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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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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이다 외 1편
―CCTV
집을 나오는 순간
나는 죄인이 된다.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도
가는 곳마다 카메라들이
찰칵 찰칵 찰카닥 찰칵
나의 행로를 찍어대니까
일망타진에 걸린 나는
영락없는 죄인 같다.
너무 큰 꿈을 꾸다가
밤이면 가위에 눌리는 무서운 꿈속처럼,
가는 길목마다 떡 버티어 서서
온종일 시퍼런 눈을 뜨고
찰칵 찰칵 찰카닥 찰칵
찍어대는 저 카메라들 때문에
나는 한낮에도 가위에 눌리곤 한다.
죄인처럼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지만
누군가는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고
미필적 죄인 취급을 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는 것이다.
하기야 털어 먼지 안 나는 이 없다는데
저 나무나 풀이나 꽃처럼 고요히 설 수 없다면
어찌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죄인이다.
집에 들어와서도 이제
죄인이 된다 나는 꼼짝없이
죄인처럼 갇히고 마는 것이다.
약탈과 건망증
1.
지난 가을 앞산 산책길에 “짐승들의 먹이이니 도토리 알밤들을 주워가지 마시오.”라고 적힌 현수막의 경고를 무시하고 밤나무를 털어 주워온 알밤들, 날로 까먹거나 쪄먹고도 남은 것들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깜빡 잊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발견했으나 밤마다 벌레들이 들어앉아 성한 것이 하나도 없더란다.
2.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에
해마다 무수한 알밤이 떨어지는 데도
온 산이 밤나무로만 뒤덮이지 않는 것은
다람쥐들이 알밤을 주워 먹기 때문이라지.
가을에 다람쥐들이 알밤을 다 주워 가는 데도
해마다 새 밤나무들이 자라 대를 이어가는 건
여기저기 겨울 양식으로 갈무리해 둔 알밤들을
다람쥐들이 모두 다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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