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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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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반숙 외 1편
사랑은 계란 반숙이다
제대로 익지 못하면 껍질에 달라붙어
슬쩍 가버리는 이별처럼 허황하다
한순간 감정이 휘청거려도
처음부터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빛깔에 속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사랑이 미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고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탐색이다
아무리 달콤한 수식어를 늘어놓아도
서둘러 익힌 것은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자존심과 경계의 온도를 적당히 조절하며
천천히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쪼그라들었는가 싶었는데
여전히 팽팽한 것이 사랑이며
갑자기 냉기가 온기로 바뀌는 변덕이 사랑이다
하지만 단단하지 못해 물러터진
당신의 마음이 타이밍을 놓친다면
사랑이 완숙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길에 대한 상상
―잉카를 가다
더러 기억을 놓치고 싶을 때라야 내 안에서 들끓는 말을 가만히 가슴 한 구석으로 밀쳐놓게 되는 것처럼, 햇살도 타오르는 불꽃에 한 번 나뒹굴어 본 뒤라야 얌전히 석양 속으로 건너가는 법이다 내 기억도 그렇다 녹음테이프처럼 바쁘게 돌아가다가도 가끔 어딘가에 걸려 멈춰 있을 때, 나는 내 팔자 같은 지그재그의 길을 따라 잉카로 간다 꿈의 요새를 찾아가듯 곡선으로 가는 길이 어쩌면 먼저 간 전생이 나를 끌고 갈 길인지도 모른다
푸른 숲과 무거운 체통의 집들이 하늘에 걸려 수 세기를 보내는 동안 잠잠하기만 했던 안데스 산맥의 비밀처럼, 잉카의 길은 내게 묘한 상상을 갖게 만든다 내가 빌카밤바에 남겨진 어둠의 부호를 모르고 그 어둠 속에 떠도는 굴욕의 밤과, 에스파냐의 먹이로 전락했던 잉카의 슬픔을 모르는 것은 마추픽추의 숲과 하늘이 원래 한 통속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고 오는 세상이 거래하는 건 욕망이다 욕망은 세상 모든 길을 만들었다 누군가의 입술이 떨며 사랑을 고백한 숲에서 고요가 다시 뼈로 환생하기 위해 저리도 오래 침묵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 내 욕망을 갈아엎을 궁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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