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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박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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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고니아 외 1편
그러니까 베고니아 세 대가 나란히 꽃을 보시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 3층 아주머니
허리 숙여 꽃잎에 눈길을 주고 있다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더 대우를 받고 있는 나무
시장바구니가 꽃향기에 취했는지
화분에 살짝 기대어 있다
위층 아저씨의 벗도 되었던 걸까
타다 만 꽁초가 지난밤 못 다한 이야기로 뒹굴고 있다
안과 밖 그 사이에 서 있는 베고니아
아직도 낯가림을 벗지 못한 탓인지
말없이 경계를 허물며 붉어진 가지마다
연분홍 꽃들을 피워내고 있다.
다른 곳에서 꺾어 와 키웠다며
단골 분식점 그녀가 김밥 썰 듯 분질러 준
베고니아, 꽃잎처럼 머뭇거리는 3층 아주머니에게
나도 그녀가 되어 베고니아를 건넨다
꽃나무의 나무의 나무는 맨 처음
꽃씨가 아니라 꽃이었을 게 틀림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으나 나는
그런 꽃씨가 틔워 놓은
나무의 나무의 나무의 꽃이 그리웠던 것이다.
물로 보다
일을 하다가 좀 억울하다 싶어
혼자 씩씩대다 일러바치듯 하소연 하였더니
임마, 너를 물로 보고 그런 거야, 한다
지나도 한참 지난 유행어
뭘로 보고 그런 거야가 아닌 물로 보고 그런 거야
나를 물로 보고 그랬다는 말이
내 몸에 들어와 혈관을 타고 흐른다.
내가 물이었다는 걸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 안에도 계곡 하나쯤 있어
계곡을 흐르는 맑고 투명한 물속으로 얼비치는
피라미나, 어치, 가재들이
물살의 흐름에 노닐고 있다가 그의
눈빛에 그대로 투시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를 물로 보아 준
그가 어여쁘게 보이기 시작한 거다.
나는 그를 물로 볼 수 있는 투시력을 갖지 못해도
내가 그에게 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때서야 조금씩 행복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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