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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책 크리틱/사랑의 소모성, 표상공간 구축 반복(충동) 전말/유형진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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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820회 작성일 11-12-3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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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사랑의 소모성, 표상공간 구축 반복(충동) 전말/유형진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장이지



1. 어떤 ‘이행’의 극한값

글쓰기란 항상 ‘사후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회상적’이라고 부르는 글쓰기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모든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기억에 의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가 대상과 기호의 이항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은유인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글쓰기란 항상 사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린다.

수사학적인 은유는 언어 자체가 은유라는 것을 ‘은폐’함으로써 자신의 존립 기반을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상’이나 ‘기억’이라고 부르는 영역은 글쓰기 자체가 바로 사후적이라는 것을 ‘은폐’함으로써 자기 영역의 경계를 확정한다. 이런 것들은 일종의 메커니즘이다.

유형진의 첫시집피터래빗 저격사건(2005)은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회상과 기억으로 직조되어 있다. 밥 딜런과 애버뉴b, 그 외의 달콤한 음악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장르에서 추출된 각종 문화코드들도 회상이나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그러나 그 ‘배경음악들’은 메커니즘적인 차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메커니즘적인 차원의 ‘회상’이나 ‘기억’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와 그 언저리에 있는 시들에서 드러난다. 연탄불에 변색되어 짝짝이가 된 단화와 같은 것들은 ‘체험’에서 ‘기억’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길어올려진다. 이러한 ‘재현’이야말로 사실은 지극히 재래적인 방식이다. 게다가 ‘전통적’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다. 적어도 제목에 포함된 두 개의 인유(이바라기 노리코, 신이현)를 괄호 안에 넣어둔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는 유형진의 등단작이다. 이 등단작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녀는 회상이나 기억, 이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지만 ‘리코딩 장치적인 것’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피터래빗 저격사건이라는 시집은 이 ‘이행’이나 ‘결렬’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에 이미 ‘타구唾具’와 ‘주말의 명화’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서히 ‘주말의 명화적인 것’을 강화해나가면서 ‘피터래빗’이나 ‘큐브스 내셔널 마스 그래픽스CNMG’와 같은 세계로 이행해간다.

유형진의 두 번째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2011)은 그 이행의 확장을 극한값으로 보여준다. 이 시집은 2000년 이후 극대화하고 있는 ‘차이에 대한 욕망’,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날조된 개성 신화’와는 판연히 다른 세계를, 혹은 그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2. 리코딩 장치의 퇴조와 표상공간의 반복

유형진 시에서 리코딩 장치적인 것의 퇴조가 그녀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따져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에서 ‘타구’로 표상되는 기억의 세계는 매우 파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어린 나무」에는 여전히 유년 시절의 기억이 목록화되어 열거되고 있지만, 그 기억은 곧 사라질 기억의 편린으로만 겨우 남아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떠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 사이에 매우 위태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기 유년의 자아이기도 한 ‘어린 나무’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지 말라고 타이른다. 이 타이름은 여전히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성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레이터의 어조에는 소멸하는 기억에 대한 향수와 서운함, 유년과의 결별에서 오는 서글픔이 착잡하게 얽혀 있다. 이러한 서글픔은 「빨간 밭」에서는 부모와의 ‘분리’를 두려워하는 유년화자의 공포로 극대화되기도 한다. 유형진 시에서 기억의 퇴조는 이처럼 세계와의 ‘분리’에 대한 공포로 확장되거니와,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은 이 분리 ‘이후’의 악몽을 동화적으로 채색하여 제시한다.

리코딩 장치적인 것의 기능부전은 재현공간으로서의 문학이 외부세계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현공간이 사회적인 공간을 종이 위에 기입하지 못하고, 재현공간이 표상적인 것들을 종이 위에 재기입하게 된다는 말이다. 유형진은 끊임없이 사회적인 공간과 닮지 않은, 혹은 조금만 닮은 ‘랜드’들을 영토화한다. ‘CNMG’(「화성인 2인조」), ‘버블버블랜드’(「버블버블랜드의 추잉」), ‘분꽃 정원’(「낭만 사회와 그 적들」), 「랜드 하나리」 연작에 이르기까지 유형진은 자기만의 표상공간을 구축한다.

‘랜드 하나리’로 말할 것 같으면, 유형진은 용 ‘퍼프’가 사는 동굴을 중심으로 단풍나무 숲을 배치하고 피에로가 고민하는 공간인 ‘피에路’도 만들어낸다. 오리들의 피겨스케이팅 대회와 그로 인해 생긴 별들에 얽힌 우화나, 유산과 유성의 관계에 관한 우화도 곁들인다. 그리고 히잡을 쓴 여인의 울음 이야기를 통해 ‘랜드 하나리’의 규범과 그 예외에 대한 설정들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은 건축적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방식이지만, 역설적으로 표상공간 특유의 ‘듬성듬성함’을 수반한다. 이러한 공간감은 인터넷 등의 그래픽적 방식을 전유한 데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랜드 하나리’의 시간성, 혹은 무시간성이 중요하다. ‘랜드 하나리’는 물리적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 공간은 정체감과 지루함, 무한한 반복으로 특징지어진다. 알록달록한 그래픽으로 구축된 이 공간은 화려함 이면에 ‘경미한 공포심’(「랜드 하나리의 단풍 이야기」)을 감추고 있다. ‘주어’를 잃은 채로 ‘늘’ 매달려 있어야 하는 단풍잎의 지루함에 대하여 내레이터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랜드 하나리’는 질투, 증오, 갈등, 오해, 미련, 포기, 애증, 마지막으로 용서(「랜드 하나리의 ‘함부로’」)라는 단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곳에서는 ‘번번이’ 아이가 유산된다. ‘매일매일’ 오리들이 하늘 도화지를 찢어놓기 때문에 ‘번번이’ 하느님들이 귀찮아지기도 한다(「랜드 하나리에서 오리들의 갸우뚱 피겨스케이팅 대회」). 「랜드 하나리에서 피에路의 피에로」에서는 ‘피에로’ 혹은 ‘피에路’라는 말이 편집증적으로 반복된다. 이 반복의 과정에서 차이들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아직 그 차이들에서 어떤 뚜렷한 탈주선이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랜드 하나리’ 자체가 하나의 마지노선이지만, 이 표상공간이 시름없고 안전한 공간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유형진은 자주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공간을 대립시킨다. 가령 「심장」 연작에서 그녀는 어른들의 세계를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세계로 규정하거나 사소한 말에 상처받아 죽어버린 영혼으로 살아가는 세계로 정의한다. 아이들에겐 ‘구슬’과 ‘거짓말’의 아름답고 즐거운 세계가 있지만, 어른들에게는 ‘지독한 발냄새’를 풍기고 상처받기 쉬운 소심함만이 남은 세계만이 있을 따름이다. 「낭만 사회와 그 적들」 연작에서도 유형진은 어른들의 세계를 ‘한패거리’, ‘이방인’, ‘파란별 장군’, ‘야근과 강장제의 세계’로 호명하면서 거부한다. 그녀는 이 불순한 어른들의 세계에 맞서 목하 ‘메리 포핀스 해상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장군’을 만날 때의 ‘처세술’에 대해서도 대비하고 있다. 말하자면 ‘분꽃 정원’도, ‘메리 포핀스 해상’도, ‘군인 아파트’도 유형진만의 자체 완결적인 표상공간이지만, 결코 안전하지 않다. 이방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전쟁 중이며, 가끔은 처세술이 필요하다. ‘랜드 하나리’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랜드 하나리’를 규정하는 ‘반복’은 어른들의 일상적 ‘루프’와 닮아 있다. 어른들의 불순함으로부터 분리된 표상공간은 이러한 반복에 의해 균열을 일으킨다. 방충망 위로 죽은 채 붙어 있는 ‘고추잠자리’(「랜드 하나리에서의 산책」)는 그 ‘균열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유형진의 표상공간은 쉽게 무너지거나 몰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단히 ‘다른’ 표상공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윤리, 유희, 표상공간에서의 활강

잠시 에둘러 가기로 한다. 허윤진은 이 시집의 해설(「레인보 몬스터」)에서 유형진 시에 대해 ‘애니메이션적 윤리학’이라는 가치부여를 하고 있다. 유형진이 어른들의 불순한 세계에 맞서 아이들의 순진한 세계를 지키려고 할 때, 특히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올드밤비’의 마지막 새끼 곰」과 같은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확실히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음직하다.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내 작은 지미니 크리켓에게」에서도 그녀는 ‘양심’에 대해 아주 순진한 어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윤리학’이라는 명명에 대해서는 유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라는 단어에 어떤 세계의 균질성이 가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레인보 몬스터」, 131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허윤진이 ‘애니메이션적’이라고 호명한 것은 유형진에게는 훨씬 유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적 윤리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유형진 시에 있다면 그것은 매우 미시적인 심급에서 작동을 하는 것이고, 최종심급에 있어서는 ‘윤리’보다는 ‘정동’과 관계있는 것이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허윤진이 유형진의 시를 연시로 파악했을 때,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유형진 시에서 표상공간들의 효용은 무엇일까. 혹은 그 반복의 필연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어지러운 몇 개의 안부」)라든지 “기다리면서 어린 나무는 늙어 가니까”(「어린 나무」)와 같은 노화에 대한 서글픈 고백, 「겨울밤은 투명하고 어떠한 물음표 문장도 없죠―이중국적자의 경우」에 나타난 참으로 애처로운 ‘당신 생각’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당신’의 부재와 ‘나’의 기다림이 ‘나’를 표상공간으로 침전하게 충동질한다. 어른 세계의 불순함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의제일 수 있지만, 유형진에게 그것은 오히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당신에 대한 원망이 사회적 공간 일반으로 전가된 형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오지 않고, 혹은 오늘도 ‘야근’이어서 ‘나’는 기다림의 시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모니터 킨트’(피터래빗 저격사건)답게 그녀는 미디어 표상공간으로 침전한다. “당신을 생각하면 네 개에서 세 개가 돼요”라든지 “당신을 생각하면 또 두 개에서 한 개가 돼요”(「겨울밤은 투명하고 어떠한 물음표 문장도 없죠」)와 같은 수수께끼들은 사랑의 ‘소모성’을 함축하기도 하지만, 묘하게도 미디어 기기의 배터리 상태에 대한 언급처럼 읽히기도 한다. 사랑의 소모성과 표상공간의 덧없음은 이렇게 은유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기다리다가 지칠 때까지, 혹은 표상공간이 미디어 기기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표상공간의 ‘표면’을 환유적으로 활강하기를 거듭한다. 「샤이니 샤이니 퀵, 퀵―유니콘의 경우」에서처럼 대상은 끝없이 포위망을 뚫고 미끄러지고, ‘내 심장’은 터져버릴 지경이어도 이 활강을 멈출 수 없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시단에 유난히 ‘차이에 대한 욕망’이 증폭되었다. 그것이 ‘미래파’로 명명된 새로운 흐름의 정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잠언의 방식으로 극대화되기도 했고, 하위문화적인 것과 접속하면서 첨예화되기도 했다. 그런 모든 흐름을 일언지하에 의미 없었다고 정리해버리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3, 4년 사이에 이 ‘차이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극히 ‘범용한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서정주風의 아나크로니즘은 말할 필요도 없고―최근에는 샤머니즘적인 아나크로니즘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김경주風의 잠언은 신인들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버렸다. 김행숙의 대화체도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렸다. 동화적 캐릭터들의 전유 역시 새로운 시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누구나가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이 범용한 것들의 리그로부터 벗어나 ‘차이화’하는 길은 오히려 사물의 ‘표면’에 머물면서 거기에서 끝없이 ‘노는[遊]’ 길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유형진의 표상공간에서의 유희야말로 이 범용화 시대의 돌파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파구라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 스스로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고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두 가지가 필요해진다. 표상공간의 반복이 ‘개념 있는’ 차이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반복을 견딜 수 있는 시인 자신의 ‘내구성’이 필요하다. 혹은 유형진에게는 복수의 표상공간을 넘나들면서, 사고된 것이 아닌 체험된 차이가 각인되는 ‘몸’이 ‘다시’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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