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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gh(겨울호)신작특선/김춘/이백李白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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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
이백李白 외 5편
초승달은 수면을 여닫는 문고리다. 바람이 그 문고리에 손을 댄다. 찰방찰방 쇳소리가 난다. 문고리를 열고 들어간 바람이 아가미를 달고 나온다. 가득 머금고 나온 낱말을 꾸역꾸역 뱉는다. 쏟아져 흩어진 낱말들을 더듬더듬 찾아 읽는다. 밤을 새운다. 오늘이 온다.
보름달은 수면에 핀 꽃이다. 바람이 노란 꽃잎에 파리한 입술을 댄다. 오소소 꽃잎이 떤다. 물결 사이사이로 꽃잎이 날리고, 몇 잎은 발등을 적신다. 달빛에 취해 꽃을 꺾으려고 물가를 배회한다. 밤을 새운다. 오늘이 온다.
그믐, 뱃전에 걸쳐놓은 빈 낚싯대에 바람의 아가미가 걸린다. 아가미에서 별들이 쏟아진다. 손바닥으로 수면을 쓸어본다. 손끝에 느껴지는 파동, 달의 심장이 파닥인다. 달의 잠행潛行이다. 나,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늘이 간다.
두 노인의 고요
잇몸이 내려앉아 읍내 치과에 갔다. 와서는 우리집 노인 끙끙거리며 한잠에 들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 물결무늬 뚜렷하다.
둑이 내려 앉아 보수공사 예정이라는 푯말이 둑 밑에 꽂혀 있다. 저수지는 마을을 베고 낮잠 중이다. 산그늘 내려 깔고 수련까지 끌어다 덮었다. 털털거리며 경운기 지나고, 저수지가 얼결에 뱉는 잠꼬대, 흰 새 두 마리 훌쩍 날아오른다.
저수지는 우물보다 더 깊어 사람을 유혹했다.
횃불을 들고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로 몰려가던 밤이 지나고
부셔, 부셔, 곡괭이로 둑을 내리치며 울부짖던 광배아저씨.
품은 여인을 돌려달라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술 안 먹을 테니, 때리지 않을 테니, 고만 돌아오라고,
미안타, 미안타, 광배아저씨는 빌고 빌었다.
며칠 후, 참말로 대답하듯 물풀을 친친 감고 여인, 돌아왔다.
쫓아내는 어른들 틈에서 아이들은 물음표를 하나씩 물고 컸다.
물길
골짜기가 바람을 한 입 가득 품었다가 내뿜는다. 안개가 피어난다. 안개 너머로 구름이 그윽이 바라본다. 구름 떼가 둥글게 뭉친다. 흘러내리던 둥근 잔해가 뺨에 그대로 매달린다. 단단한 열매다. 열매는 시간을 기르며 익는다. 그 사이 골짜기는 자주 안개를 만들고, 별들의 발길도 잦았다. 다 자란 시간은 열매의 등을 가르고 튕겨 나온다. 시간이 물고 있는 어린 눈빛은 투명하다. 어린 눈빛 속에 너의 어제가 있다.
투명한 눈빛이 눈빛끼리 만나, 계절이 뜨고 지는 골짜기에 물길을 낸다. 나무들 몸을 틀어 물길을 향해 굽는다. 산그늘의 푸른 혀는 무덤 앞에 놓인 꽃을 핥는다. 새보다 더 새같이 우는 짐승이 구름 떼 속으로 사라지고, 밤보다 더 어두워지는 너는 남는다. 너는 헐거운 도시가 흘린 불온. 처벅처벅 물길 속 달빛이 흩어지는 밤은 길다.
소금사막
무릎을 꿇고 소금을 거두는 너의 등 뒤로 소금더미 속에 갇힌 햇빛이 꿈틀거리네. 물고기의 눈동자들은 하얗게 염장되어 하얀 고요로 염장된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겹도록 하얀 날들이야. 소금침대에 누운 그는 몸 속에 저장된 수분을 다 소진했네. 외부와 연결된 몇 개의 가시로 수분을 받아들이고 있네.
지난밤 비가 내렸네. 물이 고인 소금사막은 하늘과 땅의 구분이 사라지고, 구름이 구름인 사실을 잊었네. 비린내가 돋는 구름의 자맥질.
몸에 있는 수분이 말라버린 그가 힘겹게 눈물을 흘리네.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오늘, 너는 첫차를 타고 출구 없는 소금 집을 떠나네. 처음은 언제나 무거워 돌아보네.
시를 탐하다
발화, 고 하얀 거짓말
햇살을 탐하다.
달변의 과육,
비와 그늘이 새긴 멍,
쫙 쪼갠다. 빨간 참말
턱을 지나 손등을 타고 흐르는 즙,
끈적이는 코끝,
그 코끝에 묻은 까만 점,
천 하루 쯤 지나 코끝에 당도한 눈빛이
찾아낼 기호,
시작, 그 발열점이 거기에 있다.
기린이 어미의 눈을 읽는다
어미의 어미는 그랬다. 동공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아가야, 귀를 핥아주마. 사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거라. 바람이 가는 곳으로 온단다. 소리 내어 말하지 마라. 하등의 것들이 하는 짓이지. 이 어미는 사바나를 떠나온 밤과 새벽을 기억한단다. 정글에 갇힌 밤의 포효, 어슬렁거리는 푸른 눈동자, 야행을 나서며 서로를 경계하는 소리, 되새김 속으로 들어와 잘근잘근 씹히는 밤이었단다. 그날 밤은 유난히 목에 목을 감고픈 밤이었단다. 사바나의 새벽은 붉었지. 암흑 속에서 숨죽여 흘린 피의 울음소리를 닮았지.
사육장의 어린 기린이 어미의 눈을 읽다가 사바나로 가는 빈 길로 들어간다. 잠 속에서 동공을 굴린다.
시작메모
始作 혹은 詩作
나의 발에 시의 발을 묶고 한 조가 되어 출발선을 떠났다. 그런데 도대체 달려지지가 않는다. 빨리 달리라는 응원소리는 들리는데 엇박자가 되어 걷기조차 힘들다. 도착점은 있기나 한지. 두루두루 골치 아픈 시와 짝이 되었다. 앞서 가시는 분들은 성큼성큼 잘도 가신다. 끝까지 묶은 발을 풀지 않고 가겠다는 오기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나의 시들은 쉽게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매달린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매달리니까 시가 알아서 나오기도 한다. 그런 시들이 나에게 주문한다. 나를 열어둘 것, 눈빛을 맑게 할 것.
김춘∙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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