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3호(가을호)/신작시/이정민
페이지 정보

본문
사막의 병동 외 1편
머리맡에 걸린 수액이 멈춘 발가락 끝까지 가는 동안 그는 붉은 선인장 꽃처럼 열에 오른다 1601호, 여자가 더듬거리며 부르는 사우디 민요 창밖으로 태풍이 오고 있다
둘째 주 수요일마다 오던 우편배달부 반송된 우편물처럼 그는 구트라를 입고 돌아왔다 사원이 있는 나라에서 그가 평생을 지어올린 불충한 믿음 웃는 목청 뒤로 꺼끌한 모래바람이 불었다 무릎이 짓무른 낙타는 아직도 걷고 있었다
병실에서 귀지를 파는 그의 곁에 앉아 고무나무 껌을 씹고 있을 때 바람이 지나갔다 열어놓은 창으로 햇빛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아직 태풍은 도착하지 않고, 그의 좁은 구멍에서는 뭉친 모래 같은 것이 깊숙이 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열에 들뜬 선인장나무가 고통의 신음을 흘린다 오래된 히브리어로 외우는 코란 야훼는 붉게 달아오른 호출버튼처럼 病을 방관하는 중이다
좀이 슬어버린 구트라는 버려졌지만 낙타는 아직도 텁텁한 모래사막을 성지 순례하듯 걷고 있는 중이다 病 속, 태풍이 오는 사막의 병동 잠든 낙타의 길을 가늠할 수 없다
죽은 고양이에게
어린 아이들이 목련 나무 곁에 모여
죽은 고양이를 구경한다
목련잎이 떨어지는 일을
아쉬움 없이 바라보는 목련나무는
봄볕 가득한 고양이의 잠을 들여다본다
발톱 세운 꿈을 꾸는 동안
고양이는 뻣뻣한 다리를 쭉 내밀고 있다
나무뿌리를 베고 잠든 순한 짐승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무는 죽음을 모른다
나른하게 부패되어가는 봄잠
뿌리를 달싹여도 일어날 줄 모르는
죽은 고양이 옆으로 목련 잎 떨어져 갈변한다
구더기가 들어찬 뱃속이 날숨과 들숨을 내뱉고
목련나무 옹이마다 따뜻한 바람이 들어찬다
듬성듬성 빠진 털들이 화단에 앉았다가 날아간다
아파트 경비원이 다가와 쓰레기통에
죽은 고양이를 밀어 넣기 전까지
나무는 물음표로 한 겹의 나이테를
더 밀어 올리는데, 끝내 모르겠다는 듯
목련잎 하나가 더 떨어진다
고양이 실은 쓰레기차 지나간 자리
한 줄로 흘린 봄이 골목에 멀리 놓여있다
나는 발자국 하나씩 밟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정민∙2010년 ≪미네르바≫로 등단.
- 이전글43호(가을호)고창수의 영역시단/남태식/고창수 11.12.31
- 다음글43호(가을호)/신작시/정은기 11.12.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