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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권두평론/'응시'/지구적 보편주의를 향한/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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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미중심의 시선을 넘어서는 ‘세계’를 향해
‘지구적 세계문학the Global World Literature’이란 말이 인천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다. 지난 해에 이어 ‘제2회 인천 AALA문학 포럼’(4월 28~30일)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는데, 이 포럼에 초대받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은 주최측이 표방한 캐치프레이즈(평화를 위한 상상력의 연대)에 지대한 관심사를 보였다. 서로 다른 글쓰기의 환경에서 자신의 독특한 글쓰기를 해온 작가들은 모종의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암묵적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던 구미중심주의 세계문학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기존 자연스레 수용하여 자신도 모르는 새 내면화된 구미중심주의 세계문학의 이념과 그 구체적 실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오랫동안 우리가 익숙한 것처럼, 그래서 아예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문제를 제기할 필요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그것에 대해 그 어떠한 의심도 가져보지 않아 너무나 자명한 것처럼 간주한 ‘세계문학’이, 기실 ‘구미중심주의적 세계문학’이었다는 데 대해 인식을 함께 하였다.
이번 문학포럼의 집행위원장인 김재용 문학평론가는 “지구적 세계문학은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저희가 만든 말입니다. ‘인천 알라문학 포럼’이 전 지구적으로 작가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처음부터 우리가 표방했던 유럽중심주의적인 세계문학을 극복하고 지구적인 세계문학이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의를 힘주어 강조한다. 말하자면 ‘지구적 세계문학’은 아직 시민권을 확보한 용어는 아니되, 분명한 것은 그동안 자명한 것으로 인식된 ‘세계문학’을 에워싼 이념과 실재가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사무사思無邪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지구의 북반구, 그것도 유럽과 미국의 문학적 성취에 국한된 용어라는 사실이다. 물론 마지못해 (흔히들 노벨문학상이란 제도를 통해)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거둔 문학적 성취 중 극히 부분적인 것을 궁여지책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세계문학’의 틀 안에 가둬놓는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구미중심의 미의식을 치장하기 위해 들러리를 서는 정도라고 할까. 아니면, 구미중심의 미의식으로 모두 포괄할 수 없는 약간의 기이한 미의식을 다양성이란 미명 아래 구색맞추기 정도로 만족한다고 할까. 사실 여기에는 구미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박물학의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는 셈이다. 구미 제국은 자신의 건장한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세계 곳곳에 있는 희귀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제국의 시민들에게 전시의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제국의 시민들은 전시된 수집품을 보면서 문명적 혹은 인종적 우월감을 만끽한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저 미개하고 야만스런 세계를 계몽할 수 있는 근대적 주체라고 자기최면을 건다. 이제 제국의 시민들이 사는 세계가 ‘세계’이지, 박물관에 전시품을 제공해주고 있는 제국 바깥의 타자들이 있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다만 그 타자들이 제국의 시선에 의해 포착될 때만 비로소 ‘세계’를 구성한다.
2. ‘응시’의 권능: 비서구문학의 문학적 통찰
이번 ‘인천 알라문학 포럼’은 작년에 이어 기존 구미중심주의 세계문학이 지닌 크고 작은 문제점들을 좀 더 심도 있게 성찰하였다. 그 중 몇 가지 인상적인 풍경들이 있다. 아프리카 작가 누르딘 파라의 장편소설 <지도maps>(1986)를 갖고 심층적 대화를 나눴는데, 중요한 화두는 이른바 ‘응시gaze’의 미학이었다. 소말리아 태생의 작가는 자신의 고향이 겪고 있는 문제를 다루면서 주요한 작중 인물로 하여금 시종일관 주체를 포함한 대지에 살고 있는 뭇존재를 ‘응시’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 ‘응시’를 구미의 합리적 이성의 ‘시선see’과 착종해서는 곤란하다. 이 ‘응시’에 대해 작가는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함축한 직관”3)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존재를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나눠 인식의 유무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분별지分別智와 구분된다. 특히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명확한 구별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와 구분된다. 더욱이 계산가능성과 유용가능성의 합리적 준거틀을 갖고 세계를 파악하는 것과 구분된다. ‘응시’는 어떻게 보면, 서구가 발견하여 맹신하고 있는 합리적 이성의 문제틀과 전혀 다른 진리 탐구의 방법이자 태도이며, 그러한 차원에서 동시에 세계의 미를 탐구한다. 어쩌면 이러한 아프리카의 독특한 진리 탐구의 태도는 동아시아의 ‘존이구동尊異求同’과 유사할지 모른다. 즉,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인정하되 모두에게 이로운 공통의 것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서구의 합리적 이성의 분별지와 명확히 구별되는 진리 탐구의 태도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게 있다. 아프리카의 근대를 연구하는 무딤베Mudimbe는 아프리카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블라이든Blyden(1832∼1912)을 새롭게 주목하는바, 블라이든은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성의 인식론에 토대를 제공한 ‘동일하지만 불평등한 인종들identical but unequal races’이라는 일종의 인종사회학을 전복시켜 ‘독특하지만 평등한distinct but equal’이라는 탈근대적 인식론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독특하지만 평등한’이라는 관형어는 ‘존이구동’의 인식론 및 윤리학과 포개지는 면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응시’의 관점에서 누르딘 파라의 <지도>를 다음과 같이 읽어보았다.
여기서 이 ‘응시’의 권능이 아스카르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린 아스카르를 친엄마처럼 정성스레 키워준 미스라에게도 ‘응시’의 권능이 있다. 미스라는 마치 주술사처럼 죽은 짐승의 내장을 통해 타자들의 일을 ‘응시’하는가 하면, 아스카르의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응시’한다.
서구의 합리적 이성의 측면에서는 이 ‘응시’를 모종의 마법적 주술로 치환해버리기 십상이다. ‘응시’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이러한 판단을 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아스카르와 미스라의 ‘응시’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끊임없는 전쟁과 피난 그리고 이산의 역사”(29쪽)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지도>는 1977년 오가덴Ogaden 지역을 중심으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스카르와 미스라는 이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파편화된 육체의 이야기들!/파편화된 이야기의 육체들!/상심한 가슴과 상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들!”(305쪽)을 보고 들어온 터에, 그들의 ‘응시’는 전대미문의 참상과 비극을 견뎌내는 정치적·윤리적 항체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이 ‘응시’는 역사와 현실을 비껴난 신비의 영역에서 마법화된 주술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에 대한 핍진한 태도로 갈갈이 찢겨지고 흩어지고 소멸해간 뭇 존재들의 슬픔을 위무해주는, 아프리카 특유의 ‘리얼리즘적 주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도>의 주된 무대인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으로, 인도양과 홍해의 입구인 아덴만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지정학적 이유로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식민 통치 아래 서구의 이해관계(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따라 영토가 분할 점령당하였는가 하면, 1960년 소말리아공화국으로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군정파軍政派들의 심각한 대립 갈등으로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는 실정인데(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간섭), 아스카르와 미스라는 이 같은 역사적 정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응시’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응시’는 이 복잡한 현실을 분석적 태도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작게는 소말리아가 처한 현실, 넓게는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을 중층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해법을 서구의 일방통행식 합리적 이성(가령, 권력의 우열관계에 따라 합의한 각종 정치사회적 계약)에 의한 게 아닌, 아프리카가 지닌 문화와 역사에 기반한 ‘응시’를 통해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다.4)
그러고 보니, 지난 해 영화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감독)가 절찬리에 상연되었는데, 그 영화에서 나비족 여전사는 자신의 종족을 찾아온 지구인 아바타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말을 내뱉는다. 그 말은 “I SEE”이다. “나는 안다” 혹은 “나는 이해한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이 말이 소통의 진정성을 염두에 둔 귀중한 전언으로 부각되지만, 이 역시 엄밀히 따져보면, 여기서 소통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조화를 이뤘을 때 가능한 것이지, 조금이라도 이해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소통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내가 알고,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모르고,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분별지’를 말한다. 즉 여기에는 ‘합리적 앎’이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숱한 비극적 참사를 잘 알고 있다. 히틀러에 의해 발가벗겨진 알몸으로 가스실에 들어간 채 대량학살 당한 죽음, 독재자를 개인 우상숭배하는 가운데 숙청당한 죽음, 냉전시대의 정치적 이념의 대립 갈등으로 희생당한 숱한 죽음, 근대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다지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의 과잉으로 저질러진 무고한 양민들의 죽음, 종교적 · 인종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배타적 관계에 의해 벼랑 끝에 내몰린 죽음, 자원을 쟁취하기 위해 선진국들이 억지로 분쟁을 조장하는 가운데 스러져간 숱한 죽음, 문명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비서구를 향한 죽음……. 그것을 아는가. 지구상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죽음들은 모두 ‘합리적 앎’이란 외피를 두르고 있다. ‘합리적 앎’이란 탈을 쓴 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어야 했는가. ‘합리적 앎’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들은 몽땅 제거되어야 할 악惡과 다를 바 없었다.
아프리카의 작가 누르딘 파라는 우리에게 소중한 전언을 들려준다. 이 세계를 ‘알려고’하는 것보다 그윽이 ‘응시’하는 게 훨씬 값지다고. 그래서 서로 다른 존재들의 가치를 넓고 깊게 포괄할 수 있는 힘을 가지라고, 그 힘은 평화를 일궈내는 자양분이니, 어쩌면 그것이 ‘응시’의 권능을 갖는 것일지 모를 일이다.
3. 구미중심적 세계에 대한 전복: 혁명가와 혁명적 시
이렇게 아프리카의 작가 누르딘 파라로부터 얻은 성찰은 문득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눈을 떠올린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고 일갈하던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정부군에게 잡히던 순간 배낭 속에 지도와 비망록 그리고 녹색의 표지인 노트 한 권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 그 노트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그 노트에는 시 69편이 적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좋아한 네 명의 라틴아메리카 시인들(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흐,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뻬)의 시가 있었다.5) 혁명가 체 게바라는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도 이들 라틴아메리카의 빼어난 시인들의 시를 녹색 노트에 옮겨 적었던 것이다. 그는 시를 옮겨 적으면서, 아마도 ‘응시’하고 있었을 터이다. 가령,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네루다가 쓴 시의 다음과 같은 부분을 한 자 한 자 베껴 쓰면서, 그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라우타로는/파도에서 파도로 공격했다/아라우카의 그림자를 채찍질했다/그전에 붉은 민중의 가슴에/카스티야의 칼이 꽂혔다/돌과 돌 사이, 여울과 여울 사이,/바위 아래 매복해서/물메꽃들을 바라보며/오늘, 숲속 구석구석 게릴라들이 심겨져 있다/발디비아는 돌아가고 싶었다/하지만 늦었다/라우타로가 번개의 옷을 입고 도착했기 때문이다/슬픔의 정복은 계속됐다/남극 황혼의 축축한 잡초에 길이 열렸으며/말들의 검은 질주로 라우타로는 도착했다//(중략)//스페인 장수들은/피, 밤. 비에 취해 비틀비틀 퇴각하고 있었다/라우타로의 화살들은 쿵쿵 뛰는 맥박을 가졌었다/스페인 군사령부는 피를 흘리며 후퇴를 했다/라우타로의 가슴은 쿵쿵 연주를 하고 있었다
―네루다의 「센타우로에 대항하는 라우타로」 부분6)
나무에게도 당신 그림자 같은 그림자는 없지요/그 위에 대륙의 살아 있는 불덩이가/그 그림자를 향해 달리죠/사지가 잘려진 상처, 몰살돼버린 마을,/모든 것들은 다시금 당신이 그림자로 태어나죠/당신은 고통의 경계에서 희망을 쌓지요//신부님, 당신의 존재는 그들에겐 행운이었요/플랜테이션 농장에서/죄악의 검은 곡식들을 씹으며/분노의 잔을 매일 마신 것/누가 발가벗고 당신을/분노의 이빨 사이로 밀어 넣었나요?/당신이 탄생하였을 때/칼을 든 다른 눈들이 어떻게 들여다보던가요?
―네루다의 「프라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부분7)
체 게바라는 네루다의 시를 ‘응시’하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성과 현재의 자화상을 겹쳐 놓았을 것이다. 스페인의 군대가 신대륙을 경영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반인간적 야수와 같은 행위들이 만연했는지 모른다. 스페인의 군대는 자신들만이 문명이며,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미개이고, 그래서 그들을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않았다. 숱한 인디오들이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반인간적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반문명적 행위를 직접 보고 들은 라스카사스 신부는 스페인 군대의 야수와 같은 만행을 고발한다. 시인 네루다는 바로 이러한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성과 연루된 라스카사스 신부를 노래했고, 그 시를 혁명가 체 게바라는 그의 녹색 노트에 옮겨적었다.
그렇다면 라스카사스 신부가 직접 목도한 스페인 군대의 반인간적 행위는 어떠했을까. 라스카사스 신부가 사실적으로 기록한 <인디아의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1542)의 한 대목을 보자.
그때 그들이 왔다! 인디오들은 그들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로 여겼다. ……하지만 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남녀 상관 않고 귀, 손, 코를 잘랐다. 단지 재미로 그랬던 것이다. 그 후 난 그들이 어떻게 쉽게 인디오들을 잡아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들은 추장들을 소집해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막상 그들이 평화롭게 찾아오면 잡아다가 불로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또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먹이들을 떼내, 공처럼 발로 차고 바윗덩어리에다 머리를 박아버렸다. ……그들은 긴 교수대를 만들곤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발가락 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목을 매달았다. 그러고선 열두 제자와 예수의 영광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한꺼번에 13명의 인디오들을 매달아 산 채로 태워 죽였다.8)
이 외에도 스페인 군대가 인디오를 대상으로 자행한 광기의 살상 행위는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9) ‘라스카사스-네루다-체 게바라’는 언어절言語絶의 아픔을 겪었으리라. 아니, 너무 아파 아픔의 감각도 마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졌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스페인 군대는―엄밀히 말해, 스페인 군대를 원격조종하는 유럽중심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인간 이하의 하등 존재로 간주하여 무참히 짐승처럼 죽여야만 했는가. 대관절 유럽인이 믿는 신이 이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만유존재萬有存在를 향한 하염없는 사랑을 베푸는 신이 어찌하여 유럽을 제외한 곳에 살고 있는 존재에게는 이토록 불평등한 공포의 실체로 다가온단 말인가.10) 때문에 ‘라스카사스-네루다-체 게바라’는 분노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네루다와 체 게바라는 그들의 대지가 유럽인에 의해 유린된 역사를 ‘응시’하였다. 그래서일까. 체 게바라는 네루다의 「센타우로에 대항하는 라우타로」의 시를 베껴쓰면서, 라틴아메리카 역사 속 영웅 라우타로를 재발견한다. 체 게바라는 인디오 마푸체족의 영웅인 라우타로가 한때 스페인 장수의 심복이었으나 도망쳐 오히려 스페인 군대의 작전을 역이용하여 스페인 군대를 대패시킨 것을 노래한 네루다의 시를 주목한다. 그리하여 체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수행하고 있는 그의 혁명이 마치 라우타로에 의해 스페인 정복 군대가 섬멸된 것처럼 구미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의 승리를 염원한다.
4. ‘구미적 보편주의’에서 ‘지구적 보편주의’로
이 ‘응시’는 망각을 강요하는 일체에 대한 것과의 투쟁이다. 그러면서 이후 도래할 세계를 내다보도록 하는 희망이다. 이번 ‘인천 알라문학 포럼’에서 작가들은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었다. 각자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모순에 대해, 그 모순의 복판에 직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서로 공유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무하고 더 나아가 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언어를 모색하는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 중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작가로 정평이 난 루이사 발렌수엘라는 “글을 쓴다는 것은, 금지된 앎으로 우리를 더욱 더 깊이 인도하는 기묘한 여행”11)이라고 하는가 하면, 멕시코 태생인 젊은 여성 작가 레이나 그란데는 “글쓰는 일이 내게 생존의 길을 제시해주었다”12)는 진솔한 자기고백을 통해 ‘응시’의 미학을 나름대로 구현하고 있다. 때마침 발레수엘라의 작품들이 묶인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소명출판, 2011)가 번역되면서 그의 글쓰기 매력을 만끽할 수 있어 다행이다. 발렌수엘라의 언어는 중층적으로 뒤엉킨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탐구해내고 있다. 간혹 보이는 몽환적 언어와 작품 전체에 짙게 드리우고 있는 메타포의 언어들은 작가가 그의 조국의 현실을 왜 이렇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되묻도록 한다. 마치 아르헨티나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몇 겹으로 에워싸인 금기의 베일을 벗겨내야 하듯, 발렌수엘라는 우리에게 낯익은 구미중심주의의 문학에 대한 글읽기 전반을 뒤흔든다.
그러고보니, 이번 ‘인천 알라문학 포럼’을 계기로 라틴아메리카 문학과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은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역시 오랜 세월 구미 제국의 식민 상태였고, 식민을 벗어났으되, 근대 국민국가의 건국 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내부의 갈등과 분쟁으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으며, 무엇보다 여전히 그들의 내정에 지속적 간섭을 하는 구미 제국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길은 험난하다. 어떻게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상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더욱 더 이들 세 대륙 지역의 작가들에게 ‘평화적 상상력을 위한 연대’는 절실하다. 이번 ‘인천 알라문학 포럼’을 통해 작가들은 확인하였다. 그리고 한갓 신기루가 아니라, 이러한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움직임들이 언젠가 반드시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현실적 꿈을 한국문학과 함께 꾸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특정 국가, 특정 지역, 특정 언어가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특정한 삶의 패턴만을 강요하는 것은 보편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구미적 보편주의가 세계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후 이것을 보란 듯이 넘어서는 이른바 지구적 보편주의가 세계문학의 진정한 이념적 지반을 정초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언젠가 ‘지구적 세계문학’의 참된 가치를 전 세계인들이 자연스레 내면화할 날이 올 것이다. 이제 ‘인천 알라문학 포럼’은 문학의 자족성을 넘어 세계의 문명 감각의 전환을 위한 첫 삽을 뜬 것이다. 아직도 해묵은 냉전의 대립이 팽팽한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세계 문명의 낡은 감각을 전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지구적 혁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혁명의 불길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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