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3호(가을호)/신작시/최동은
페이지 정보

본문
우두커니 외 1편
늦게 저녁이 오는 것은
마른 흙에 구멍을 내며 한 빗방울이 오는 것
구멍 난 흙먼지가 타박타박 걸어오는 것
늦게 저녁이 저녁으로 오는 때는
어스름이 어린 호박을 더듬어보는 때이고
옥수수 이파리들 순해지는 때이고
밭일 간 엄마의 젖이 빠르게 도는 때이고
귓속에 살던 매미가 다른 벌레의 몸이 되고
맨드라미를 바라보던 옆 사람이 오래 전 떠난 사람이고
늦게 저녁이 오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던 한 이파리가 오는 것
이파리 위 쬐금 남아있는 햇빛이 오는 것
날개를 접으며 잠자리가 오는 것
살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돌에 맞아도 내색해선 안 돼
귓바퀴가 찢어져 피가 흘러도 눈물 보이면 안 돼
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쪼이면
초록을 채워 그 자국 숨겨야 해
벌레가 호두나무잎을 건너오고 있어
구멍이 뚫리고 뼈가 간지러워도 참아야 해
그때 얼룩이 오기 때문이야
치솟는 분노를 들키면 안 돼
가지가 찢겨져도 자살을 꿈꿔선 안 돼
먹구름 폭풍우를 몸에 새겨야 해
들큰 신맛이 온몸에 스며들게
심장을 열고 뿌리까지 닿도록 숨을 들이켜야 해
누구도 손 댄 흔적 남기지 않아야 해
매달려 있는 일에만 열중해야 해
맹렬히 익어가야 해
노을빛 수액이 돌 때까지
추천0
- 이전글43호(가을호)/신작시/최정란 11.12.31
- 다음글43호(가을호)/신작시/오은 11.1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