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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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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26회 작성일 11-12-3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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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

   날 외 1편



밝기가 무서웠다. 알다시피

로마는 하루만에 세워지지 않았지. 일단 세우고 말하자. 날을. 잡은 것 같았다. 감을. 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병을.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약내가 진동한다. 알다시피

지금이 정확히 언젠지. 까마득하다. 이곳에서 저곳까지는. 너무 멀다. 내 심장이 아득하듯. 버겁기만 하다. 지금부터 훗날까지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맥이 가까스로 뛰듯. 불안하다. 손가락으로 내 몸의 음을 짚어내는 게. 어색하다. 불가능한 제안을 받아든 것처럼


날이. 또다시 샌 것 같았다. 김도. 빠지는 것 같았다. 기운이.


돌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콜레라가. 이 시대가. 사랑이. 가난이. 궁색이. 로마가. 삽시간에. 위태로워졌다. 하루하루가 위험해졌다. 나의 토대가 떨고 있었다. 주저앉아버리기 전에


혼자 두지는 마. 낱말을. 하나하나의 고독을

섣불리 모른 척하지 마.


날개도 없는 개가 푸드덕거린다. 살기 위해서. 저물어야 하는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서

해는 아예 뜨지 않는다. 날

밝기가 무거웠다. 그러나 세우면. 로마를. 잡으면. 날을. 따면. 감을. 모르 면. 병을.


비로소 날것이 날 것이다. 모르다시피

언제나. 어디서나. 좌표를 읽는 건 불가능했다. 마침표를 찍듯 발을 내딛지만 찍히는 건 창창한 말줄임표뿐. 나는 할 말이 없다. 고로 나는

생략된다. 그림자가. 희미해져간다. 자취가.


파악되지 않는다. 로마가. 휘청거린다. 몸이. 귀해진다. 시간이. 흐른다. 식은땀이. 쏟아진다. 원성이. 들끓는다. 로마인들이

지금 당장 필요한


약을 모를 때. 병을 딸 때. 감을 잡을 때. 날을 세울 때. 로마에 휴일이 닥쳤을 때.


이방인인 나는

이질로 고생을 하기 시작한다.

하루 만에 세워지지 않는

이 뜨악한 도시에서

시피豺皮*를 깊이 뒤집어쓰고

알다시피, 너도 잘 알다시피


  * 승냥이의 가죽.

 

 


 

   이것은 파이프다



이것은 늘씬하게 잘빠졌다. 이것의 몸체는 길고, 시작인지 끝인지 종잡을 수 없는 곳에 대가리인지 엉덩이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달려 있다. 대가리인지 엉덩이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달려 있는 곳 반대편은 딱 봐도 입에 물기 좋게 생겼다. 물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소원이 이뤄질 것 같다. 꿈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것 같다.

나는 이것과 접촉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몽롱해지면서 확신이 생긴다. 몽롱해졌다는 확신이 생긴다. 나는 이상하다. 이것은 명백하다. 이것이 명백하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나는 이것을 파이프라 부르겠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나의 접촉을 그토록 순순히 받아들였겠는가. 소원을, 꿈꾸기를 묵인하고 있었겠는가.

1929년,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는 음모가 제기되었다.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는 펄쩍 뛰었거나 뛸 참이었다. 이것은 명백하고 이것은 명명백백하다. 나는 이것을 보자마자 파이프라고 말했거나 말할 참이었다. 이것은 참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이 이상하지만,


살담배가 꾹꾹 쟁여진, 금방이라도 지독한 연기를 피워 올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이것은 파이프다. 파이프는 파이프다. 파이프 말고 이것을 표현할 다른 수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의식과 손잡는다. 의식은 나를 입 다물게 한다. 내 소원은 나와 소원해진다. 내 꿈은 기껏해야 꿈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다. 도무지 다잡을 수 없는, 너와 나에게 똑같이 곤란한,

이것은 파이프다. 이것은 와이프가 아니다. 나이프나 테이프도 아니다. 자르고 붙이는 데 골머리 썩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저 입에 물고 꿈꾸다 고체를 기체로 만들면 되는, 이것은 파이프다. 나와 너처럼, 이것은 파이프다. 불과 연기처럼, 이것은 파이프다. 섣불리 파이프가 아니라고 가정하지마라. 이것은 이프if가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것은 파이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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