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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권두칼럼/시여, 여행을 떠나자/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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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25회 작성일 11-12-2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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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시여, 여행을 떠나자

장종권

 

 

시가 사라진 집에 시의 스타일만 남아있다. 시적 사고도 증발되고, 시적 세계도 우주적(?) 차원으로 넘어가버린 집에 만족스러운 풍요와 마스터베이션 환상이 가득하다.

이 시대에,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과학의 세계가 초성장의 대업을 이루어가는 시대에, 무엇으로든 노력하기만 하면 자기만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대에, 그 쓰잘 데기 없는 빈약한 이성으로, 혹은 감성으로, 시가 과연 우리 또는 인류의 미래 사회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냐. 과연 어디에 필요하다고 생떼를 쓰는 것이냐.

들을 만하다. 시각과 청각이 감각의 주요 사항을 휩쓸고 있으며, 사고와 철학이 없어도 부자가 될 수 있고, 스타가 될 수 있고,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그런 집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가, 혹은 시적 사고가, 혹은 시적 철학이,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이며, 인류의 건강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면서 날렵하고 황홀한 감언이설로 세상을 현혹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시로 인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시를 통해 잘 먹고 잘 살자 하는 것은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먹고 사는 것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절도 있었다. 그때에는 시를 통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을 과감히 희생한 사람도 있기는 하였다.

그래서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인가. 사람답게 살고 있으므로 그 희생에 평생 감사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한때 목숨처럼 중요했던 시가 오늘날 대접이라도 받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포획한 집에는, 그들이 시를 안고, 혹은 버리고 들어간 집에는, 마치 승리자의 노획물처럼 풍요와 권력이 새로이 자리를 잡고, 그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무수히 남아있다. 그러니 승리자로 군림하지 말라. 당신들이 얻은 것은 당신들 개인의 풍요와 권력이라는 새로운 기득권일 뿐이다. 적어도 시는 아니다.

시는 당대의 점령군이 아니라, 후대에 당대를 증거하는 역할이 더 크다. 우리는 詩經의 숱한 시를 읽으며 당대를 읽고, 김삿갓의 통쾌한 시를 통해 당대의 민심을 읽을 뿐이다. 시는 칼이 아니고, 총도 아니다. 그러니 시로서 승리할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시는 이미 이 시대를 읽어가는 寸鐵殺人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이 시대의 총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이아닌가 돌아볼 일이다. 시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후대의 증거를 위한 역할조차도 이제 시의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를 위해 몸을 던지고 싶어도 받아주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닌가 돌아볼 일이다.

그렇다면 시는 결국 한동안 개인적 차원의 예술세계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동안’이라는 말의 유효성도 거의 별 볼 일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개인적 치기 어린 발상이라고만 넘길 수 있는가.

시는 시가 아니다. 시적 스타일만 남았다. 이유는 또 있다. 스타일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의미와 가치, 시의 역할과 미래가 애매모호해진 상황에서도 시단은 풍요롭다. 시단의 풍요, 시적 스타일의 풍요이다. 이 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시의 미래는 아직도 분명히 밝다. 그들에게 우리는 희망의 불을 밝혀야 한다. 문학잡지의 역할은 그들에게 에너지를 쉬임없이 제공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가 없어도 평화롭고 행복하고 풍요롭기 그지없는 집, 그 집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를 기른다. 과거가 부끄러운 사람들은 아예 사냥개를 기른다. 우리 조상들은 누구나 개 한 마리는 길렀다. 그러니 이건 민족성이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이다.

집이 없어 고통 받았던 자일수록 무서운 사냥개를 기른다. 사냥개는 고기를 보면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훈련을 받은 것이다. 사냥개는 주인을 알아본다. 그렇게 훈련 받은 것이다. 사냥개들이 도시를 점령했다. 사냥개들은 시를 읽지 못한다. 읽어도 느낄 수 없도록 신경세포를 잘라놓았다. 시가 사라진 집에 시적 스타일만 남았다. 시가 칼이었던 사람들은 시 대신 사냥개를 키우기로 했다. 시가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우리는 그 변하는 세상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세상의 변화는 아무리 막으려 해도 불가능하다. 막으려 하면 할수록 그의 벼랑은 더 길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 변하는 이치에 마지막 기대라도 걸어본다면 시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시여, 떠나자. 그 동안 땀 흘려 일했으니 이제 홀홀이 여행을 떠나자. 가는 길에 또 다른 홀가분한 시를 만나서 우리들의 시를 이야기하자. 집을 떠나서 집을 생각하고, 시를 떠나서 시를 생각하고, 미래를 떠나서 미래를 생각하자. 시적 스타일만 남은 세상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시가 없는 세상도 얼마든지 풍요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세상을 보는 눈이 시인의 눈이다. 시인의 눈이 바로 세상이다. 그러니 시인들은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역할이 없어도 본질에 충실하자. ‘다시’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말이어야 한다. ‘부활’이라는 말 역시 가소로운 말이다. 존재하므로 의미는 당연히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으므로 가치 역시 만들 수 있다고 믿어두자.

느닷없는 폭우가 쏟아지는 한여름이 지겹기도 했다. 올 여름호를 시작으로 시전문지로 돌아선 ≪리토피아≫ 가을호는 변함없이 진지하게 작업을 마쳤다. 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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