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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독자시 감상/아름다운 여섯 번째 손가락-권민경, 귀여운 육손이/이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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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55회 작성일 11-12-3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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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시 감상/아름다운 여섯 번째 손가락-권민경, 귀여운 육손이/이세희
 
 
귀여운 육손이
권 민 경


귀부인의 부채처럼 활짝
필 때 아름다운 손
레이스처럼 펄럭이던
여분의 삶
6번째 손가락을 분리한 밤
열이 오르고 환상 속에서 두 손 모두 손가락이 6개인
아름다운 난쟁일 만나지
수줍은 듯 얼굴을 감싸는
12개의 별자리 12개의 귀여운 손가락
하늘이 커다란 오르골처럼 돌아가요
별들이 길을 따라 행진하네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
6번째 손가락이 잡음을 만들어내지
꿈은 조율되지 않네
오래되고 쓸모없는 것이 다정할 때
갓 먼지를 털어낸 보석함에
떼어낸 손가락 두 개를 고이 넣어두었어
어느날 내 방엔 조그만 발자국이 어지럽고
보석함은 뚜껑이 열린 채
오르골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네
없어진 건 6번째 손가락뿐
잠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고 머리맡을 더듬거렸어
내가 벗어놓은 이름은 어디 있나
어느 주머니 속에서 떨고 있나
아프고 귀여운 기형의 나날
―권민경, 「귀여운 육손이」, 창작과 비평, 2011.여름 전문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일종의 자기 보호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희망할수록 스스로 배반하게 되는 ‘내’가 많아진다. 눈에 거슬리는 가지를 쳐내듯 함께하기엔 불편한 ‘나’를 몰아내는 행위. 도대체 왜 그토록 부끄러워할까. 사람들은 곧잘 우열을 나눈다. 그런 뒤 우등한 것은 좋고 열등한 것은 나쁘다고 여긴다. ‘정상’의 범주를 따로 정해 놓고 그것을 넘거나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비정상’이라고 판단한 다음 배제한다. 내가 나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일만이 자기 갱신의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자부해 온 날들. 이렇듯 내가 나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온몸이 아릴 때가 많다.
   시를 습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미적인 상태가 닥쳐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쓰고자 애쓴다. 조금이라도 훼손이 되면 큰일 날 듯이. 그러나 과연 미적인 상태가 고정불변의 실체처럼 존재하는 것일까. 비유컨대 손가락 하나가 더 있든 손가락 하나가 모자라든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나무 몸통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곁가지를 잘라낸다고 해서 온전한 나무가 된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나무도 그것 스스로 아름답지 않은 나무는 없다. 울퉁불퉁하든 이파리들이 다 빠졌든 매순간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 중요한 것은 나무를 그 자체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것이다.
   이 시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직접 화자로 등장하는 “육손이”의 태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손가락을 “기형”이라고 여겼던 화자가 새로운 인식을 갖추게 된다는 점. 화자의 시선은 시의 끝에 다다라 “아프고 귀여운 기형”이라는 하나의 상으로 완성된다. 이는 더 나아가 ‘기형’과 ‘기형 아닌 것’을 나누는 행위에 대해 그 타당성을 암묵적으로 묻고 있다.
   제 손에 달라붙어 있는 “여분의” 손가락을 화자는 대놓고 경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부인의 부채처럼 활짝/필 때 아름다운 손”, “레이스처럼 펄럭이던/여분의 삶”이라고 지칭할 만큼 초과된 손가락(들)은 시 안에서 오히려 화려한 손을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것을 “분리”해 버린다. 화자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시 안에 따로 제시된 바가 없다. 다만 그 원인으로 “두 손 모두 손가락이 6개인/아름다운” “난쟁이”를 추측할 수 있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육손이”는 손가락을 절단한 뒤 “난쟁이”를 만났다. 따라서 표면상으로 보면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환상 속에서 만난 그 “난쟁이”가 화자 자신은 아닐까. 화자 앞에서 종종거리는 그의 모습 속엔 분명 “육손이”가 투영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만난 곳은 환상 세계라는 점.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6번째 손가락이 잡음을 만들어내지/꿈은 조율되지 않네”라는 시행에서, 시인은 시적 화자를 비롯한 모든 비정상적인 존재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통념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육손이”로 살았던 화자마저도 과잉 상태인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떳떳하게 여기진 못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6번째 손가락”이 “잡음을” 초래한다는 발상이 바로 그 증거다.
   이 시의 또 한 가지 특색은 비교적 간명한 서사 속에 사유의 반전이 녹아 있다는 점이다. “어느날 내 방엔 조그만 발자국이 어지럽고/보석함은 뚜껑이 열린 채/오르골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네/없어진 건 6번째 손가락뿐”이라는 시행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화자의 잘린 손가락은 “난쟁이”에게 도둑맞는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육손이”의 손가락에 의외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가 “6번째 손가락”을 훔쳐 가서 무엇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피아노를 연주했을 수도 있고, 지금도 끊임없이 손가락들을 모으러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잠을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고 머리맡을 더듬거렸어”라는 시행에서 단번에 알 수 있듯 화자는 모종의 불안을 체감한다. 제 손에 덤으로 달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웠던 “6번째 손가락”이 “난쟁이”에겐 소중한 보물이었다는 사실. 앞서 말한 자기 투영의 맥락에서 보면, 결국 손가락을 자른 것도 훔친 것도 모두 화자일 가능성이 높다. 상처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싶어 하는 여느 사람의 마음처럼. 화자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6번째 손가락”을 완전히 상실하고 난 뒤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벗어놓은 이름은 어디 있나/어느 주머니 속에서 떨고 있나/아프고 귀여운 기형의 나날”이라고 말이다.
   나를 베어낼 때마다 피치 못할 결핍이 찾아오곤 한다. 내가 잘라내 버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내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 나는 무심코 그들의 소식을 기다린다. 나로부터 빈번하게 발생하는 모든 차별과 폭력이 언젠가 멈추리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다만 꿈꾸는 일을 영원히 그만둘 수는 없다는 점. 한없이 희망하는 동시에 ‘나’를 멸시하거나 속박하진 말기를.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내’가 하나둘 돌아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언제나 불시에, 나의 몸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가지각색의 곁가지들. 그들이 가까스로 피워낸 꽃과 열매를 온몸에 매달고, 주렁주렁 빛 속을 뛰어다니는 ‘나’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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