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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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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15회 작성일 11-12-3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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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란

  그 해 여름 외 1편



장마가 오기 전에 엄마는 이층에서 굴러 내려오고

엄마가 누워서 꼼짝달싹 못하는 동안

쌀통에서는 쌀벌레가 날아오르고

계단에는 모서리마다 이끼가 파랗게 피었다

마당에 온갖 꽃들을 심어놓은 엄마가

꽃처럼 심겨진 침대는 엄마를 심은 인공정원,

엄마가 심긴 화단 담벼락을 타고

줄장미 덩굴이 올라가고 꽃은 아픈 줄도 모르나

엄마 팔에서 덩굴손처럼 돋아난 링거 줄이 올라가고

엄마, 장마가 너무 오래 가요 빗소리를 들으며

담벼락을 뒤덮은 줄장미가 지는 동안,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빼먹은 나는 언니의 바지를 늘리는데,

재봉틀 소리가 처마 밑에 낙숫물 자국처럼 점점이 파인다

내 키는 언제까지 자라나, 엄마는 날마다 누워있고

엄마가 누워서 천정만 바라보는 동안

나도 언젠가는 엄마가 될 텐데,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나도 저렇게 몸 안에 갇히게 되면 어쩌나

엄마는 정신이 초롱초롱해서 몸이 감옥이고

나는 내 발로 위층 아래층 쫓아다니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언니도 오빠도

말 해주지 않고, 여름 내내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안전하게 담겨 있는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무 



마침내 늦가을이 와 무밭에 무를 뽑으러 가네

숱이 많은 시퍼런 머리칼을 온 밭에 풀어 놓고

무는 고요하고 편안하네

뿌리와 머리만으로 무성한 바람을 다 키웠다고

무는 온 들녘을 다 거두어 놓고 기다리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오일장 모퉁이 종묘상에게 씨앗을 산 일

빌린 남의 땅에 재미삼아

무씨를 파묻은 일

풀 한 번 뽑아준 일

그 후로는 모두 무가 한 일

오며 가며 들여다보기만 하는 동안에도 무는 땅속 깊이

들어가고 무가 얼마나 자랐나, 내 궁금증에 대답하듯

캄캄한 어둠 속에서 멀리

무밭은 푸르게 빛나고

시퍼런 무청을 보며 짐작만 하던 무를

뽑는 일, 설레고 두근거리네


세상에 할 일이 많다지만

가을에 그래도 참 할 만한 일은

망치질 소리 한 점 없이

어둠 속으로 희고 튼튼한 기둥을 박아 나가는

 

무를 믿는 일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한 점 티끌 들이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하얗게 단단해져 가는 어둠을

믿는 일, 땅을, 딛고 선 바닥을, 믿는 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순결함을 믿는 일


서리 내리기 전에 무를 뽑으러 가네

무릎이 눈 속에 푹푹 빠지기 전에 무를 뽑으러 가네

어른 팔뚝만한 무가 쑥쑥 올라오네

땅을 열고 올라오는 묵직한 뿌리를 맞받아 올리며,

시간의 약속 앞에 깊이 허리를 굽히네

사심 없이 자란 희고, 맑고, 서늘한 

상상력을 쑥쑥 뽑아 눕혀 놓고

무단을 묶으며, 바람에 휘날리는 마음도 함께 묶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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