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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오늘의 시인/대표시/신작시/산문/누가 가슴에 노크하는 소리 있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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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45회 작성일 12-03-15 00:02

본문

강인섭

 

대표시

누가 가슴에 노크하는 소리 있어 외 9편

 

 

누가 가슴에 노크하는 소리 있어

환희歡喜의 실비 오는 생명生命의

무늬가 이 밤에 나를 깨울까.

 

이미 계단階段을 내려선 상흔傷痕 위에

선율旋律의 한 끝이

저토록 손짓하며

포연砲煙 자욱한 벌판에

아련히 울려오는 말발굽 소리.

 

아, 뼈 속에 자지러지는

저 파도波濤의 높이여.

 

너로 하여 발돋움하고

내 안에 층층이 소용돌이치는 것.

 

눈보라의 징검다리를 건너와

꺼진 아궁이에 다시 불을 지피고

 

제 피에 넋이 젖는

아, 음악音樂의 너울 속에

저무는 그림자여.

 

누가 가슴에 노크하는 소리 있어

환희歡喜의 실비 오는 생명生命의 무늬가

이 밤에 나를 깨울까.

 

 

 

 

대표시

음악音樂의 파도波濤가에서

 

 

음악실音樂室에 내 영혼魂靈을 파묻고

눈꺼풀 밑으로 가란져 갈 때

이슬처럼 소소히 나리는 것,

굳은 가슴을 두들기고 지나가는

아, 건반 위의 흰 손가락 가락이여.

 

바다는 생명生命의 뜻으로

저렇게 출렁여 오고

사랑은 눈멀어 황홀하고

괴로울 때 아름답다.

 

아, 고단한 나이여.

잠시 손을 놓고

저 이랑져 오는 음향音響의 잔파 속에

눈을 묻어라.

 

고향의 산자락에 누워계신

할머니의 음성音聲 같이

잔잔히 밀려오는 어린 날의 물장 소리여.

 

실로 사랑하는 두 마음을

말없이 흐르는 기류氣流

 

대숲을 지나는 자욱 없는 흐느낌.

때로는 호젓한 산성山城 너머

두 입김이 엉키는 설레임

아니면 우리들의 영혼魂靈을

곱게 물들이는 색소色素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안개를 거둬가는

신神의 손길이듯

뼈 속에 스며오는 슬픈 환희歡喜거든.

 

잊고 살아온 나날들이

이렇게 아쉬울까.

 

친구여!

오늘은

우리의 따뜻한 피 통하는 손 맞잡고

저 자자한 목젖 속으로 가란져 가자.

 

 

 

 

대표시

설경雪景

 

 

헐벗은 나무 가지와

교회당敎會堂의 종루鐘樓에

눈이 내린다.

 

퇴근길의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머리칼에도

고궁古宮의 담 모퉁이를 돌아가는

다정한 어깨에도

4분의 3박자로

눈이 내린다.

 

공장工場의 높은 굴뚝과

가로수의 적당한 간격間隔,

판자촌의 엉성한 구도構圖 위에

모든 것이 놓인 그 자리에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나의 앞길에……

이렇게 눈이 펄펄 흩날리던 날

음악실音樂室에 파묻혀

그녀의 머릿단으로 흘러내리던

세월歲月을 껴안고

 

적설積雪의 마지막 잎새를

흐느끼던 그 날로

자꾸만 뒷걸음질 치며

 

아, 눈물처럼

눈이 내린다.

 

정말 이러다가

시詩를 잃고 마는 것일까고

앞을 두리번거리며

자꾸만 창窓을 새로 닦는

나의 시야視野에……

 

상처傷處 받은 날의 일기日記를 뒤적이다가

문득 그곳에 고여 있던

서정抒情의 주소住所를 되찾았을 때처럼

 

참으로 충격衝激스런 가슴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대표시

신문기자新聞記者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일과日課는

제 안방의 거울 앞으로 돌아가

쓰다 남은 일기日記나 다시 써 나가는 일이다.

 

쓰지 못하는 붓대를 들고

진종일 계단階段을 오르내리며

달을 보고도 달이라 못 부르고

끝내는 달을 해라고 발음發音해야 하는

범죄의 대열에 가담하여

하루를 욕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일과는

중학 시절의 공민公民교과서 앞으로 돌아가

먼지 낀 눈자위를 새로이

닦아내는 일이다.

 

하루도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뿌연 먼지 속에 살면서

동물적動物的으로 지껄이고

요령 있게 파도를 헤엄치면서도

노상 죄 없는 처자식을 파는 우리

 

가난한 이웃은 업수이 여기고

높은 대문 앞에서는

제 목소리마저 잊고 지내면서도

철조망을 흉위胸圍처럼 감고 사는 우리가

몸을 비틀며 소리치고 싶은 것은

제발 내 목소리를 달라는 것뿐이다.

 

 

 

 

대표시

파리, 그 다락방 시절

 

 

파리의 지붕 밑

그 비좁던 다락방 시절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끝이 안 보이는 어둠을 견디다 못해

망명객亡命客처럼 유학을 떠났던

나이 든 학생에게는

그래도 그 좁은 방이

유신維新보다는 자유로웠다.

 

낡은 창가에는 항상

비둘기 똥이 더덕더덕 붙어 있고

밤이 이슥하면

귀신같은 노파가 어슬렁어슬렁

층계를 내려오던 그 망사르

각진 방에 묻혀 살던 시절.

 

파리 3구區 뽕피두미술관 근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골목 어구에는

지친 발걸음들이 쉬어 가는

정다운 까페가 있었다.

 

뜨거운 우유와 진한 커피에

초생달이 늘 쟁반에 담겨 있고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구슬치기를 하던 그 곳.

 

아침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꽃다발 같은 웃음과 함께

막대기 빵을 팔던 소녀

그녀의 귀밑머리에 돋은

복숭아털을 훔쳐보며

차례를 기다리던 시절.

 

아! 그때는 기다림이 있었다

유신維新의 긴 터널이 끝나기를.

아내가 세간을 정리하고

뒤따라오기를.

 

그러나 대학 때 못 다한

상징주의象徵主義 공부를 다시 시작할 양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다가 만난

절망의 벽

서가에 꽂힌 수 천 권의 장서에

압도되어

 

마침내 발길을 돌리던

아!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

 

 

 

 

신작시

고인돌마을

 

 

오랜만에 고향의 고인돌을 찾았다가

울타리에 갇힌 무표정한 옛 친구만 보고

허망하게 돌아섰다

 

수 천 년 비바람 이겨내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 온 돌무덤들

어릴 적에 나랑 잘도 놀아주던 친구였는데……

 

산자락에 널린 각시풀 뜯어

같이 소꿉장난 하고

사금파리에 맨발이 찔리면서도

솔방울처럼 함께 뒹굴며 지냈다

 

전쟁을 피해 지게 지고 일하던 시절

허기를 달래러 삐비를 캐러 갔다가

처음 만난 돌멩이들이

이젠 점잖은 문화유산 대접을 받고 있다

 

가끔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던 고인돌마을엔

고속도로의 불빛이 쉴 새 없이 시나가고

먼 데서 들려오던 기적소리도

더는 옛길 못 찾아오는 곳

아,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변한 세상

 

오랜만에 찾은 고향마을엔

무심한 낮달만 덩그러니 떠있다.

 

 

 

 

신작시

북망산천北邙山川 가는 길

 

 

옛 조상들이 묻히기를 원했던

북망산천이 어디일까

흔들리는 나침반 하나 들고

세계 이곳저곳을 헤매었건만

이승의 끝 내세來世의 시작인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집트 땅 룩소르의 사자의 계곡과

유럽 도회지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묘지

그리고 시인 발레리의 영감 서린

지중해의 해변묘지도

막상 북망산 가는 길목은 아닌 듯했다

상정막대 짚고 상여 뒤따르며

통곡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찾던 그곳

저승까지 따라갈 것처럼 울부짖는

어린 자식들의 슬픔을 잠재울 데가 어디일까

 

하늘 가까운 곳에 제단을 쌓아놓고

정복자의 추격을 피했던 마추피추 산정의

잉카인 무덤이나

사람과 짐승을 피해 장강長江 기슭

벼랑에 매달아 놓은 현관縣棺들이

그 자리 아닐까 싶었다

 

그 후 북망산이란

낙양성 부근 황하黃河의 흙먼지가

쌓이는 산자락임을 알게 되었지만

꽃잎이 울고 낙엽이 뒹구는 곳

흰 눈 펄펄 날리다 스러진 자리가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이듯

조상 대대로 묻힌 뒷동산 같은 데가

바로 북방산천임도 알게 되었다

 

 

 

 

신작시

첫눈 오는 날

 

 

첫눈 오는 날

나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돌아가리라

 

뒤 따르는 저녁종소리와

소맷자락을 붙드는 인연의 끈

모두 뿌리치고

훌훌 떠나가리라

 

하늘의 별들이 은가루 되어

땅에 내리는 날

마을 뒷산을 돌아오는

상여소리의 여운을 따라

나 이승을 하직하리라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천사가

내 무덤 꼭꼭 밟아주는 날

나 흙으로 돌아가리라.

 

 

 

 

신작시

해 질 무렵

 

 

해 질 무렵 언덕에 올라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멀리 떼어놓고 다니던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

 

떠오르는 해를 뜨겁게 맞이했던

아침나절보다

하루해가 저무는 시각이면

제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바위 등에 걸터앉아

달덩이 같은 둥근 해를 보노라면

황혼의 그림자 속에서

내가 내 안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신작시

다시 금강金剛에

 

 

무거운 고뇌의 짐 다 부리고

가벼운 혼령만 남아

우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 때

다시 금강에 오리라

 

상팔담에서 구룡연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한 몸 되어

천사와 나무꾼처럼 얼싸안고

짙푸른 물 속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가는 세월 동그라미 안에 묶어두리니

 

만물상 얼굴에 새겨진 온갖 풍상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매만져보고

해금강 삼일포三日浦에도

사흘이 아니라 삼동三冬을 묵어가리라

 

그 때는 길이 막혀 못 갔던

내금강 깊은 골짜기

비로봉 가는 길목 난간에도 올라

해 저문 산등성이에 짐승처럼 걸터앉아

지나가는 구름과 말동무 하리니

 

아, 금강아

나 환생해 다시 올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다오.

 

 

 

 

산문

나의 시적詩的 편력編曆

 

 

내가 문학에 뜻을 두고 글을 써온 게 올해로 60년의 세월이 흘렀고,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것도 이제 55년째로 접어든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지만 그 동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남겨 놓은 재산은 별로 없는데 나이만 먹었구나 하는 회한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길고 험난한 시적 편력을 해오면서 버리고 갈 수 없는 유산은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았는지 챙겨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 기회에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나와 시가 어떤 길을 함께 걸어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문학 청년시절에는 뛰어난 서정시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의 자연을 배경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하고자 했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산록山麓」은 이 같은 나의 소박한 꿈이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후 청년시절에 쓴 작품의 대부분도 서정시 계열의 것이었다. 이번에 감히 대표작으로 내세운 「누가 가슴에 노크하는 소리 있어」, 「설경雪景」, 「음악의 파도가에서」 등 다섯 편의 작품은 청년시절에 쓴 것으로 독자들에게 제대로 선조차 보이지 못한 작품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 집에 있던 문학서적의 영향이 컸으며, 나의 사춘기적 정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1950년대 중반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무렵에는 전후의 데카당적인 분위기가 곳곳에 남아있어 자연히 나의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나는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불문학을 공부하면서 서양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프랑스문학 중 상징주의의 시에 심취하였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샤를로 보르델이나 랭보의 음산한 시적 분위기에 젖었던 것도, 말라르메나

폴발레리의 명징한 시세계를 들여다 본 것도, 내가 시의 자양분을 얻는데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내가 시의 교본으로 삼았던 스승은 정지용이나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 아니면 신석정, 서정주, 김현승의 시편들이었다.

나는 전북 이리시(지금의 익산시)에 있는 남성고등학교를 다녔다. 거기에서 가까운 거리인 전주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촛불」과 「슬픈 목가」의 시인 신석정 시인을 가끔 찾아가 내 습작을 보여드리면서 가르침을 받곤 했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내 작품 「산록」을 뽑아 주신 조지훈 선생을 성북동 댁으로 찾아가 문학과 인생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접한 프랑스 시의 영향은 나의 문학적 지향志向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한동안 그 문화적 충격을 흡수하는 데 적지 않은 정서적 혼돈을 겪어야 했다. 이때부터 한국적 정서와 순수시의 정형에 바탕을 두었던 내 초기시의 모습이 서구시의 영향을 받아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조금씩 옮겨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시적 관심이 자신과 자연 등 순수 서정시의 내면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와 시대 등 외부 세계로 확산됨에 따라 시의 주제와 형식에도 큰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내가 온전히 시인으로서의 삶만을 살지 못하고 신문 기자와 정치인 등 변화가 많은 길을 걸어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나의 직업은 시대적 변천과 정치 상황에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깊이 침작하여 외부세계와 완전하게 단절된 가운데 순수만을 고집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던 내면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와 사회적 관심과 민족문제 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 그러니까 내가 문단에 나온 지 10년쯤 지났을 때 처음 펴낸 작품집이 <녹슨 경의선>이었고, 그 후 10월 유신 등 정치적 압제가 심해지자 「신문기자」 등 저항적 성격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의 처녀시집인 <녹슨 경의선>에는 표제의 시를 빼고는 초기작품이 큰 줄기인 순수 서정시가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내가 이번에 골라낸 「설경」 등 3편의 서정시도 첫 시집에 실린 것들이며, 나는 이후에도 이 같은 시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동안 통일시, 분단시로 일컬어지는 계열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서정시의 영역을 지켜가려고 몸부림쳐온 셈이다.

이 같은 시적 편력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작품이 「신문기자」 인데, 한때 필화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다리≫지 창간호에 실린 작품이어서 하마터면 나도 함께 묶여 감옥에 갈 뻔 했었다. 당시 야당지의 기자라는 신분이 그걸 모면시켜 주었다는 얘기를 훗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내가 40대의 늦은 나이에 뒤늦은 파리 유학을 다녀온 후 그 시절의 감상과 경험을 산문시 형식으로 표현한 「파리 그 다락방시절」은 나의 중년기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서구시의 모더니즘 기법을 실험해 보고자 했는데, 그 성공 여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시대의 격랑을 헤치며

 

 

돌이켜 보면 나는 4. 50대 중장년기에 많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던 것 같다. 신문기자를 직업으로 가진 탓으로 누구보다 시대적 격변의 소용돌이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야 했던 터라 그로 인한 문학적 변신도 함께 경험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자유와 함께 표현의 자유가 크게 제약 받았던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직업인으로서 저항과 참여의식이 시를 통해 강렬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 4.19 혁명과 민주화의 물결이 넘실대던 무렵에는 젊음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작품을 많이 쓰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

나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어야 하는 이 시기에 언론과 정치활동에 몰두하느라고 작품 수확을 많이 거두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고작 1년에 너덧 편 정도의 작품을 쓰거나 어떤 때는 해갈이를 할 때도 있었으니 그나마 과작인 나로서는 작품 수확량 자체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또래의 작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권의 작품집을 낼 때 나는 겨우 4권의 시집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새 시집을 낼 때마다 신작시만으로 채우지 못하고 묶은 시편들을 함께 싣기도 했었다.

사실 이 무렵 나는 신문기자로서 가장 바쁘고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40대 초 뒤늦게 1년간 파리유학을 다녀왔고, 4년 가까운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견문을 넓힐 기회를 가졌다. 국내정치의 격변도 심해서 12.26사건과 신군부의 등장, 광주 민주화운동과 서울의 봄, 그리고 6.10 민주항쟁과 민주정부의 수립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의 신상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4반세기 넘게 종사했던 언론인생활을 청산하고 정계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다보니 한가롭게 시를 쓰고 책 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아까운 중장년기를 허송하고 말았다. 이 무렵 나는 정계의 한구석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문학예술과 출판도서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살리려고 애썼고 <녹는 경의선> 이후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통일문제를 문학적 접근이 아닌 정치 외교적 현실로 다루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분단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강인섭 통일시집>을 출간했고, 이 시집은 증보를 거듭한 끝에 2001년부터 2010년까지 4판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이 같은 노력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일 및 분단시를 주로 쓰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기도 한데, 지나온 나의 시적 편력 가운데 그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도 토로한 바 있었지만 내시의 본령은 순수서정시에

서 출발하여 장시인 「맹인, 존재와 무」 등의 작품세계에서 추구했던 다분히 철학적인 경향을 띄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작품 가운데 시사적인 발언이나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 등을 담은 것들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다. 어쨌든 나는 이제 오랜 시적 편력 끝에 70대 피안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때 몸을 돌보지 않은 탓으로 중병을 앓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원상회복을 한 상태여서 글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 만큼 얼마 남아있을지 모르는 내 인생의 소중한 여백을 어떻게 보람 있게 채워갈 것인지 생각해 볼 참이다. 그 동안 못 다한 일, 여한이 남았다면 젊은 시절과 중장년기를 시작詩作보다는 언론정치 등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소진했다는 아쉬움을 보상하기 위해서다. 이제라도 평범하고 단조로운 노후생활을 즐기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갖게 되었으니,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시와의 동거를 새로 시작해볼 생각이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인류와 우주 생성의 비밀을 파고들어 원초적인 문제에 접근해 보는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고인돌 마을」이나 「북망산천 가는 길」은 삶의 끝자락과 시원始原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시적 탐구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으로도 나는 이 같은 시적편력을 계속할지 모른다. 지켜보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질풍노도 속을 달려온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달관達觀과 관조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게 나의 소망이다. 그곳에는 전에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 같고 그 다음에 펼쳐질 사후死後세계의 모습도 어렴풋하게 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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