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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책 크리틱/시에 유배된 꿈을 향해 던지는 슬픔의 미학적 구조—손현숙, 김태형 시집 읽기/허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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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88회 작성일 11-12-2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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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호(여름호)책 크리틱/시에 유배된 꿈을 향해 던지는 슬픔의 미학적 구조—손현숙, 김태형 시집 읽기/허금주



1. 미의식의 근원으로써의 벼랑과 사막

시는 다져진 응어리이다. 더는 작아질 수 없는 단단한 수축이다. 눌러진 용수철 같은 것이기에 언제나 퉁겨나고 팽대하게 늘어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넓이와 길이를 간직한 웅숭깊은 수축이 곧 시다. 시가 웅숭깊게 지니고 있는 넓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좁은 동굴을 들어서서 굽이굽이 돌아 나가면 열리는 그 넓고 깊은 세계에서 오는, 아니 오고 있는 울림은 어떻게 울리기 시작한 것일까.

익숙한 농부들은 수박껍질을 가볍게 두드려 보는 것만으로도 그 속을 헤아릴 줄 안다. 속의 익었음이, 속이 차고 알이 배었음이 거죽에 품겨 있는 것은 수박만이 아니다. 소리와 낱말, 낱말과 낱말,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여러 징표와 징표 사이의 매듭, 그리하여 매듭끼리가 얽혀서 이루는 그물 같은 연관, 그것이 시로 하여금 넓이를 갖게 한다. 또한 그 넓이란 잘 드러나지 않는 안개에 싸인 것과 같은 깊이를 갖게 된다. 시에 담긴 말들은 겉으로 말하지 않는다. 저희끼리 서로 어울리는 속말들을 주고받는다.

오늘날 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생태시, 농촌서정시, 존재론적 시, 민중적 서정시, 도시서정시, 해체시, 국토기행시, 종교시 등 수많은 종류의 시들이 우리 시단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들 시 중에서 가열찬 시정신을 통해 시적 진실을 확보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우리 시대를 ‘시가 부재하는 시대’라고 하는데, 이 모든 책임은 현실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진실을 방기하는 시 그 자체에 있다.

손현숙의 시집 <손>은 감각의 둥지를 벼랑에 둠으로써 온몸의 전체 감각으로 시적 진실을 확보하고 있고, 김태형의 시집 <코끼리 주파수>는 모래가 되어버린 삶을 붙잡기 위해 모래바람 부는 사막에 자신의 삶을 구겨넣어 부재중인 당신의 말을 찾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시를 써야 하는가.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사물, 즉 그 대상과 조우한 시적 주체에게는 미의시의 근원을 사유하는 시선이 생성된다. 무언가 강렬한 빛에 견고한 구조가 깨지는 상황에 대한 경험은 시인이라면 행복한 경험인 것이다. 그것은 사물에 시적 의미가 부여되면서 시의 공간에 동시적으로 현시된다. 사물이되 사물이 아니고 보이되 보이지 않는 역설은 여전히 이 세상을 사유하는 근본적 개념이다.


2. 손현숙의 벼랑, 그 내밀한 풍요


 산으로 가는 길은 참, 여러 갈래다 길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길을 가면서 겨우 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곧바로 올라가는 길은 몹시 가파르다 나는 주로 급하게 치고 올라가는 지름길을 택한다 혼자 오르는 산길 흠뻑 땀에 젖으며 한 발짝씩 산의 뿌리를 빨며, 당기며, 숨가쁘게, 정상을 향해 간다


 누구도 손잡아 도울 수 없는 벼랑, 아슬아슬 딛고 선 이 자리가 지금 내가 사는 중심이다 나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나에게 집중하는 이런 지옥이 좋다 창밖을 본다 저기, 저 바윗덩어리, 인수봉이 나를 향해 불끈 몸을 세웠다 나는 간절히 나를 끌어 올린다 격렬하게 갈기를 세우며 마침내, 내 몸은 한 외간남자를 통째로 깊숙이 삼켜 버린다

―「그 남자」 일부


인간은 일견 무잡해 보이면서도 스스로 자정自淨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이 일련의 흐름에 잇대고 잇대어 인간은 확장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리라. 시인의 “누구도 손잡아 도울 수 없는 벼랑”은 생이 닿을 수 있는 극지를 드러내 보인다. 부끄러움도 표정도 없는 더 이상의 추락이 허용되지 않는 곳, 그래서 한동안 더듬더듬 기어다니며 삶이 아닌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록 지옥과도 같은 벼랑에서 자신의 몰골은 초라하더라도 “간절히 나를 끌어 올리”는 그래서 “내 몸”이 “한 외간남자를 통째로 깊숙이 삼켜 버리”는 신명어린 생의 경험을 얻어 낸다. 마음이 신체를 관통하는 에로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자연에도 제어하기 힘든 정념의 흐름이 상호조응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신명의 길은 혼자여야 한다. 삶이 완성되지 않는 것이라면 삶에 대한 사유도 힘들고 지쳐 쉴 수는 있어도 완결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해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한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의 눈은 오래 열려 있어야 하는 거다

보이는 것 말고도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저 속의 내막을 뼛속까지 읽어내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다

―「맞서다」 일부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넣”기 위해서 시적 주체는 “집요한 애무”로 맞선다. “아름다운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여 “알 수 없는 바람의 등(「이상한 동거」)”을 타야하고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배를 기다리며 “난 짐을 싸야(「이상한 동거」)”하지만 역광을 거슬러 애무를 거듭하며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아름다운 당신”을 담아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랑은 없다」라는 허기의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맞서는 “오늘은 내가 그를 부수고 내일은 또 그가 나를 허물어/부지런히 서로 먹고 먹히면서 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궤도를 돌아/우리, 갈 데까지 가볼까?(「먹이」)”라는 역동적 시적 표현을 얻게 된다.


위험이 내는 길은 싱싱하다

북한산 염초, 만경 하루에 치고

하산하는 길, 산이 출렁 땅이 빙빙 돌고 돌아

팔다리 제멋대로 흔들리며

내가 산이고 땅이고 바람이다


빗방울 한두 방울 묻어나는 골짝

비구름과 한바탕 뒹굴어도 보고

바람의 나라에선 머리칼 뿌리째 흔들렸다

절벽길 붙들어서 벼랑 꽃하고 눈맞았을 때

아찔, 천 길 낭떠러지가 지척이다


지금 실컷 살다 가는 거

일하고 웃고 떠들어 난장 치면서

흑암을 꿰차며 사라지는 유성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몽땅 탕진하는 거

피를 화끈 돌려 보는 거


살아 있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바닥 치면서 저기, 궁창에 흐르는 말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 여기서 당신하고 눈 맞추면서

미끄러지면서 슬픈, 기쁜, 오늘

한판 잘 붙어먹었다

―「광대」 전문     


선사시대에 수행된 의식 속에서 광대는 희생이라는 관념을 상징하게 된다. 광대는 흔히 즐거운 일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말하며, 고통스러운 대상에 대해서는 농담조로 말한다. 난쟁이처럼 비정상적인 존재나 불구적인 존재는 광대와 동일시되거나 광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프레이저Frazer는 B.C. 6세기경 소아시아 지방에 존재했던 다음과 같은 의식에 대해 말했다.

페스트, 기아, 혹은 다른 재난이 도시를 휩슬게 되면 추한 인간이나 불구의 인간을 뽑아 도시를 휩쓰는 악을 퇴치하는 일이 부과된다. 그는 적당한 장소로 나가게 되며, 그의 손에는 마른 무화과, 보리빵, 치즈가 주어지며 그는 이것을 먹는다. 그러고는 사람들은 무화과 가지로 그를 일곱 번 때린다. 그러는 동안 특수한 곡조의 피리 소리가 연주된다. 그후 그는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진다. 그리고 그의 재는 바다에 뿌려진다.

이처럼 열등한 인간이 고통과 희생에 의해 우월한 존재로 자신을 승화하는 방법을 암시한다. 광대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 나아간 곳에서 다시금 인간의 세상을 만난다. 그녀가 빚은 우주로서의 시편들은 광대의 역동적인 몸짓을 펼쳐 보이며 벼랑의 신명 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삶을 향한 가능성의 우주를 내장하는 것이다. 


3. 김태형의 사막, 디아스포라의 도정

김태형은 서울이라는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타를 연상케 한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자신을 황폐스러운 내면을 가진 자로 간주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토록 삶에 지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그는 낙타처럼 등을 구부린 채 메마른 도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사막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는가에 관심이 있다. 

김태형 시인은 시적 직관의 렌즈를 통해 몸의 소리를 포착한다. 몸은 생명의 기가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을 통해 형성된 통합체이다. 어느 한 부분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 연속성이 파괴되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몸의 측면에서 보면 불연속성이란 곧 죽음의 문맥을 거느린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존재 혹은 자아가 충돌하면서 내는 그 실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말라붙은 아카시아나무숲과 흰 구름 너머

수 킬로미터 떨어진 또다른 무리와

젊은 수컷들을 찾아서

코끼리는 멀리 울음소리를 낸다

팽팽한 공기 속으로 더욱 멀리 울려퍼지는 말들

너무 낮아 내겐 들리지 않는

초저음파 십이 헤르츠

비밀처럼 이 세상엔 도저히 내게 닿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 있다

그 부르는 소리마저 이젠 들리지 않게 된 걸까

나무껍질과 마른 덤불로 몇 해를 살아온 나는

그래도 여전히 귀가 작고 딱딱하지만

들을 수 없는 말들은 먼저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걸

몸으로 울리는 누군가의 떨림을

내 몸으로서만 받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물녘이면 마른 바닥에 먼 발걸음 소리 울려온다

―「코기리 주파수」 부분     


몸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통합적인 것이다. 몸은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수렴하는 것으로 근대의 논리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 시각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 중심주의에 의해 억압된 것들을 귀환시켜 새롭게 존재성을 정립하려는 그런 함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내 몸”에 대한 성찰은 시인에게 몸이 단순한 소재나 재료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쓰기의 토대가 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처음과 마지막에 놓인 ‘당신’을, ‘당신의 말’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무수한 구멍을 내고 그 구멍 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워서 몸을 통한 세계내 존재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외로운 것은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내가 지금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당신을 끝내 그리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디아스포라」)”에서 혼자가 되지 못하고 외로움에 빠져 괴로워한다. 이것은 소쩍새의 “울음이 배어나왔을 저녁 어둠”은 “내 마른 묵필은 그 어둠을 가질 수 없(「소쩍새는 어디서 우는가」)”음과 다름 아니다. 시인은 운명적으로 다시 떠나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떠남이 결코 명확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받는 떠남이 아니라는데 있다. 오히려 흐릿한 이정표뿐이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사막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내면의 상흔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늑대를 따라가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잃어버렸다 몸속에 늑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검은 휘장 속으로 어떤 한 세계가 사라져버렸다


어둠속으로 모래 한 줌 흩뿌려 다시 첫 문장을 받아라


이제 막 피 냄새를 맡은 늑대 한 마리가 느릿느릿 걸어들어간 곳을 나는 본다

   

늑대가 뒤를 돌아본다

―「늑대가 뒤를 돌아본다」 부분    


“검은 휘장 속으로 어떤 한 세계”가 사라진 것에 대해 되짚어 가고 싶음은 앞날의 험난함을 의미하며 그 길에 유폐되어 있음으로 미칠 수밖에 없다. 바로 늑대의 야성을 회복함으로써 모래가 되어버린 부스러진 삶의 가루를 붙잡아 ‘첫 문장’의 회복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한 마리 진흙덩이 뱀(「진흙 구렁이」)”에 대해서 쓴다. “밤새 언덕 위 정원을 꿈꾸다가/이렇게 더러운 몸이 되어/내 몸을 자꾸만 씹어 삼키고만” 있지만 “차마 넘보지 못하던 뒷모습 너머의 저 서쪽을” 향해 아니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진흙덩이 뱀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뱀은 자력이 부여된 동물이다. 왜냐하면 뱀은 자신의 껍질을 벗고 다시 소생하기 때문이다. 뱀은 모든 사물과 모든 존재 속에서 감은 몸을 풀고 육체의 다양한 그물에 상응하는 수레의 이미지로 상승하게 된다. 융은 뱀이 보여주는 변형이나 자기 혁신이 널리 알려진 원형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시인의 몸은 다른 어떤 때보다 해방을 누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민감한 자의식을 가진 시인은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그것은 곧 그의 시쓰기에 대한 날카로운 자극으로 연결된다. 현실을 “사막(「라 뽀데로사1992-」)”이라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보는 것은 출구 없는 현실에 꿈이나 미를 대응시키는 모더니스트의 상상력을 발동한 것이고, 그런 모더니스트에게 출구란 애시당초 결여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한 주체의 재건을 꿈꾸는데 그것은 역시 꿈이나 미를 통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한 시에서 발견했는데, 「마지막 상상」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여기 그 시의 마지막 몇 행을 옮긴다. 그 속에 시인의 내일이 있을 법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떠한 형식에 머무를 수 없는 천형의 존재이다. 끝없이 바람처럼 떠돌며 새로운 미학을 잉태하고 새로운 시를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내 마지막 상상은 누렇게 부르튼 통나무배 한 척

바득바득 기어서라도 나아가야 할 무거운 몸뚱이 하나


허금주∙1993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저문 길은 나에게로 뻗어있다>, <책으로 태어나는 여자>, <오늘만 아름다워라>. 추계예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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