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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정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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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기
창밖으로 낯선 기척이 흐르고 외 1편
창밖으로
안개들이 낯선 꿈으로 차올라
벽지 위로 뭉개진 벌레의 표정처럼 골목 안으로 스며든다
벽지가 되어 버린 개미의 영혼이나
고속도로에 몸을 바른 고양이의 온기 등등의 것들이 바로
우리가 배우고 익힌 익숙한 이미지들이다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상들이
네 가슴 위에 뭉개어 놓은 누군가에 대한 기억일 수는 없을까
붉은 연기로 재단한 겨울 코트 한 벌을 깁기 위해
닿을 수 없는 지구의 지붕, 가느다란 굴뚝 위로
빠져나가는 당신의 기척이여
창문 넓이만큼의 내면이 나에게도 있다면
저 도시의 풍경이 내게로 파도치게 할 수 있을까
저마다의 자리에서 몸을 뒤트는 건물들이
붕괴의 의지를 가지고 반짝반짝 번져오면
나는 입김을 호, 호, 불어가며 닦아낼 것이다
창밖으로
죽은 것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당신의 수면 위로 파장을 일으키며 가라앉는 돌멩이들이
안개 속에서 달그락거리고
겨울밤 조용히 다녀가는 유리창 위로
입김을 호, 호, 불어가며 닦아내도
얼굴을 부비며 사라지는
당신의 기척
취한 별
별빛에 취기가 흐른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라 외로움이다
틈을 벌리며 볼록 솟아오르는 보도블럭을
뒷꿈치로 애써 밟아 눌렀다
누군가 불규칙함에 매혹되어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가로등 밑에서 대책 없는 하나의 성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너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수줍은 발기밖에 없다는 사실
별빛이 남쪽으로 흘러내려 해안선을 따라 물들고
파도 속에서 구르는 자갈과 함께 너는 적도 쪽으로 휩쓸렸다
네 혀는 미역처럼 끈적거리며 내 귀에 달라붙었지만
나는 그렇게 너를 태평양에 가두어 버렸다
네 무덤이며 동시에 나의 죄인 저 바다를 감당할 수 없기에
나는 매일 밤 서둘러 북진했다
밤하늘과 함께 휘청거리는 별을 따라
북쪽의 어느 한 점에서 뜨거운 열로 녹아내리는 취한 별,
별빛이 반짝 거린다
정은기∙충북 괴산 출생. 2008년 <한국일보>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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