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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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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
눈많은그늘나비와 노파 외 1편
환한 아침 나비 한 마리 접시 위에 날아다닙니다 창밖엔 눈발이 날리는데 방안에는 나비들로 가득합니다
나비가 첫 번째 접시 위에 앉았습니다 날개를 팔랑거리며 접시 무늬를 따라 제비꽃 엉겅퀴 미나리아제비 수선화 산딸기밭 넝쿨 위를 날아다닙니다 명주실 같은 나비 다리 사이로 노파가 보입니다
접시 한 귀퉁이가 나풀나풀 가볍습니다 초록 이파리를 따라 아슬아슬 두 번째 접시로 건너갑니다 노파의 접시 위에 뼈다귀가 놓여 있습니다 나비 날개 위에 고기기름이 스며듭니다 돼지뼈인지 닭뼈인지 서로 물어뜯긴 채 뒤엉켜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 뼈에서 나와 노파에게로 날아갑니다 나비 날개가 노파의 광대뼈를 더듬는 것 같습니다 노파의 걸쭉한 침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기름진 입술을 핥습니다
나비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노파의 눈동자 속에 비칩니다 노파의 눈동자를 핥습니다 긁히고 지워진 무늬들 가득합니다 접시 가장자리에 바람이 일고 으름덩굴이 기둥을 타고 오르고 하얀 수국이 다발로 피어 있습니다
쌓이는 뼈다귀들을 떠받치느라 겹겹 꽃잎이 휘어집니다 접시 위에 비친 노파의 얼굴에 나비가 내려앉습니다 풀밭길을 걷듯 나비 발걸음이 경쾌합니다
노파는 여전히 뼈다귀를 뜯고 제 얼굴을 뜯고 접시를 뜯고 나비 날개가 뜯겨 나가고 창문에는 봄눈이 뜯겨나갑니다
검은 염소를 끌고 오는 여자
당신은 검은 염소를 끌고 비탈에서 옵니다
그때 씨앗은 땅속에서 터지고
나무 안에는 수액이 방울방울 흐릅니다
당신은 아침 해를 뭉텅뭉텅 떠메고 옵니다
그 육중한 몸이 하늘 한가운데서 나와
골짜기에서 바다까지 뻗어 있습니다
앞산 관목 숲이 햇살에 반짝입니다
물방울들이 이끼 더미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은 엉겅퀴 붉은 가시를 헤치고 옵니다
암초 위를 날아가며 시간이 긁히는 소리 들립니다
개울을 지나 돌 틈을 지나
호랑가시나무 숲 소리로 날아갑니다
당신은 떡시루 위에 올라가 작두를 탑니다
마른 댓잎으로 내 등짝을 내리칩니다
당신은 붉은 지붕 열려진 창문 너머
바람 소리로 울며 갑니다
산에는 새도 짐승도 사라졌습니다
춤추듯 눈이 내려 덮히고
둑에는 염소 우는 소리 자욱합니다
그 등에 기대어 바람 소리 듣습니다
골짜기 저쪽 어느 문간에서
누군가 짐승처럼 우는 소리 들립니다
이은∙강원 동해 출생. 2006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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