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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아아, 나는 아무데도 없는 것인가. 너와 같이?-김구용 시 산재/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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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22회 작성일 11-12-3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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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시 깊이 읽기/아아, 나는 아무데도 없는 것인가. 너와 같이?김구용 시 산재/김경인 

 

산재散在

김 구 용

1.

나아갈 수 없는 일보一步,물러설 수 없는 일순一瞬! 이 석경石鏡에는 퍼렇게 녹슨 철선이 엉클어져, 그 너머 부서진 벽돌들의 참혹한 시가市街를 배경하고, 표정도 없는 나의 얼굴이 비쳐지다. 이익으로 축복된 조화造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부엌터를 지나 무너진 장독대로 돌아나가면 강제와 복종에 의하여 어느 동심童心에서 잃어진 인형 위에 평화의 태양은 녹음과 황앵黃鶯의 노래를 나타내고 있었다. 죽음은 어리석은 자의 빛나는 신앙! 성은 지난날 무희들도 이해하던 취미였다. 나의 중심은 폐허에서 존재에의 가능인 현존이 전부!나도 모르는 그 누구의 탄

환인가, 또는 유탄인지! 파열하는 석경 앞에서 나는 피할 것을 의식적으로 단념하다. 조각들이 난 나의 전부는 조각마다 명멸하며, 무수한 각도에서 대소원근大小遠近! 무수한 생각의 위치로 산재하여, 거울 조각들은 눈을 반짝이며, 모든 의문의 시선을 나에게 집중하다. 초목 사이에 쓰러진 광경의 착잡錯雜, 정신적 율격律格의 이상理想도 타버린 파옥破屋들 위로 구름이 깊은 하늘 아래서 굶주린 창서蒼鼠들이 공포를 잊고 구석마다 널려 있는 시체를 씹고 있다. 과연 너는 생사의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아 나는 아무데도 없는 것인가, 너와 같이……

2.

외계外界와의 벽이 떨어져 나간 나의 뒤에서 석경石鏡이 없어진 내 정면의 양식樣式에 강렬한 일광日光으로 또 하나의 투영이 내 그림자에 합치하다. “여봅시오. 사회社會가 여기서 아직도 멉니까.”어두우 적막에 파문을 일으킨 음성은 틀림없이 내가 미소와 근로와 풍년에서 서로 사랑했던 너에 대한 추억의 소생이건만 그러나 너는 아니었으며, 동물보다도 추악한 맹목의 노파가 나뭇가지를 민감히 짚고, 눈물이 글성글성하여 서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나의 물음을 듣자 “아들을 찾는다오.”하고 노파는 처절한 가두街頭가 돌연 다시 살아난 듯 밝게 웃더니 “꿈에도 모두가 철조망이드군요”하고 염불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나 나의 대답이 없자 노파는 산재한 와륵瓦礫* 사이를 묘하게 비켜가며, 염열炎熱한 대기 속에 타버리듯, 아득한 저 멀리 조그만 흑점이 되어 그 자신의 희망처럼 사라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잃었던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다. 헤아릴 수 없는 심연! 나의 거울 조각들 안으로 더 침몰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사물을 말할 수 있음은 자아에 충실하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견해를 잃은 기계가 되어 스스로 비바람에 돋는 독을 참을 수 없어 다시 부정과 긍정을 되풀이하다. 하루면 천만 번도 더 되풀이 하는 나의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이 변함 없는 음영陰影이 움직이고 있다.(1953)

 

 

 

1950년대 시사에서 김구용은 개성적인 면모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난해성의 장막’(김수영)이라는 비판 아래 논의가 유보되어 왔다. 그의 시에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라는 양 구도로는 짚어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주제와 시의 형상화 방법이 혼재되어 있다. 전쟁과 매춘, 기아 등의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제 문제에서 촉발된 현실적 주제를 담으면서도 수금과 주체의 분열 등 실존적 문제를 몰두하기도 하며 후기시에서는 불교적 인식론에 근거한 무아사상 등 동서철학을 아우르는 사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1950년대에 한정하자면, 그는 형식면에서도 환상을 기반으로 하는 극적 형식의 도입, 소설과 시의 경계를 허무는 장시의 창작, 의미망을 벗어나는 환유적 기법, 데뻬이즈망 기법 등 미적 모더니티의 극단을 보여주는 한편, 게송형식의 시를 창작하는 등 동양적인 사유체계를 시로 형상화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1950년대 그가 보여준 시세계는 전후 모더니즘의 미학적 경향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후반기’동인을 중심으로 한 전후 모더니즘 1세대들이 선명한 이미지와 영상적 기법에 몰두한 데 비해 김구용은 파편적 서술, 주체의 분열과 소멸, 환상의 서사 등 그들과 다른 지점에서  미적 모더니티를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1949년 ≪신천지≫에 시 「산중야」, 「백탑송」을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된다. 한자로 된 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형적 형식에 의거한 순수 서정시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전쟁을 거치면서 천애고아가 된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시세계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는 「눈은 자아의 창이다-시를 위한 노트」(1957)에서  전쟁을 거치면서 정형시 대신 파격적인 산문성을 채택하게 되었고, 의도적으로 난해하게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성중심주의와 합리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단정한 미적 형식으로 담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50년대 시사에서 모던한 경향을 떠올릴 때, 우리는 가장 쉽게, 또 흔히 ‘후반기동인’의 작업을 생각하곤 한다. 세계에 대한 산책자로서의 시선을 견지하며 한 손에는 럭키스트라이크와 다른 한 손엔 카메라를 든 모더니즘 1세대들이 선명한 이미지와 영상적 기법에 몰두하였다면 김구용은 ‘굶주린 창서蒼鼠들이 공포를 잊고 구석마다 널려 있는 시체를 씹고 있’는 전후의 폐허에 앉아 시를 쓴다.

‘창서’는 일반적으로 곳간에 있는 쥐를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창고 창 대신 푸른 창을 쓰고 있다. 푸른 쥐 떼가 공포를 잊고 시체를 파먹고 있는 풍경은 정말이지 너무 끔찍하다. 그런데 왜 ‘푸른’색일까? 희망의 이미지로 많이 동원되는 ‘푸른’의 색채 이미지조차도 그의 시에 와서는 마치 시체의 살빛과도 같은 죽음의 푸른색으로 침잠한다. 동시대 작가인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에서는 배고픔에 지쳐 쥐를 먹는 눈 먼 노파(‘누혜 모’)가 등장한다. 배고픔에 지쳐 쥐를 잡아먹는 인간의 모습이나, 공포를 잊고서 시체를 뜯어 먹는 푸른 쥐 떼의 모습이나 모두 몸서리치게 참혹하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 후에, 가장 마지막으로 ‘인간성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그로테스크함을 김구용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끌어당겨 정면 돌파하는 시인은 많지 않다. 동시대 시인인 전봉건의 시에서도 전쟁체험은 짙게 묻어나지만, 전봉건은 서정적 환상으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그러나 김구용의 시는 현실보다 더 그로테스크하다.    

위 시 「산재散在」는 그의 시 중에서 비교적 쉽게 읽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연의 서사(아들 잃은 노파와의 만남)를 제외한다면, 이 시 역시 읽기가 녹록치 않다. ‘외계外界와의 벽이 떨어져 나간 나의 뒤에서 석경石鏡이 없어진 내 정면의 양식樣式에 강렬한 일광日光으로 또 하나의 투영이 내 그림자에 합치하다.’와 같은 문장에서 독자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한자도 많고, 비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김구용식의 매력이다. 이 문장은 ‘홀로 서 있는 내게 강렬한 햇빛이 남긴 빛이 내 그림자에 와 닿는다’정도로 단순화할 수 있다. 위의 문장은 어딘가 과잉되어 있는데, 그 과잉은 주체의 분할(나의 뒤/내 정면의 양식/또 하나의 투영/내 그림자)에서 연유한다. 사실 그것을 제외한 시적 풍경들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명확한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외부 풍경을 실존의 영역으로 치환하고 그 풍경이 환기하는 내적 인식과 정서를 바탕으로 풍경을 재배치한다. “단 한 줄의 문장에도 精神力이 浸透되어 있는 事物의 作用”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시작법은 사물에게서 추상적 관념(정신력)을 뽑아내고 그 관념을 사물에게 투사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즉, 풍경을 묘사하는 시라 하더라도 그 풍경은 내면을 통과한 풍경이 된다. 그래서 한 행과 다음 행은 일관성의 영역으로 묶이기보다는 의식의 흐름 아래 돌발적으로 구성된다. 즉, 한 편의 시는 추상적 사유를 중심으로 하여 풍경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된다고 할 수 있다. 

위 시 「산재」에는 전쟁이 드리운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다. 시인의 철학적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실존적 고민(‘나는 누구인가’)이 전쟁체험과 마주한 후, 자신이 산산히 부서진 거울조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에 가 닿고 있다. 이 시에서 ‘전후의 한국사회’라는 구체적 현실이 시인에게 드리운 절망감은 ‘갇혀있음’의 상황으로 형상화된다. 실종된 아들을 찾는 노파는 내게 묻는다. “여봅시오. 사회가 여기서 아직도 멉니까” 노파는 실종된 아들을 찾으면서 “꿈에도 모두가 철조망이군요”라고 말한다.

모든 세계가 철조망이라는 것, 나는 그 안에 갇힌 수감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인형’혹은 ‘작동하는 기계’임을 알게 되는 것. 노파를 만난 후 나는 “반사적으로 잃었던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견해를 잃은 기계”가 되어 “부정과 긍정을 되풀이한다.”

김구용 시에서 주체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유리, 거울, 그림자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특히 유리창/거울 이미지는 자아의 이중성과 복수성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의 시 도처에서 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자주 반복된다. 말하자면 “나를 돌려달라”로 요약되는 주체의 요구는 더 근원적인 질문, 즉, “무엇을 돌려달라는 거냐”를 낳는다. 김구용 시에서 주체는 이 “무엇”이며, 그 기저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내 본시의 고향”(「꿈의 이상」)이라는 인식이 깃들어 있다.  

전문을 실을 수 없기 때문에 포기했지만 사실 김구용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시편들은 「소인消印」을 위시한 장편들이다. 그의 시집 시(1976)에는 단편소설 분량을 능가하는 시편들이 실려 있다. 편의상 장시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 시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서사가 명확하고 분량이 길다. 그런 한편 상징성과 풍부한 시적 비유가 흘러넘쳐 소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 장시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하는데 그는 환상과 실재가 뒤섞인 공간을 배경으로 산문적 언술을 통해 전쟁에 의해 훼손된 현실과 그 안에서 부유하는 주체의 소멸을 그려낸다. 김구용적인 매력이 가장 잘 응축되어 있는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한 묘사, 불구의 섹스, 조금의 희망도 깃들지 않는, 절망의 바닥에서 주체는 돌아올 수 없는 편지의 소인처럼 사라진다. 「불협화음의 꽃·Ⅰ, Ⅱ」, 「꿈의 이상」, 「소인」, 「무상의 모태」, 「벗은 노예」, 「과정」 등은 소설적 플롯과 서사를 지니는 한편 시적 긴장과 묘사를 견지함으로써 시와 소설의 양 극단을 서슴없이 종횡무진한다. 이 시편들에서 김구용은 전쟁의 한복판에 놓인 고아나 매춘여성들을 작중인물로 등장시킨다. 그들은 “매음으로 한동안 병든 남편과 어린 것을 부양”(「불협화음의 꽃Ⅰ」)하는 부인이며, “아내는 바로 그의 생존”이기에 “분노와 비애는 꺼졌다”고 말할  밖에 없는 남편이며, “길거리에서 파는 물품 중에는 물빛 실버텍스도 있는” 매음소녀(「무상의 모태」) 등 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다.

시인은 추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하면서 일상적 세계가 감추고 있는 잔혹성을 폭로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들이 다양한 오브제와 결합한다. 그는 전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배경으로 하여 꿈과 현실을 교차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극적 형식으로 드러낸다. 그의 장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그의 환상이 갖는 특이점이다. 그의 환상은 전후의 참담한 현실을 바탕에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이 증발된 가상의 세계를 선보인다는 데 있다.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현실의 논리 위로 범람하는 환상의 세계는 그의 시가 보여주는 현대성의 징후이다. 어찌 보면 그의 시는 앞으로는, 1930년대의 이상이나 삼사문학계의 초현실주의적 모더니즘과 연관되며 후로는, 2000년대 이후의 ‘환상서사를 중심으로 한 장시’의 출현을 예감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모던함을 넘어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나는 가끔, 고전적 세계와 또 한편으로는 첨단적인 포스트모던한 세계에 걸쳐 있는 그가 시작 내내 경험했을 외로움을 생각해본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라는 엄청난 넓이와 깊이를 가진 그의 세계는 현재 어떻게 드러날까?  보다 정밀한 분석이 따라야겠지만 조연호의 「농경시」를 읽으면서 나는 언뜻 김구용적 세계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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