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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책 크리틱/육체에 각인된 삶의 비애/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이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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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육체에 각인된 삶의 비애/이종현
1. 피의 온도를 유지하려는 존재의 슬픔
슬픔은 육체에 각인된다. 한 사람의 육체에는 그 사람의 슬픔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체액, 주름과 흉터, 오줌과 똥을 지니고 있는 육체는 슬픔의 저장소다. 유홍준의 신작 시집 '저녁의 슬하'는 슬픔이 깃든 육체에 대한 집요한 기록이다. 시인의 눈에는 “미소는 얼룩”(「미소를 닦다」)으로 보이고, 연애는 “네 옆구리를 파먹는”(「옆구리」)행위로 보인다. “몸져누운 사람의 입술이 편지봉투 같다”(「입술의 죽음」)는 진술에서 읽히는 것은 육신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삶의 비애를 ‘기어코’ 끄집어내는 집요함이다. 한 편의 시를 읽어보자.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둥글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사람이 사람을 앉히고 발톱을 깎아준다면
정이 안 들 수가 없지
옳지 옳아 어느 나라에선
발톱을 내밀면 결혼을 허락하는 거라더군
그 사람이 죽으면 주머니 속에 발톱을 넣어 간직한다더군
평생 누구에게 발톱을
내밀어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단 한번도 발톱을 깎아주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
발톱을 예쁘게 깎아주는 사람은
목덜미가 가늘고
이마가 예쁘고 속눈썹이 같다더군 비가 오는 날이면
팔베개도 해주고 지짐도 부쳐주고 칼국수도 밀어준다더군
그러니 결혼을 안할 수가 있겠어
그러니 싸움을 할 수가 있겠어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
나는 그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를 좋아한다네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전문
인간은 반복을 거듭하며 소멸을 향해가는 존재다. 시간의 풍화에 닳아 없어진다는 운명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발톱은 깎아도 다시 자란다. 그것을 다시, 깎는다. 무수히 그 행위를 반복한다. 반복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대개 슬픔이 깃든 사연을 안고 있는 법이다. 문제는 ‘온도’다. 시가 포착한 슬픔이,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가우면 어떤 ‘거리’가 형성된다. 거기에는 일종의 과장법이 작용된다. 그렇다면 유홍준의 시가 지닌 온도는 어떠한가. 그의 시가 지닌 온도는 비릿하고 뜨끈한 ‘피’의 온도와 흡사하다. 혹은 침과 같은 ‘타액’의 온도. 소멸로 가는 동안 모든 생명 지닌 것들은 피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다른 생명체를 섭취하는가 하면, 더 많은 먹이를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관리’한다. 소멸이 눈앞에 왔을 때에도 끈질기게 밥을 먹는다. 인간은 피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는 동물이다. 그런 인간의 슬픔이란 어떤 것인가. 유홍준은 극도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배제하고 다만 인간을 덤덤하게 바라본다. 처절하고 건조한 시 한 편을 골랐다.
일흔네 살
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냈다
수술용 장갑을 낀 젊은 의사가 냉면그릇 같은 데 담아들
고 와서 보여주었다
마음이 참, 지랄 같았다
스텐그릇 안의
어머니의
계란, 자궁을 본다는 것
끼니때가 되어
어머니 뉘어놓고 길 건너 추어탕집에 가서 한 그릇 밀어
넣었다
요때기마다 자궁 들어낸 여자들이 누워 있는 방으로 돌
아와
등을 붙이면
따뜻하다 야근에
지쳐 녹아내리는 몸이여
문득 어디 생리중인 여자가 있어 울며 그녀와 살 섞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전문
누구나 열 달 가까이 머물렀던 아기집, 자궁. 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냈다. 자궁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암컷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지라도. 건조한 시선으로 화자는 어머니의 자궁을 계란에 비유하고, 묵묵히 밥을 먹는다. 병실에 돌아와 야근에 지친 몸을 기댄다. 그리고 생리 중인 여자와 살을 섞고 싶다고 말한다. 아프고 끈적거리는 삶은 그렇게 계속 이어질 것이다. 특별할 것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지리멸렬하고 그악스럽게 생존하니까. 그런데 슬픔은 이런 보편적인 삶에 내재되어 있다.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어도, 죽어가는 와중에도 인간은 뭔가를 먹는다, 피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먹는다’는 말에는 정겨움과 함께 인간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안고 있는 슬픔이 내포되어 있다. 먹어도 배는 또 꺼지고 다시 먹어야 되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되는 존재의 슬픔. ‘생활의 발견’ 이란 그 반복의 허무함과 필연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이리라. 유홍준의 시들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음식’과 ‘먹는 행위’는 ‘먹어야 사는 존재’들이 생활의 피로에 치이며 삶을 연명하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있어서 유효하게 활용된다.
옆구리가 전부다
물고기는
비늘 뒤덮인 옆구리로 살고 비늘 뒤덮인 옆구리로 죽는다
봐, 죽어서도 저렇게 제 옆구리를 먹인다
맞아, 아내 몰래 가끔 만나던 그 여자랑
생선구이집에 가서 노릇노릇 옆구리 익힌 거 뜯어먹으며
생각했었지
연애란 네 옆구리 파먹는 거
산다는 건 지금 누가 네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거
―「옆구리」 에서
흉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숟가락이다
삶이 내게 고통이라는 양식을 퍼먹일 때
나는 약 안 먹으려는 아이처럼 자지러졌고
발버둥을 쳤고
발악을 했다
어머니처럼 억지로
숟가락이 내 입을 벌리고 약을 먹일 때
이빨을 앙다물고 버텼던 그건
일곱 살 때의 이야기,
밥이 없고 눈물이 없고 숟가락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
―「숟가락은 말한다」 에서
2. 생활의 발견과 지리멸렬한 인간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언어는 때때로 냉소에 물들기 쉽다. 그악스러운 생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뜨거워도, 차갑게 식어도 삶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허무는 곧잘 냉소로 이어진다. 이질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그리며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언어들은 대개 냉소와 연루되어 있다. 속세의 고단함 안에서 이기심과 잔혹함은 마른버짐처럼 피어난다. 삶에 대한 염증을 토로하는 시들이 이를 대변한다. 고통은 치유되지 않고, 상처는 만성이 되며, 속세의 구조는 변하지 않을 때, 시는 점점 병리적인 언어로 변질된다. ‘육체’와 ‘먹는 것’에 대한 끈질긴 응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홍준의 시는 냉소와 체념, 환멸로 구축된 시들과 쉽게 섞이지 않는다. 비릿한 슬픔이 지배하는 현실과 인간의 동물성을 그리면서도 시인은 마지막까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세계가 실은 거대한 폐쇄병동에 가깝다는 인식은 많은 시인들이 공유하고 있다. 유홍준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홍준은 병동과 같은 세계에서 탈주를 꿈꾸거나 전복과 저항을 섣불리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세계의 풍경을 바라볼 따름이다. 연민으로 시작되는 동일시도 찾기 어렵다. 감정의 잉여나 결핍도 드러나지 않는 시가 대부분이다. 냉소와 외면도 아닌, 위악과 도피도 아닌 절제된 시인의 언어는 어디서 생성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한 시를 골랐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이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
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사람을 쬐다」 전문
많은 시가 생활을 발견하는데서 시작된다. 생활의 풍경은 삭막하고 잔혹하다. 간혹 따뜻한 순간들이 존재하겠지만. 인간은 번식을 통하여 그 지난한 삶을 이어간다,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지는데도. 번식의 과정에서 온갖 당위와 이해관계로 인하여 감정과 내면 또한 끊임없이 발명된다. 이 지긋지긋한 반복. 시인들의 위악와 몽환적인 언어는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유홍준이 응시하는 것은 ‘생활’이 아니라 그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어떤 기대나 희망도 없이 단지 바라보는 것. 상징과 실험이 교차하는 난삽한 기교를 배제한 채 생활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 이러한 응시는 무력하고 부질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활이라는, 지리멸렬한 인간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유홍준의 시는 시의 의무가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타락한 현실에서 꿈을 꾸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의 착한 통념을 정면으로 배반한다. 늙고 병들면 초라해지고, 끊임없는 살생으로 무언가를 섭취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인간. 그런 추악하고 모진 인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행위에서도 시는 빛을 발한다.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이므로. 폐쇄 병동에 갇힌 환자를 문병하는 일은 난감한 일이다. 불편한 행위와 이해할 수 없는 넋두리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유홍준의 시는 그 난감한 문병의 기록이다. 환자는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환멸로 구축된 세계에서 가끔씩 알 수 없는 언어를 내뱉고, 치유가 어려운 상처로 인하여 비명을 지르는 인간은, 문병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닌가. 시를 읽는 행위란 낫지 않을 상처에 대한 문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인의 언어를 통해 알게 된다. 부디 불편하더라도 내 삶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줘. 인간은 죽기 전에 모두 이런 비통한 언어를 한번쯤은 읊조리지 않는가. 유홍준은 이것을 되묻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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