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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특집/한국시 왜 감동이 없는가/시적 감동을 위한 고군분투의 기록/손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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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동 없는 시의 창궐
요즘 시에 감동이 없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이해할 수 없고 메시지를 찾을 수 없는 시편들, 파편화된 이미저리의 나열, 흐트러진 리듬, 배경 지식 없이는 따라갈 수 없는 고유명의 연쇄 등 최근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들은, 시의 감동은 차치하고서라도 읽기마저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을 불러오고 있다. 흔히 이와 같은 시를 쓰는 시인들만을 따로 묶어 ‘미래파’(권혁웅), ‘뉴웨이브’(신형철), ‘감정의 동료들’(김수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와 같은 비평적 수사에 덧씌워진 시인들의 시편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기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과 지적은 단지 ‘미래파스러운’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서정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시라고 해서, 혹은 현실비판적인 시라고 해서 감동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적 실험의 유무, 현실과의 접점 관계에 대한 고민 여부는 시적 감동의 주관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필수적인 공식이 아니다.
사실, ‘감동 없는 시’라는 지적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한 편의 시가 누군가에게는 감동적인 시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저 넘겨야 할 시집의 한 페이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시는 일반적으로 ‘독백’이라는 제시형식을 취하고 있어 주관성을 그 속성으로 간직한다. 그러므로 시적 감동은 보편적으로 증명 가능한 가시적인 효용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감동의 유무를 통한 시적 가치의 평가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시편들에 ‘감동이 없다’라는 평가가 지속적으로 제기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독자들의 무뎌진 감성만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시의 한 결여의 지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시적 감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할 것이다.
2.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
김준오에 따르면, 시적 감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이 그것이다. 먼저, 서정적 감동이란 자아와 세계의 분리가 없는 조화의 감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시적 화자가 ‘있어야 하는’ 당위적 상태를 욕망하지 않는 감동이다. 김준오는 이를 시의 본질적인 감동이라 말한다. 반대로 파토스적 감동은 자아와 세계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이를 타개하려는 데서 발생하는 감동이다. 시적 화자가 ‘있음’과 ‘있어야 함’의 분리에 대해 적대 감정을 가지고 반응하는 태도가 곧 파토스를 생산한다는 것이다.1)
그런데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은 공히 어떤 전제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즉 자아와 세계의 조화 내지 적대의 정동은 자아와 세계라는 이분적 구조를 선취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자아가 세계와 어떻게 교섭하고 대응하는가에 따라서 나뉘는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의 두 축은, 단일하고 고유하며 분할 불가능한 양태로서의 ‘자아’와,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자아와 교섭하는 불변성의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적인 근대적 자아가 포스트모던 이후 하나의 환상이자 폐기처분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최근의 존재론적 사유의 방향을 좇아가 본다면, 자아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어떤 고유성과 유일성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론적 기반이 아니라, 외부와 끊임없이 길항하고 교섭하는 구성적 자아, 나아가 해체적 자아이다. 또한 자아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자명하게 주어진 현실적 실태들의 집합으로서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고 재구성되는 가변성을 특질로 갖는다. 따라서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 그 스펙트럼은 자아의 확실성과 세계의 불변성이 전제될 때만 성립하는, 감동의 특수한 양식으로 사유될 수 있을 뿐이다.
3. 난해시의 소통 방식과 새로운 감동
그렇다면, ‘감동이 없다’고 평가 받는 최근의 미래파를 비롯한 난해시들은 자아와 세계의 이분법적 전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돌출되는 또 다른 정서적 체험과 감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서정적 감동도 파토스적 감동도 아니지만, 파편화 된 시적 자아와 가변적인 세계와의 교섭 과정을 드러내는, 반성적이고 반자동적인 어떤 감동. 자동화된 지각의 영역 바깥에 있기에 아직 언어화되지 못했을 뿐, 거기에는 기존과는 다른 양태를 지닌 감동의 체험적 질서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 이루었노라, 최후의 누군가는 말하였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채 죽어가며.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술에 취한 몇몇 사내들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진정을 모두 바쳤으나 이제는 국물도 없구나!’ 코앞에 닥친 내일의 부활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이보게들, 사람이 거대한 볼테르식 안락의자 같은 것을 만들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네 우리가 그 위에 죽은 듯이 나자빠져서 벌 받은 자매들처럼 밤새도록 끌어안고 울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중략)//보라! 나는 한 번도 신에게 빚을 진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그의 발아래 무릎 꿇은 적 없으니…… 불행이여, 차라리 내 샅을 물어다오!// 소란 속에서, 누군가는 졸았다 <역겹게도> 짧은 꿈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는 거기에 답하기까지 하였다 ……여보, 여보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소, 나는 나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것에 동의했소…… 우리가 한 줌의 재가 되는 데 동의했고 잿빛 새벽에, 우리가 바람 속에서 흩어지는 데 동의했소…… 여보, 여보 나는 이자들을 모르오! 모르는 자들이오, 우리는 다만 갈 곳을 잃었을 뿐,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변명하는 거지?
―「카덴차에 이은 긴 트릴」2) 부분
미래파의 대표적 주자로 칭해지는 황병승은 자신의 시편들에 독백을 지속하는 단일하고 고유한 ‘자아’로서의 시적 화자를 기입하지 않는다. 이 시의 1연에서의 독백화자와 2연의 독백화자, 그리고 그 이후의 연과 문장들에 제시된 화자는 같은 화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적 화자의 일관적 진술에 의한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기보다는 각 문장, 연들에 나타나는 각각의 주체들의 정념과 욕망을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한 편의 시는 혼합화자의 혼합된 발화들의 중첩으로 나타나며, 그의 시에 나타나는 세계 또는 대상 역시 일관된 미적 거리를 가지지 않게 된다. 그의 시는 혼란스러운 자아(들),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세계(들)를 나열하고 그 간격들을 벌려 놓음으로써, 메시지의 단일한 형태의 수렴 가능성을 최대한 지연시킨다. 대신 파편화된 이미지들 속에서 언뜻 언뜻 발견할 수 있는 시의 단서들을 배치해놓고 이들을 스스로 재구성, 찾아내기를 종용한다. 각 문장이나 구절, 단어들에서 돌올하는, 해석의 어지러운 유혹들로부터 신산스럽게 벗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시가 ‘예술가의 신경증적 상황, 아이러니적 정황’3)에 관한 진술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황병승의 시는 마치 퍼즐 조각 맞추기 게임처럼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재조립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퍼즐을 만드는 과정이다. 하지만 완성된 퍼즐은 특정한 주제로 수렴될 필요가 없는, 퍼즐 조립자(독자)들이 자의적으로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시적 화자가 대상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즉물적이고 현재적인 감성적 결들을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시적 의미와 효과를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적인 재미를 느끼는 방식을 그의 시는 채택하고 있다.
고정된 단일 화자와 불변하는 세계가 아닌, 파편화된 자아의 유동하는 세계를 그리는 시편들은 자아의 능동적 의지를 강조하여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시도하기보다는 복수의 자아들에 의해 잠재성의 장에 놓인 시적 의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자 의도한다. 기실, 최근의 난해시, 미래파라 불리는 일련의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시편이 보여주는 유희적 경향은 이처럼 시의 의미가 독자의 참여 속에서 능동적으로 재구성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 다시 말해, 시적 화자는 일련의 놀이 규칙만을 제안할 뿐, 규칙 그 자체를 수렴해야 할 메시지로 청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청자는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시적 의미를 재구성함으로써 온전히 독자적이고 단일한 ‘나’의 시를 갖는다. 때문에 시 해석의 오류 여부나 우위 여부는 이들의 시가 지니는 수용론적 측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최근의 난해시들은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 감동의 영역 바깥에서 또 다른 감동을 예비하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작업은 시를 통해, 독자 스스로가 재구축하는 자신의 욕망과 메시지를 들으라고 충고한다. 그것은 민주적인 소통 양식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미학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들의 소통 경향은 되레 아무 것도 전달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난해시는 되레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시의 ‘독재’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은 그들 시의 소통 방식, 시의 미학에 대해 긴 설명이 필요한 ‘계몽’적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미래파 시의 미학을 설명하는 비평가들은 이 계몽적 역할을 암암리에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시적 소통 방식을 깨고, 독자의 능동적 읽기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보편적인 메시지 전달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그들 시편이 지니는 과제일 것이다.
4. 감동과 공감의 서정
감동은 논리적 전개나 설명에 앞서서, 즉물적이고 현재적인 감성적 결들에 의해서 먼저 감각된다. 시읽기의 방법과 태도를 선취해야 하는 시읽기는 그만큼 감동이 덜하거나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감동적인 시 한 편은 공감의 영역과 궤를 같이 하면서 널리 확산된다. 공감은 논리에 앞서 온몸에 육박하는, 언어에 앞서 신체에 기입되어 전이되는 미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미적 구조로 형상화 되는 서정의 양식은 여전히 서정적 감동과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적인 미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비록 동일성을 전제하는 인간주의적인 서정이 존재의 보편적 평등을 지향하는 인식론적 태도로부터 인간 우위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의 서정적 태도가 제시하는 시편들은 인간에 의해 쓰여지고, 인간에게 읽혀진다는 점에서 시적 감동과 공감의 폭을 확장할 수 있다.
뼈단지,/도토리처럼 들고 가/나무 아래 숨겼네//이태 지나/절집 숲길에서 마주쳤네//갈참나무 뒤/도토리 안은 예쁜 아버지//죽어서도 열심히 식량을 모으시네
―「수목장樹木葬」 전문4)
박지웅의 짧은 위 시는 최근 시편들이 제시하는 산문화 ․ 장시화 경향이나 환유를 수사의 축으로 가동하면서 이미지의 연쇄를 형상화하는 양상과는 달리, 기존의 서정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최근의 난해시들이 기존의 서정에 대한 안티테제, 나아가 기존 서정이 보여주지 못한 미학적 실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삼으려 할 때, 시인은 되레 그와 같은 ‘패션’화로부터 서정의 서정성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존재의 자기 증명을 확인하고자 한다.
위 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서사를 포함하면서도, 이를 서정적 화자의 여운이 짙은 어조로 발화하도록 함으로써 서정의 서정성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과거-현재, 죽음-삶, 아버지-아들의 이분법적 관념들을 무너뜨리고 이를 연속적이고 가역적인 관계의 장이 되게 함으로써, 소박하고 낯익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은 시적 의미를 서정적 감동으로 전달한다. 진부하다고 가정되는 기존의 서정은 낡은 양식으로 사라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되레 서정적인 것이라는 가정에 충실한 시편을 제시함으로써,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고착화된 새로움으로부터, 진부한 새로움들로부터, 역설적인 신선함을 불어넣는 효과를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시는 알려준다. 그것은 시적 형식의 새로움과 파격에 의해 감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의미와 정동이 얼마나 공감 가능한 정서적 요인에 기반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확인시킨다.
그런데 문학적인 ‘공감’은 흔히, 리얼리스트들이 주목하던 문학이 줄 수 있는 독자에 대한 효과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있어야 할 현실’에 대한 공감, 그것은 문학을 단순히 지면紙面 안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파토스적 감동에 의해 실천과 행동을 이끌게 되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바퀴벌레는 내 오랜 동거인/퇴근하고 들어오면/반가워 푸다닥이던 너//나 역시 밖에선 바퀴벌레였지/등이 거멓게 탄 채로 일용잡부/불볕 공사 현장으로 떠돌았지/깊은 지하에 토굴을 뚫고/지하철을 놓기도 했지//궁지에 몰려 달려들면/구둣발이나/곤봉이 날아오기도 했지/에프킬라보다 독한/최루가스를 품어 대기도 했지//그런 우리가 흉측하고/무섭다고//그렇지. 모든 동거인은 무섭지/왜,/같이 살아야 하니까
―「동거인」 전문5)
그러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은 그 당파성을 내세우며 미학적 충동을 압박함으로써, 자연히 ‘있어야 할 현실’에 대한 파토스적 감동을 제공하지 못하고 주장과 논리가 앞서는 패착을 종종 보여왔다. 최근, 리얼리즘 문학의 한 가능성을 목도하게 하는 송경동의 위 시는 “일용잡부”로 표상되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바퀴벌레”와 동일시하는 전략을 통해 그들의 비참하고도 고달픈 생활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있어야 할 현실’과 대립하거나, ‘있어야 할 현실’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는 “바퀴벌레”-“나”, “일용잡부”-‘고용주’의 우열 관계를 알레고리로 배치하고 열등한 것(“바퀴벌레”, “일용잡부”)에 가해지는 폭력(“구둣발이나 곤봉”)과 배제(“흉측하고 무섭다”)의 양상을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완강한 계급 질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만 읽게 되면, 이 시에서 “나”의 애매한 위치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바퀴벌레”에게는 우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일용잡부”라는 점에서는 ‘고용주’에게 “바퀴벌레”와 같은 열등한 주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위 주체와 열등한 주체는 절대적인 구조가 아니라 상대적인 우열관계이다. 문제는 우위 주체가 열등한 주체에게 가하는 폭력과 배제는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열등한 주체에게 가하는 악순환적 구조를 생산한다는 데 있다. “같이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체(우위 주체)가 타자(열등한 주체)를 배제하고 제거하려 하는 모순은 대상만 달리할 뿐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우열 구조)과 있어야 할 현실(같이 살기)은 “그렇지. 모든 동거인은 무섭지/왜,/같이 살아야 하니까”라는 마지막 구절에 의해 ‘우열 구조’가 아니라 ‘같이 살기’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임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위 시는 ‘같이 살기’가 우열 구조를 지탱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토대임을 전제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같이 살기’는 또 다른 우열 관계를 반복 재생산하는 구조까지도 만들어 낸다. ‘같이 살기’는 타자와의 관계를 의식해야 하는데, 타자는 언제든 나를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대상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동거인”인 한, 주체는 타자를 배척해야 하고, 제거하려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살기’는 또한 있어야 할 현실이기도 하다. ‘우위 주체’만이 반드시 타자를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등한 주체’ 역시 ‘우위 주체’의 잠정적인 위협 요소를 자처함으로써 ‘우위 주체’의 ‘두려움’보다 ‘우위’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이 살기’는 타자의 타자성을 승인하지 않는 어떤 힘들의 충돌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그 충돌을 넘어서야 하는 당위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주체의 대척점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당위적 현실이 뒤얽히고 있는 이 시의 양상은 관계의 우열 구조를 만들어내는 더욱 근본적인 주체-타자의 관계와 그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매우 쉬운 방식으로 ‘타자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는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자명하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확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통해 봉합의 서사로 나아가려는 욕망들을 무너뜨리기를 시인은 시도하고 있다. 송경동은 ‘있어야 할 현실’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 그 자명성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하여 ‘있는 그대로’ 불편한 현실을 들여다보도록 종용함으로써 새로운 미학적 충격을 가하고 있다.
이는 리얼리즘 이후의 리얼리즘, 송경동의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파토스적 감동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리얼리즘 미학의 충동인,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되레 기존의 보수적인 시적 형식의 틀에서만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현실과의 접점을 사유하는 리얼리스트들의 문학적 성과가 형식 미학적 전복과 함께 이루어질 때, 공감의 폭은 확장될 것이다.
5. 고군분투의 시쓰기
엘리어트는 일찍이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시적 감동 역시 오류로서의 감동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감동은 자발적인 감정이다. 또한 본능에 가깝게 감각되는 미적 충격이기도 하다. 그만큼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것이 감동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혹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감동의 폭과 깊이는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모든 작품들이 감동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시적 감동이 허위가 없는 글쓰기, 형식과 내용의 의심 없는 일치가 전제된 미학적 형상화일 때에야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능동적인 소통 형식을 고민하는 난해시의 방법적 모색이나 서정의 양식적 틀을 고수하면서도 공감의 폭을 확장하려는 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할 현실의 경계를 사유하는 리얼리스트들의 노력은 모두 미학적 감동으로 충격되는 어떤 찰나의 실마리를 자신의 시에서 발견하기를 바라는 진정성의 소산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시읽기의 나태함을 스스로 꾸짖으면서, 시쓰기에서 제 존재의 행보를 확인하려는 시인들의 걸음 하나하나를 꼼꼼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때로 시읽기의 괴로움을 뒤따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편들조차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언어의 감옥 속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기 위한, 보지 않았고 볼 수 없었던 그 무엇과의 조우를 위한 미적 충동이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시는 소통가능한 미학적 통로이자 고군분투의 기록으로서 계속 쓰여지고 있으며, 그 중 어떤 시는 시읽기의 괴로움을 떨쳐버릴만큼의 감동과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진정성을 가지고 백지의 공포와 맞붙어 싸우는 시인들의 태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적인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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