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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신작시/최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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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숙
G선상의 아리아 외 1편
트렌치코트 깃을 목덜미까지 올리고
G선 위에서 사는 여자가 있다네
그녀의 손은 너무 떨려서
가끔은 활을 잡을 수도 없지만
그녀의 아리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G선의 한 끝에 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첫 번째 악장을 연주하고 있네
느리게 활을 문지르네
가슴 밑바닥을 할퀴며
낮게 깔리는 선율을 타고
잃어버린 아이가 돌아오고 있네
현이 끊어지면 안 되네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아이는 영영 가버릴 지도 모른다네
가능하면 낮은 저음으로
현의 울림통을 자극해야만 하네
크리스마스에 흐르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G음에 묻힌 아이의 웃음소리
점점 가까이 들려오네
언 활을 들어 올려
붉은 핏줄을 깨우네
용솟음치는 피들의 향
아이가 그녀의 심장을 흔드네
이제 마지막 악장을 연주할 차례라네
오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오늘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외로운 바이올린 속에서 들리는
돌아온 아이의 따뜻한 노래
온 세상을 가득 채우네
不眠
밤새 헤아린 양이 몇 마리인지
침대 위에도 옷장 속에도 몽글몽글하다
잠을 자지 못한 밤일수록 그 수는 점점 늘어나
나중엔 방문을 열고 한 마리씩 거실로 내보낸다
온 집안에 양이 가득 찰 때쯤
제풀에 지친 나는
웅크린 태아처럼 풋잠이 든다
양 떼를 몰고 바람소리를 내며
몽골의 초원을 달리는 소년이 있다
어릴 때부터 말 젖을 먹고 자란 소년은
하루 종일 달려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소년이 몰고 온 몽글몽글한 양을
서로 사려고 다툰다
푸른 초원에서 싱싱한 풀을 먹은 양들은
점점 토실해져서
한 마리씩 내 꿈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또다시 밤마다 양을 센다
양 한 마리
……
양 백 마리
……
양 천 마리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양과는 달리 나는
날이 갈수록 얼굴이 파리해지고 기운이 없다
늦은 밤 혼자 깨어
양을 세는 일은 이제 그만하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밤이 늘어간다
몽골 소년의 말방울 소리가 들린다
오늘밤도 그는 먼 길을 달려와
내가 세어놓은 양들을 몰고
몽골의 초원을 향해 말을 달려 갈 것이다
최혜숙∙2007년 ≪시현실≫로 등단. 시집 <그날이 그날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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