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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신작시/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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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태풍 외 1편
신문은 아직 배달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현관문이 빡빡하지? 러닝셔츠 바람의 남자가 라디오 볼륨을 키우면서 복도를 지나간다
허리가 쇠꼬챙이처럼 꼬부라진 옆집 할머니 문고리에 팔을 매달고 얼굴만 빠끔 내밀었다 고양이처럼 눈만 살아서 사람 냄새에 코를 킁킁, 한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데 새벽 다섯 시 십육 분 정전, 냉장고는 서 있는 관처럼 묵묵하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캄캄 중에도 집안 구석구석 환하다
누구네 집 유리창 터지는 소리 들린다
보인다, 허공의 멱살을 쥐고 질주하는 회오리바람 물먹은 하늘과 땅 진흙처럼 물렁해져서 삽시에 뒤집어졌다 여전히 잠든 사람은 잠을 자고 내 두 팔은 지렛대처럼 휘어진 창틀 베란다 유리문을 받치고 선다 낯선, 낯익은 내가 힘껏 한 세상을 버티어 보는 것이다 으흐흐…, 오늘이 세상 끝일 수도 있겠다
순간, 한 쪽 눈 감았다
프레임 속의 세상은 소리가 없다
카메라의 렌즈는 한 장면에 골똘하다
시선과 시선이 불꽃처럼 마주칠 때
본능은 내 한 쪽 눈을 닫아 건다
온전히 한 곳을 집중한다
밤과 낮 팽팽한 지구의 시간처럼
문 닫아 걸면
또 하나의 문 열리는 걸까?
태양의 정곡은 눈을 감아야 보이는 법이라는데
한쪽 눈 감아서 초점 맞춘다
그것은 문 닫고, 문 여는 일
캄캄해진 그 자리 마음의 눈 떴다
흑암에서야 환하게 보이는 저기,
모르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다
250분의 1초, 빛이 터지는 찰칵,
시선은 인화지 밖으로 빠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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