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4호(겨울호)집중조명/강성철/선운사 꽃무릇 외 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83회 작성일 12-04-04 13:16

본문

강성철

선운사 꽃무릇* 외 4편

 

 

내가 전생의 업으로 가을의 손금 따라 운명의 길을 내어

핏빛 그리움의 선운사 꽃무릇으로 피어날 때,

너는 저만치서 시퍼런 하늘을 가슴에 파묻고

푸른 꽃대로 구름 위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내가 저승꽃으로 선운사 주위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하늘 이마 주름 사이, 포자낭 같은 그리움으로

앞서간 너의 흔적을 더듬으며 네 기억 속을 맴돌 때,

너는 그리움이란 이승꽃이 되어 잎을 틔워내고 있었다.

 

꽃과 잎이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꽃이

무릇, 상사화相思花 말고는 또, 어디 있으랴!

서로의 흔적을 더듬다가 이승과 저승에서

각기 피어나는 슬픔들!

 

우리의 슬픔은 늘 그렇게 어긋난 길목에서 피어나곤 하였다.

피어나선 늘 그렇게 그리워하며 탱화 속,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빛바랜 풍경으로 굳어져 갔다.

 

*사찰 주변에 많이 자라며, 꽃이 지고서야 비로소 잎이 난다하여 상사화라고도 한다.

 

 

 

 

사려니 숲길

 

 

새벽이 몰고 오는 한라산 안개의 숨결들을 거두어

금새우난에 이슬방울들이 강림하였네요.

또르르, 또르르 하품을 하며 사려니 숲을 깨우는 이슬들!

 

이것 봐, 이것 좀 보라니까 글쎄!

소쩍새가 소쩍거리며 소쩍대자,

사농바치주*가 따라간 노루의 배설물에

때죽으로 피어나는 때죽나무 새순들.

 

박새가 반색을 하며, 그뿐만이 아니라며

생이주*소리로 휘파람새를 부르자,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하는 산딸나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얼굴을 붉힙니다.

 

족제비, 오소리도 이에 질세라

‘으음’하며 으름장을 놓자,

졸참나무 처마 밑 으름난초가

둥굴레 무리사이로 의젓하게 꽃대를 세우기도 하죠.

 

어디, 그 뿐인가요? 설문대 할망주*

한라산을 배게를 삼던 그 옛날의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당신 꿈길에 피톤치트를 깔아놓자,

나는 서어나무 밑에서 서성이던 말테우리주*가 되어

 

당신을 무등태우고 사려니 숲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일까요? 탐라국 돌멩이 숭숭 뚫린 숨구멍 사이로

오래된 사려니 숲의 신화가 들숨, 날숨으로

처녀림처럼 신비롭게 떨고 있다고도 하지요.

 

*사농바치주:사냥꾼의 제주 방언.

*생이주:참새의 제주방언.

*할망주:제주 설화 속의 거인 할머니. 500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함.

*말테우리주:말을 모는 목동의 제주방언.

 

 

 

 

남대천 반딧불이

 

 

무주 남대천에서 만난 반딧불이들,

제 몸을 살라 자연의 등불이 되는 저, 소신공양들!

자연의 정령인 도깨비불로 날아다닌다.

 

문명이 비켜선 어릴 적 고향마을 밤길에 피어난

깜빡깜빡 점등되는 기억의 등불들!

 

자연이란 원초기억의 퓨즈가 나가버린

이기利器의 세월을 살아오며 잊혀져간 기억의 등불들을

금강 상류, 이 곳 남대천에서 조심히 들추어낸다.

이 땅의 강들 모두 오염되어도 이곳 남대천에선

노아의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새처럼

반딧불이들이 구원의 빛으로 반짝이는데……

 

일급수에서만 자란다는 다슬기만 먹다가

인고의 번데기 시절 뒤,

우화등선의 꿈으로 날아오르는

저, 도깨비불들!

 

잊혀져가는 시대, 정녕 잊지말아야할 것들이다.

 

 

 

 

개똥벌레

 

 

예전엔 너무 흔하다하여 붙여진

개똥벌레라는 반딧불이가

사바세계 혼탁한 연못에 피어난 연꽃 주위로

자신의 혼불을 태워가며 몰려든다.

 

개똥을 먹고 자란다고도 했던 개똥벌레와

이전투구의 혼탁한 곳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이루어내는 피안의 세계

 

둘 사이에 오가는 염화시중, 이심전심의 미소가

혼탁한 세상에 하나는 ‘불’로, 하나는 ‘꽃’으로

‘불꽃’을 피워내는데……

 

진흙 수렁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개똥 속에서도 아름다운 혼불을 태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눈물겹도록 허락하고 있다.

 

 

 

 

다시, 사강을 지나며

 

 

살아온 생이, 살아갈 생에 걸려 넘어져

온 몸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어져 내릴 때,

이국적이면서 살가운 이름 사강을, 다시 가보자.

활처럼 굽은 등 위로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염부들이

해풍에 맨몸 절이며

오체투지 하듯 고무래질로 바닥을 휘젓자,

가두어둔 바닷물에서 피어나는 순백의 꽃들.

 

생의 비단길을 돌아 돌아온 외발 수레차가

늙은 낙타처럼 소금창고 주위에 길게 누워있고,

해가 졸이고 바람이 말린 시간들 사이로

지친 몸과 마음을 조심히 밀어 넣어 말려본다.

 

앞만 보고 급하게 달려온 생의 기억이

더 이상 살아갈 생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느린 세월의 간이 온몸에 배도록

햇빛에 내 마음을 내어 말린다.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속으로

검버섯 핀 얼굴,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등짐 진 낙타처럼 터벅터벅 걸어가신다.

 

 

 

 

시작메모

다섯 편 쓰기

 

 

# 2011년 9월 15일(목요일)

원고청탁을 받았다. 마음이 무겁다. 써놓은 시가 한 편도 없는데, 다섯 편이나 달라니, 그것도 일주일 만에 다섯 편이라니…… 그런데 사실은 두어 달 전에 미리 언질을 받긴 하였는데, 그놈의 게으름 때문에 그리고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를 안 써둔 게 후회가 된다. 일단 일 주일 내에 다섯 편을 써보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 2011년 9월 18일(일요일)

주말에 시를 두세 편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뜻대로 안 되었다. 일터인 전주로 내려가는 길이 무겁다. 그래, 월요일서부터 매일 한두 편씩 쓰면 되겠지. 숙소에 와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 마신다. 시심이 돌아 오는 듯하다가 술김에 잠들다.

 

# 2011년 9월 20일(화요일)

회사일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프다.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을 칠 기미를 보인다. 그리스가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속보로 나오고 있다. 금융시장이 경색을 보일 기미를 보이고, 주가가 급락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은행원인 내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 시 한 편도 못썼다. 막걸리를 마시고 잠들다.

 

# 2011년 9월 21일(수요일)

잡지사에 전화한다. 도저히 시가 안 써져서 이번 청탁은 없던 걸로 해달라고 하였다. 당연히 곤란하다는 답을 받았다. 대신에 9월 30일까지 연기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래 써보자! 아일랜드 맥주인 ‘기네스’를 마트에서 사가지

고 와서 숙소에서 혼자 마시다가 잠들다.

 

# 2011년 9월 22일(목요일)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을 친다. 머리가 아프다. 전주천변을 걸으며 별을 보았다. 반딧불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가보았던 무주 남대천 반딧불이가 생각났다. 자연이 신음을 하며 앓으면서 반딧불이들이 사라져 간다. 그래 이거다. 내친 김에 두 편의 시를 완성하다.

 

# 2011년 9월 23일(금요일)

작년 이맘 때 가 보았던 ‘선운사 꽃무릇’의 기억에 떠오르다. 꽃과 잎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어 서로를 그리워한다하여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부르는 꽃무릇. 오늘 한 편의 시를 또 완성하다.

 

# 2011년 9월 26일(월요일)

미국의 신용강등과 그리스국가부도 사태에 이은 유럽발 위기로 우리 직원들이 모두 신경이 날카롭다. 부하직원들을 잘 달래면서 은행 업무를 이끌어간다. 오늘도 맥주를 마시고 잠들다.

 

# 2011년 9월 29일(목요일)

얼마 전 고향 제주의 원시자연림인 ‘사려니’를 걸으며 생각났던 시상을 가다듬으며 ‘사려니 숲길’을 완성하고, 내 청춘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강을 떠올리며 또 한 편의 시를 완성하였다. 내가 생업으로 삼고 있는 금융업무의 환경은 여전히 먹구름이지만, 시 다섯 편을 마침내 완성하여 홀가분하다. 오늘은 ‘천둥소리’라는 달지 않은 막걸리를 마시고 잠들다

 

강성철∙1957년 제주 출생.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