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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겨울호)집중조명 해설/허금주/자연을 통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강성철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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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해설
자연을 통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강성철의 작품세계
자연은 한국시문학사 뿐 아니라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제재라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더군다나 오늘날 산업화와 도시화가 범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연이 그 중요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과 필연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인간의 생명을 보육하는 근원적 에너지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섭리를 가르쳐주는 진리의 저장고라는 점, 그리고 그 자체가 심미적 대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향가와 고려가요, 조선의 강호가도를 거쳐 지금의 생태시에 이르기까지 자연시의 위상은 위축됨이 없이 우리 시의 큰 줄기를 형성해 왔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과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은 그것을 지각하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즉 예술가와 자연과학자가 보는 자연은 각기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인 문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객관적 사물로서의 자연도 아니며, 신의 창조물로서의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여과되고 굴절된 내면화”된 자연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자신의 주관적 의식 즉 감정, 관념, 이념 등에 따라 자연에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감의 세계를 표출한다. 시적 자연은 다분히 개인의 주관성에 의해 변형된 미적 상관물인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 세계를 내면화하는 과정, 주관성을 실현하는 과정이 곧 시인의 세계 인식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강성철은 제주 출신의 시인이다. 여기서 굳이 시인의 고향을 언급하는 이유는 시를 쓰는 사유의 자장력은 고향에 뿌리를 두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생래라는 것을 환기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다. 1990년대 후반 <사강을 지나며> 시집을 접해 본 기억이 있는데 이번 5편의 신작시 가운데 「다시, 사강을 지나며」를 읽게 되어서 그 인연에 잠깐 숨을 고르게 된다. 필자가 들여다 본 그 시집에서도 제주와 관련한 소재들이 등장했었는데, 이번 신작 시 5편이 제주의 자연 「사려니 숲길」 외 4편인 걸 보면 존재론적 비의에 대한 탐구를 꾸준히 추구해 온 것일까.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내밀한 우주 생명의 순환리듬을 찾고 해명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동화되어 직접적으로 체득하고, 느끼고, 살고자 하는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빈번하게 인위적인 도시 문명의 시간 질서를 벗어나서 우주의 박동이 생생하게 감지되는 깊은 자연 속으로 떠난다.
새벽이 몰고 오는 한라산 안개의 숨결들을 거두어
금새우난에 이슬방울들이 강림하였네요.
또르르, 또르르 하품을 하며 사려니 숲을 깨우는 이슬들!
이것 봐, 이것 좀 보라니까 글쎄!
소쩍새가 소쩍거리며 소쩍대자,
사농바치가 따라간 노루의 배설물에
때죽으로 피어나는 때죽나무 새순들.
박새가 반색을 하며, 그뿐만이 아니라며
생이소리로 휘파람새를 부르자,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하는 산딸나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얼굴을 붉힙니다.
족제비, 오소리도 이에 질세라
‘으음’하며 으름장을 놓자,
졸참나무 처마 밑 으름난초가
둥굴레 무리사이로 의젓하게 꽃대를 세우기도 하죠.
어디, 그 뿐인가요?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배게를 삼던 그 옛날의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당신 꿈길에 피톤치트를 깔아놓자,
나는 서어나무 밑에서 서성이던 말테우리가 되어
당신을 무등태우고 사려니 숲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일까요? 탐라국 돌멩이 숭숭 뚫린 숨구멍 사이로
오래된 사려니 숲의 신화가 들숨, 날숨으로
처녀림처럼 신비롭게 떨고 있다고도 하지요.
―「사려니 숲길」 전문
사려니 숲길은 옛날에 제주 들녘을 달리던 말테우리(목동의 제주 방언)들과 사농바치(사냥꾼의 제주 방언), 화전민들과 숯을 굽는 사람들, 표고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고 남원읍 사람들이 제주시로 다니던 길이었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살아있는 길이었던 사려니 숲길이 지금은 산책로로 조성되어 뭍 사람들에게도 공개된 것은 최근 2년 여의 일이다.
‘사려니 숲’은 제주 방언으로 ‘신성한 숲속’이라는 뜻으로, 숲에 당도한 시인은 “숲을 깨우는 이슬들”을 보며 세상사 질긴 번뇌를 맑게 씻어낸다. 본원적인 자신의 삶의 원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상의 허위와 가상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속적 삶에서 강조하는 존재의 차별화나 가치의 위계화가 스며들 여지가 없다. 시적 화자는 “사농바치가 따라간 노루의 배설물”에서 “때죽나무 새순”이 피어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숲을 싸고 도는 공기, 사랑에 이르는 비가시적인 세계까지 “말테우리가 되어” “당신을 무등태우고” 더 나아가 “탐라국 돌멩이 숭숭 뚫린 숨구멍 사이로” “사려니 숲의 신화”가 “처녀림”처럼 떨고 있음을 목도하기도 한다. 시적 화자는 의식적인 질서의 위계를 벗어난 “사려니 숲”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의 길을 쉬임없이 달려가고 견인하는 현실의 실체는 무엇일까. 십 수 년 전 청춘의 고통스런 사강을 빠져 나오며, “사강을 빠져 나오는 길목”에서 “길을 잃”었던 시인이 “다시, 사강을 지나”고 싶어하는 현실적 요소는 무엇일까.
생의 비단길을 돌아 돌아온 외발 수레차가
늙은 낙타처럼 소금창고 주위에 길게 누워있고,
해가 졸이고 바람이 말린 시간들 사이로
지친 몸과 마음을 조심히 밀어 넣어 말려본다.
앞만 보고 급하게 달려온 생의 기억이
더 이상 살아갈 생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느린 세월의 간이 온몸에 배도록
햇빛에 내 마음을 내어 말린다.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속으로
검버섯 핀 얼굴,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등짐 진 낙타처럼 터벅터벅 걸어가신다.
―「다시, 사강을 지나며」 부분
1990년대 후반에 발간한 시집 <사강을 지나며>에서 “사강”은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이 표현한 바 있다.
➀ 덧없는 세월과 알콜 중독으로 쭈글쭈글해진 프랑스와 사강
➁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알 같은 시간의 자맥질 속에서 그 어떤 綠이 우릴 沙江 가게 하는가.
➂ 우리들 청춘의 아름다운 시체들을 가슴에 묻고 死江 지나간다.
➃ 思江 지나치며 정리되지 않는 무질서한 생각들이 강물처럼 흘러 차창을 적신다.
“살아온 생이, 살아갈 생에 걸려 넘어져/온몸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어져 내릴 때”“사강”을 발음해 보며 다시 가보고 싶은 그의 독특한 사색은 시의식의 성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강”의 의미망이 거느리는 존재의 실상이 화자에게는 삶의 근간을 구축하는 핵이다. “앞만 보고 급하게 달려 온 생의 기억이/더 이상 살아갈 생을 부패시키지 않도록”하기 위해서 “느린 세월의 간”을 “사려니 숲”에서 온몸에 배도록 숲속에 깃든 생명과 그 생명의 힘에 대한 일깨움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경제학을 전공한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모습 안에서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반추해 보는 것은 이 땅의 아버지가 견디어야 할 삶의 행로를 견인하는 좌표로써 체험하게 한다. 그의 시의식은 물질에 노출된 현실 공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밀도 높게 성숙됨을 알 수 있다.
내가 전생의 업으로 가을의 손금 따라 운명의 길을 내어
핏빛 그리움의 선운사 꽃무릇으로 피어날 때,
너는 저만치서 시퍼런 하늘을 가슴에 파묻고
푸른 꽃대로 구름 위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내가 저승꽃으로 선운사 주위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하늘 이마 주름 사이, 포자낭 같은 그리움으로
앞서간 너의 흔적을 더듬으며 네 기억 속을 맴돌 때, 너는 그리움이란 이승꽃이 되어 잎을 틔워내고 있었다.
꽃과 잎이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꽃이
무릇, 상사화相思花 말고는 또, 어디 있으랴!
서로의 흔적을 더듬다가 이승과 저승에서
각기 피어나는 슬픔들!
―「선운사 꽃무릇」 부분
강성철 시인은 「청춘고백」에서 성장기의 일부분을 표현한 적이 있다. “어머니 술손님들 정말 싫어요. 영혼의 거푸집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너무 싫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래 열심히 공부해야지”라며 다짐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꽃무릇이 아닐까. 출세가도를 달려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려는 마음과 시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은 모두 운명이 된다. 운명은 인위적인 힘으로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대상이다. 운명 앞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응과 감내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빛바랜 풍경”으로 굳어져 간다 해도 화자는 외로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어차피 외로움과 슬픔은 내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기 때문이다. 견디는 일만이 “전생의 업”으로 “운명의 길”을 낸 그리움이 낸 현존재의 초극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운사 꽃무릇”의 진경은 감상자의 정서적 호흡을 압도한다. 시적 정황의 깊고 붉은 신비감과 경이가 감상자의 숨결을 강렬하게 흡입한다. 시적 내면의 뿌리가 무의식의 심연을 관통하고 있을 때 그 시인의 내밀한 시창작의 미학적 원형질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꽃과 잎이 한데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의 흔적을 더듬다가 이승과 저승에서” 각기 피어나는 것은 비현실/현실, 무의식/의식의 범주가 서로 몸바꿈을 하고 혼재하는 우주의 역동성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그가 숲과 꽃, 새와 짐승, 벌레가 어우러진 자연을 노래하는 것은 가장 본원적인 자신의 삶의 정체성의 회복을 갈망하는 의미를 지닌다.
예전엔 너무 흔하다하여 붙여진
개똥벌레라는 반딧불이가
사바세계 혼탁한 연못에 피어난 연꽃 주위로
자신의 혼불을 태워가며 몰려든다.
(중략)
둘 사이에 오가는 염화시중, 이심전심의 미소가
혼탁한 세상에 하나는 ‘불’로, 하나는 ‘꽃’으로
‘불꽃’을 피워내는데……
―「개똥벌레」 부분
시인은 현실세계가 탐욕과 투쟁으로 얼룩질수록 더욱 깊이 순연한 자연의 숲을 갈구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자연의 대상물이 되고자 한다. 그에게 자연세계는 세속적인 현실과 상대되는 순수의 성채城砦로서 존재한다. 이 순수의 성채가 이번 신작시 5편의 시적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 언어의 우물이다. “개똥벌레”와 “연꽃”으로 대변되는 자리는 세속적인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과 거부의 공간이지만 결코 현실에 대한 첨예한 저항과 응전의 양식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그의 시적 삶은 항상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개똥 속에서도 아름다운 혼불을 태워내”는 내면적 심연의 길을 향해 “불꽃”으로 피워내기 때문이다. 맑고 온화한 시적 화법은 유소년 같은 감수성의 감각기관을 열어 자연의 리듬과 상호 공명하는 데서 가능하다.
문명이 비켜선 어릴 적 고향마을 밤길에 피어난
깜빡깜빡 점등되는 기억의 등불들!
자연이란 원초기억의 퓨즈가 나가버린
이기利器의 세월을 살아오며 잊혀져간 기억의 등불들을
금강 상류, 이 곳 남대천에서 조심히 들추어낸다.
이 땅의 강들 모두 오염되어도 이곳 남대천에선
노아의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새처럼
반딧불이들이 구원의 빛으로 반짝이는데……
일급수에서만 자란다는 다슬기만 먹다가
인고의 번데기 시절 뒤,
우화등선의 꿈으로 날아오르는
저, 도깨비불들!
―「남대천 반딧불이」 부분
강성철의 시편에는 지난 삶의 역사, 추억의 풍경, 미지의 연인 등이 실감있게 살아난다. 그의 시적 그리움의 언어는 과거형은 물론이고 미래형의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 소멸해가는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다림으로 변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부재의 대상은 늘 현재적 삶과 긴밀한 대응관계를 지닌다. “어릴적 고향 마을 밤길에”서 반짝이던 반딧불이는 현실의 결핍과 불안을 환기시키는 반사체로 작용한다. 빛바랜 추억의 사진첩을 감상하는 것처럼 애틋하고 정겨운 감성이 짙게 스며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이란 원초기억의 퓨즈가 나가버린/ 이기利器의 세월을 살아오며” 지나간 삶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그 “기억의 등불들”을 “남대천에서” “들추어” 내는 것은 현존하는 삶의 실체를 깊이있게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농경적 삶의 문화가 해체되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근대화의 가속화와 더불어 모든 정책이 대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대지적 풍요와 생명성은 찾아 볼 수 없는 척박한 현실로 전락된 삶의 터전을 향해 “남대천”을 향하는 화자의 우수어린 표정은 서늘한 감응을 불러 일으킨다. 구약성서에서 창세기 편에는 예수님이 그 옛날, 사람들이 저지른 죄에 화가 나 대홍수를 일으켜서 지구의 모든 곳이 물에 잠겼을 때, 노아일족과 노아의 방주에 탄 생물들을 생각하여 40일만에 비를 멎게 한 기록이 있다. 홍수가 끝나갈 무렵 비둘기가 저지대에서 자라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온 것을 보고 노아는 드디어 대홍수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인간을 소비 이데올로기의 충직한 시민으로서 재구성시키고자 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종교적인 신생의 가능성을 반딧불이를 통해 시상전개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일급수에서 자란다는 다슬기만 먹다가” “번데기 시절”을 마치고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된다는 “우화등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곤충은 일곱에서 열 차례 탈피로 우화등선羽化登仙 하고, 사람은 태어나 10세 마다 리화성숙理化成熟하여 몽환夢幻을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짐짓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그가 도처에서 시적 비유의 계열체들-사려니 숲길, 선운사 꽃무릇, 개똥벌레, 남대천 반딧불이-을 우주적 신성의 이미저리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도 읽을 수 있다.
“잊혀져가는 시대, 정녕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강성철 시인과 함께 “다시, 사강”을 지나면서 자연을 통한 화해와 용서, 사랑의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행복한 삶의 길이기도 하면서 원시적 자연의 냄새가 되살아나는 행복한 시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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