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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기획 젊은 시의 징후를 찾아서/ 정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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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84회 작성일 11-12-3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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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1 외 1편

   ―구제역口蹄疫

 

 

이상한 겨울이었네. 이상고온으로 일찍 핀 꽃들은 당황하며 녹아내리고 짐승들은 포크레인의 기계음에 축사의 한 구석으로 봄볕처럼 숨어들었네. 모든 일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네. 전염병은 노련한 우체부처럼 두 발굽의 동물들만을 찾아 방문했고 뉴스에서는 연일 가축들의 안전선을 확인시켰지만 탄식은 뒤늦은 방역처럼 곳곳에서 터져나왔네.


밤을 틈타 모든 것이 이루어졌네. 살육은 최대한 단순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네. 중계는 생략되고 숫자들만 무감감하게 점점 불어났네. 컴컴한 어둠 속에 가축의 울음소리만이 축축하게 마블링처럼 새겨졌네. 달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었네. 구름이 마음 여린 달의 눈을 가려주었네. 유난히 구름의 몸이 뜨끈하게 젖은 밤이었네.


목격자들이 간혹 있었네. 그들은 목격담을 눈물로 대신했네. 가쁜 숨결의 끝에선 구토의 여운이 남아 있었네. 두 눈 있는 자들은 장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네. 두 귀 있는 자들은 귀머거리가 되고 싶었다고 했네. 작업등 아래 깊은 구덩이 속에 가축들은 순서대로 차곡차곡 관물 되었네. 살아서도 죽어서도 너른 들판에서 뛰어논 적이 없었네. 살과 살을 맞대고 울부짖었네. 항생제 대신 직감이 적당한 순간에 발휘되었네.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알아듣는 자들은 없었네. 공포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때라는 것만이 확실하게 느껴졌네.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들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병명을 진단받았고, 우리는 구제역이 여성들의 치마길이를 짧게 한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네. 그리고 어느 봄날, 매몰된 기억의 저편에서 그 겨울의 영상이 불쑥 튀어나왔을 때 눈물이 무슨 침출수처럼 솟기도 했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2

   ―코끼리 혹은 김진숙

 


 남아프리카의 수컷 코끼리 떼가 코뿔소를 대상으로 린치를 가했다. 코뿔소를 대상으로 한 집단 윤간도 이뤄졌으나 동물의 윤리적 범죄를 대상으로 한 법은 없었으므로 이들을 처벌할 근거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발음은 어렵지만 친숙하고 쉽게 납득이 가는 병명으로 진단했으며 코끼리들의 불행한 유년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들은 죽은 어미에게 다리가 묶인 채 서식지에 감금되었으며 동족의 떼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모든 것이 생태계의 균형을 위한 개체수 조절이라는 명분 아래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조조정이란 얼핏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 면죄부인가. 그러나 코끼리가 겪을 충격과 분노를 가늠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 코끼리의 코를 닮은 영도의 85호 타워크레인, 공장의 개체수 조절에 반대하며 긴 밤을 아득한 꼭대기에서 보내는 여자, 8년 전 동료가 몸을 던진 곳에 스스로 몸을 묶어 두고, 노동자의 떼죽음을 목격하고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소금꽃 결정 같은 순백의 말들을 트윗하며 휴대전화를 목숨처럼 움켜쥔 채 스스로의 높이를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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