 2011. 여름)

허정애, 「상대성이론의 견지에서」(≪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1. 5~6월)

장종권, 「소리도 죽어야 소리가 된다」(≪시와정신≫, 2011. 여름)

김영애, 「‘그 너머’ 칠면조를 보여줄까」 부분(≪시인시각≫, 2011. 여름)




137억 년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알 수 없다. 137억 년 전, 특이점 이후에 어떤 상태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 그리고 암흑물질인 중성미자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티끌보다 ‘영원히’ 작은 점 하나가 만든 세계를 곧 이어 가벼운 수소원자와 헬륨원자가 채웠다고 한다. 이후 더 무거운 원자들이 만들어지고, 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양자와 음전자가 함께, 음양자와 양전자, 소위 반물질이 있었으나 이들은 사라졌다고 한다. 같은 반물질인 중성미자는 지금 1% 정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특이점은 어떻게 형성되었고―137억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것은 미궁으로 남겨두고―전자와 중성미자는 어떻게 해서 존재한 것이고, 이것에 질량을 부여한 것, 소위 신의 입자라고 알려진 힉스는 ‘어디서부터’ 존재한 것인가. 신이 특이점이라고 하면 간단하다. 특이점이 신이다!? 신은 스스로가 원인인causa sui(?)가 아닌가. 팽창하고 있는 우주, 태양에 고정되어 있는 태양계, 태양계의 지구. 문제는 137억년이 영원한 세월이지만 영원한 세월도 ‘벌써’ 지나갔다는 것이다. 45억년의 지구도 지나갔다는 것이다. 미래의 영원한 세월도 지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는 어디구나

그 눈부신 참혹이구나

나는 저무는 호수에서

작은 분수처럼 쪼그리고 앉아

어두운 숲을 생각한다


원래 없는 자리에서

말쑥한 종려나무 하나가

높은 데서

알 수 없는 말들을 굽어보고

[…]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저속에

불쌍한 나의 의자여

―함성호, 「어두운 산책」, 부분, ≪현대문학≫, 2011. 6


맨 끝의 “불쌍한 나의 의자”는 빈 의자나 다름 없는 의자로 보인다. 137이나 45라는 숫자를 기억한다면. “나는 저무는 호수에서/작은 분수처럼 쪼그리고 앉아/어두운 숲을 생각한다”라고 앞에서 말했더라도. 그리고 “눈부신 참혹”이라는 모순형용이 심상치 않다. 인간이 없는 곳에서 “저무는 호수”, “어두운 숲”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는 말들”조차 과연 의미나 있기나 할 것인가. 호수가 아닌 ‘저무는’ 호수라고 했다. 숲이 아니 ‘어두운’ 숲이라고 했다. 말이 아닌 ‘알 수 없는’ 말이라고 했다.

“원래 없는 자리에서/말쑥한 종려나무 하나가/높은 데서 […] 굽어”본다고 한 것이 주목된다. ‘종려나무’를 기독교적 상징이라고 봐도 될까. 원래 없는 곳에서 출현할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최후로 남아있는 것도-세계가 팽창하는 힘을 이기고 다시 수축하기 시작해서―특이점이 된다고 한 것? 특이점이 신이라고 한 것?!


향나무 줄지어 앉아있는 철길 옆

바짝 마른 배수로 따라

며느리밑씻개 한 무리 기어가고 있다

파란 눈망울의 달개비

꼬리 흔드는 강아지풀 바라보는데

개망초 떼 지어 하얗게 웃고 있다


모두들 제멋대로지만

참 자연스럽다는 생각


더 이상 인간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이경우, 「풍경을 그리다」 부분, ≪시와환상≫, 2011 여름


생태주의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바라보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맨 끝 구절 “더 이상 인간만 끼어들지 않는다면”에 이의를 제기한다. “향나무”,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강아지풀”, “개망초”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간이 지켜보는 눈이 없다면!  아니,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 향나무,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강아지풀, 개망초 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 없는 곳에서 그들이 존재하기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를 더 좁혀보자. 후설이 얘기한 지향성 개념을 차용하는 것이다. 향나무, 며느리밑씻개, 달개비, 강아지풀, 개망초들이 인간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인간이 그것들을 지향하는 의식이 없으면 그것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 정숙자의 「순수이성과 지평」을 보자.


파 다듬으며 파 생각만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파 다듬으며 ‘별을 생각한다’고 하자. ‘안데르센을 생각한다’고 하자 바람보다 멀리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하자. 고장 나지 않은 기계이걸랑 다만 ‘고마워한다’고 하늘에게 말씀드리자. 살면서 살아가면서 ‘삶’만을 생각하지는 말자.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검은머리도 파뿌리에 맡겨버리자.

―정숙자,  「순수이성과 지평」 부분, ≪애지≫, 2011 여름


“파 다듬으며 파 생각만 하”면 파는 존재하는 것이고, 파 다듬으며 “별”, “안데르센”, “어머니” 등을 생각하면 파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그럴 수 있다. 파를 다듬으며 파를 재향할 수 있고, 파를 다듬으며 별, 안데르센, 어머니를 지향할 수 있다. 지향하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투명한 해파리에서조차 그 행위의 기저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생각은 생물보다 빠르게 생성되고 소멸합니다

누구나 노력하지만 도달하지 못하지요

하늘엔 우주의 과거가 빛나고


과녁을 넘거나 못 미친 말들이 사태처럼 쏟아집니다


나는 어둠의 지평에서 떠오르는 피레네의 성을 봅니다

중력에 저항하는, 영원히 떠다니는 성을

―허정애, 「상대성이론의 견지에서」 부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1. 5-6 


“중력에 저항하는, 영원히 떠다니는 성”(맨 끝)이 있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중력의 법칙이 신일 수 있다고 말하는 스티븐 호킹 같은 물리학자들. 중력의 법칙은 다름 아닌 否定의 법칙이다. “소멸”의 법칙이다.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법칙이다. “하늘”에서 “우주의 과거가 빛나”게 하는 법칙이다. “과녁을 넘거나 못 미친 말들”이라고 했지만 과녁을 넘은 말들도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곧 떨어지게 될 것이다. 중력이 신이다?! 제목에 “상대성이론”이 있다. 빛을 휘게 하는 것은 중력이 유일하다.

이점에서 주목되는 시가 장종권의 「소리도 죽어야 소리가 된다」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를 담담하게 말한다.


소리는 사라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소리가 된다.

소리도 죽을 줄을 알아야 다음 소리가 생명을 얻는다.

오래도록 살아있는 소리라야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소리가 다음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 죽어 다시 다음 소리를 만들어야

소리가 소리 되어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장종권, 「소리도 죽어야 소리가 된다」 부분, ≪시와정신≫, 2011 여름


“사라”지지 않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죽을 줄을 알아야 다음 소리가” 계속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는 우주 법칙을 담담하게, 너무도 담담하게 말한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아닐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하고 사라지는 소리들이 서로 어긋날 수 있다. 모순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에게 모순이 없었을까. 붓다에게 모순이 없었을까. 그때그때마다 최선을 다하면 그때와 그때는 모순이다. 위대한 자가 있다면 그는 모순에 처해있는 자이다. 이것이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가 함의하는 진정한 뜻이 아닐까.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 다시 돌아오므로 그때그때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모순’을 행해줘야 한다는 것.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를 김영애의 「‘그 너머’ 칠면조를 보여줄까」에서도 볼 수 있었다. 눈길을 끈 것을 “‘그 너머’”였다.


안과 밖이 섞이지 않는다

‘그 너머’에서 누가 기다리지 않는다

칠면조 눈알이 있을 리 없다

회전문이 돌아간다 빠져나간다

아이들이 돌아간다 빠져나간다

우뇌 쪽에서 시작된 통증이 계속되고 어차피

‘그 너머’에서 누가 기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없었던 칠면조다

―김영애, 「‘그 너머’ 칠면조를 보여줄까」 부분, ≪시인시각≫, 2011 여름


역사는 “회전문”이다. 회전문처럼 돌아간다. 이쪽과 저쪽의 대기는 섞이지 않는다. 이 쪽의 대기는 ‘그 너머’에 도달하지 못한다. 어차피 그 너머에서도 “누가 기다리지 않는다”. 그 너머에서 누가 기다리지 않는데도 우리는 부지런히 회전문을 통과하고 있다. 사실은 통과하지 못하는데 통과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통과하더라도 중력의 법칙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영겁회귀의 법칙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박찬일∙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데뷔. 시집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시론집 해석은 발명이다, 사랑, 혹은 에로티즘, 근대: 이항대립체계의 실제, 박찬일의 시간 있는 아침, 연구서 독일 대도시시 연구, 시를 말하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 등. 박인환문학상, 젊은시인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