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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특집/한국시 왜 감동이 없는가/현대시 도둑맞은 감동을 찾아서/손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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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42회 작성일 12-03-14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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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명

비평가이기 전에 한 독자로서, “현대시, 왜 감동이 없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두 가지 난점에 부딪쳤다. 우선, 명제 안에 이미 현대시는 반드시 감동을 필요로 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는데, 감동이란 워낙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기에 감동을 정의내리거나 범주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독자의 지적 수준과 과거 경험, 취향에 따라, 혹은 작품의 성격과 사회·역사적 배경에 따라, 하다못해 작품을 접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미세한 정황 하나까지도 대개는 ‘감동’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둘째, 감동의 문학적 정의는 차치하고라도, 현대시 전체를 ‘감동이 없다’라고 단언하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특정 시의 한 부류만을 집어내어 무감동하다고 비판하는 것도 어불성설처럼 여겨져서 사실상 주제에 접근하기가 조심스럽다. 혹자는 난해시, 관념시를 읽고서 지적인 쾌락을 동반한 진한 감동을 받기도 할 것이며, 혹자는 이념이 강한 시를 읽고 경도되거나 그에 선동되기도 하겠거니와, 혹자는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이별시를 읽고 정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긴 여운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는 노릇이다. 더러는 잔혹하고 기괴한 시를 읽고, 더러는 해체시나 민중시를 읽고 그에 마음이 동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러이러한 시는 감동이 없다라고 감히 단언할 수 없었다. 물론 신파라든지, 대중에 영합한 상업문학에 있어 감동의 문제를 다룬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문학적 감동’, 그 중에서도 ‘시적 감동’을 정의내릴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속하기도 하거니와, 감동의 범주와 메커니즘 자체는 더욱더 주관적, 정서적 차원의 것이므로, 그 다양성과 차이를 무시한 채, 섣불리 현대시 전체를 감동이 없다라고 진단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자, 위험한 진단이 아닐까. 이상은 아직 공부가 부족한 필자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2. 감동感動, 이전

그렇다면 일단 감동이 있기 이전에 ‘독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현대시를 읽는 수효는 얼마나 될까. 시 뿐만 아니라, 문학 서적의 경우 수요보다는 공급이, 독자보다는 작가가 많은 게 요즘의 현실이다. 인터넷의 보편화와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어 출시되는 최첨단 디지털 기기들로 인해 ‘읽는 행위’ 못지않게 ‘쓰는 행위’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꼭 신춘문예라든가, 문예지 신인상과 같은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네티즌 독자와 직접 실시간적으로 소통하는 작가들이 많다. 게다가 또 시집은 해마다 얼마나 많이 출간되는가. 2011년 1월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현재까지, 판매량 1위의 모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신간 시집은 무려 1300여 권에 달한다. 문학 계간지와 시전문 잡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문학을 업으로 하는 필자 역시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신간 시집과 잡지에 발표된 시 전체를 일일이 다 찾아 읽지는 못한다. 시집을 사보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자비 출판, 인터넷 출판, 미디어의 발달로 시인들과 발표된 시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 것이다. 반면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가 보편화된 21세기 최첨단의 시대에, 전철 안에서 책을 읽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더욱이 버스나 전철 안에서 시집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집을 적어도 구매하여 읽는 독자층이라면, 아마도 그들은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학생이거나,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 창작 강좌의 수강생이거나 하는 이른 바 ‘시인 지망생’일 것이다. 교재로서의 시집, 그나마 창비나 문지와 같은 메이저급 출판사의 시집이 아니고서는 그나마도 팔리지 않는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원래도 드물었지만, 1980년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라든가, 1990년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끝으로 더 이상 밀리언셀러 시집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 자체를 읽지 않는데, 감동이라니, 감동感動은 적어도 독서행위 동시에 혹은 그 이후에 파동波動처럼 일어나는 독자의 강렬한 반응 아니었던가.


3. 비평가와 감동

이제 범위를 좁혀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 제도권 문학의 자장 안에서 현대시단과 시비평계를 둘러보자. 과거나 지금이나, 뭇 비평가들이 주목하고 선호하는 시인들은 늘 한정되어 있다. 그 비평가라 함은 대부분, 국문학 박사급 이상의 학력소지자로 그들은 대학 교수와 문예지 편집 위원 등을 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더 유능한 소수는 시비평과 시창작을 겸하기도 한다. 주로 비평가로서의 그들은 새로운 담론을 생산, 유포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시를 과거 어느 때와 구분하여 편리하게 구획 짓거나(보통은 십년 단위), 유형화하여, “∼∼파”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논쟁”으로 문단의 이슈와 담론을 재생산해 내기도 한다. 유행을 창조, 선점하는 유능한 소수를 제외 하고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서로 본의 아니게 커닝에 가까운 참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거론되는 시인도 그렇거니와 작품들 역시 비슷한 구절들이 문예지 이곳 저곳에 동일하게 인용되곤 한다. 그들은 또한 방법론을 공부, 공유하기에도 바쁘다. 서양의 철학,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정신분석학을 섭렵하는 것은 텍스트를 찾아 읽는 것에 기본적으로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김선우 시인이 ‘시인이 평론가에게’라는 소제목으로 게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은 오늘의 시 비평가들이 대부분 “자기를 내보이려는 욕망이 너무 승해서 (‘자기표현’의 욕망이라기보다는 평론가로서의 ‘위치검증’의 욕망이라고 할), 비평적 논쟁거리의 선점욕망이나 자신이 공부한 바의 지적내용물들의 투사와 검증 대상으로 작품을 호출해, 줄 세우고 일회성으로 소비하기에 급급하거나 그저 그런 독법으로 이분법적인 낡은 분석을 수행하기 일쑤”라며 비평계에 쓴 소리를 던진 바 있다. 김시인은 또한 같은 글에서 심장 없는 시들이 새로울 수는 있어도 감동을 주기는 힘든 것처럼 시를 향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예리하기만한 비평 역시 좋은 비평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비평이 시를 판단하고 줄 세울 것이 아니라, 날카로우면서도 웅숭깊고 그러면서도 시(시인)에 대한 애정과 소통의지가 있는 비평이야말로 좋은 비평이라는 그녀의 지적에 공감한다. 김선우 시인은 비평가의 이러한 폭력적인 잣대를 심지어 담론에 의거한 신종검열체계 즉 “팬옵티곤 같다”라고까지 비판한다. 시인이고 비평가이고 간에 중요한 것은 ‘탈주체’나 ‘주체 없음’, ‘타자성’, ‘분열된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치열한 자기갱신’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공감한다. 그러고 보니, “현대시, 왜 감동이 없는가”라는 문제의 책임이 이처럼 비평가에게도 있는 셈이었다. 비평가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여타의 시인들과 등단조차 하지 못한 시인지망생들은 그들의 담론에 부합하는 시, 그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시를 모범작으로 삼아,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모토로 아류작들을 습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주류 담론과 무관하게 전통 서정의 길을 묵묵히 가는 시인들도 있다. 시를 단순히 좋다/나쁘다, 감동이 있다/없다, 새롭다/진부하다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각각의 독자적인 시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감동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독자의 감동을 위해 비평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비평가에게 있어 시적 감동이란 또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비평가에게 감동은 배제되어야할 동시에, 꼭 필요한 작동 메커니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가교를 놓는 매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시대를 진단하고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젊은 작가들을 독려하며, 문학의 위기를 극복, 타계해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단순히 작품의 등위를 매기거나, 새로운 담론과 현학적인 관념들을 생성, 유통, 조장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존중의 마음, 작품의 ‘숨은 결’을 읽어내는 치밀하고 섬세한 읽기, 시대와 다양성을 조망하는 폭넓은 혜안과 아름다운 문체까지 갖춘다면 그는 아마 더없이 이상적이고 매력적인 비평가가 될 것이다. 


4. 지적인 너무도 지적인 시인들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문학판에도 존재한다. 소설이나 시를 쓰기 위해 고시원이나, 사찰, 심지어는 무인도에 들어가는 지망생들도 있다. 고교생들의 경우 문창과 대학입시를 위해 기술이 뛰어난 현업시인에게 시창작 과외를 받거나, 수상 실적을 위해 전국의 백일장 등을 쫓아다닌다. 이 외에도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공모를 위해, 무슨 고시준비처럼 이름난 강좌를 수강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시창작법’에 관한 서적을 독파하거나, 심지어 보다 전문적인 작법을 연구하기 위해 문예창작 박사과정에 진학하기도 한다. 시집을 필사하는 등의 방법은 외려 지극히 전통적이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습작에 속한지 오래다. 기존의 평론가들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렇게 기법에 치중한 시들에 있어 문제점이라면 시의 작위성, 산문화 경향, 유행시의 아류화 등을 지적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요인들이 시의 감동을 저해하는 데에도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치열한 노력은 있으되, 뭔가 부족하고 중심이 없는, 차가운 몰두라고나 할까. 해마다 수많은 시인들이 이러저러한 통로로 배출되는 것에 비해, 등단작만 화려하고 이후에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리라. 어쨌거나, 시대에 따라 유행담론이 다르고 시의 흐름이나 분위기, 형식들이 변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시공을 초월한 시적 감동은 분명 존재한다. 직조되거나 날조된, 혹은 유명한 작품을 복제한 듯한 ‘잘빠진’ 작품에서 자연스러운 감동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김소월이나, 한용운, 백석, 서정주, 정지용, 등의 작품들은 언제 읽어도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1920년대 이상의 시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에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낯섦 속에도 감동이 있다. 새로운 감상과 재해석, 다양한 연구가 끊이지 않는 이유도 아마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분명 고전이라 불리는 이들 작품들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낯설지만 친숙하고 친숙하지만 낯선 시에, 감동이 있다. 그러한 감동이 새삼 그립다.


5. 도둑맞은 감동

이상 현대시 왜 감동이 없는가라는 주제로 현대시의 감동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문단의 안팍에서 찾아보았다. 비평가로서, 시를 사랑하는 독자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쓰는 내내 무언가 어긋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구체적인 작품 분석이 뒤따르지 못해서인지 논의도 한참 부족하다. 필자는 사실 이 주제에 반감을 가지고, 그동안 현대시에서 ‘감동’을 찾아다니기 위해 온통 혈안이 되어 지냈다. 그리고 아주 멀게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가깝게는 최근 등단한 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에서 지진과도 같은 ‘감동의 활어’들을 맛보았다. 필자가 맛본 낱낱의 작품들을 감동의 순위별로 나열하여, 도막도막 따옴표와 각주로 묶음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믿는다. 시 한 줄이 사람을 살게도 하고, 때론 죽게도 한다고. 시인에게든 독자에게든 시가 신이 되는 밤이 분명 있노라고. 어제 오늘 새삼스러울 것 없이 문학은 늘 위태로웠으며, 항상 위기였다. 문학은 늘 새로움에 대한 열망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다른 변화를 꾸준히 추구해 왔다. 반면 중심엔 항상 보수와 권력, 보이지 않는 거대한 뿌리가 있었다. 정치가 변하고, 사회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도, 문학은, 특히 시는 늘 거대 담론의 자장 안에 늘 천천히 제자리를 지키며 순수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곤 했다. 이제 주류가 아닌, 비주류, 순수보다는 차이와 다양성에 주목할 때이다. 실험시와 전통시, 서정과 비서정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시를 가름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다양한 시적 경험과 감동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과 새로운 문학적 활로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절망絶望과 전망前望은 무한 반복된다. 절망을 절망하고 반성을 반성하고 배반을 배반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이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자기 부정만이, 문학의, 시의 존재 양식이다. 감동은 언제나 그 과정 속에 있다. 감동은 어쩌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도둑맞은 편지’처럼 태연하게 앉아,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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