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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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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요한의 봄날*에 칠하다 외 1편
그림에 빗줄기를 덧칠한다.
비에 젖은 나무의 그림자가 자라난다.
양산을 쓴 여자들의 드레스가 젖는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뭉크의 우울한 표정 위로 비가 내린다.
대접에 받아놓은 물이 마르도록 비를 칠한다.
붓 모毛가 몽당이 될 때까지 비를 칠한다.
푸른 색 지붕이 투명해질 때까지 비를 칠한다.
등 돌린 여자의 외로움이 가실 때까지 비를 칠한다.
내 가슴이 젖어들 때까지 비를 칠한다.
젖어든 나의 눈물을 찍으며 비를 칠한다.
상한 그림을 보고 뭉크가 ‘절규’한다.
*뭉크의 그림 제목 「오슬로 칼 요한의 봄날」에서 따옴.
상상적 청중*
―함박꽃
이른 아침 둘레길 걸으면
숲에 안긴 것들이 서로 인사해.
네 향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키 작은 이끼의 웃음조차 비웃음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몰아 벼랑으로 가는 것이 보여.
꽃잎이 지는 일도 네 잘못인양
네 속에 웅성거리는 상상적 청중을
즐겁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땅을 향해 피고 지는 네가 안타까워.
모두가 너를 쳐다보고 있다고
믿어 버린 뒤 언제나 고개 숙인 채
피워대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거든.
여러 개의 꽃송이 한꺼번에 피워
너보다 더 크게 너를 보이고 싶은,
깊은 산중에서 만나도 단박에 알아본 거야.
난데없이 둘레길 안개 속에서 수런거리듯.
*상상적 청중 : 과장된 자의식으로 인해 자신이 타인의 집중적인 주의의 대상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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