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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사란과 술을 찬양하고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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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사란과 술을 찬양하고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이성혁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샴세딘 모함마드 허페즈의 가잘ghazal(소네트) 모음집 <신비의 혀>(신규섭 역, 나남, 2005)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좀 놀랐다. 필자는 페르시아 고전에 대해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 청탁자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글을 요청했다는 것이 좀 무모해도 보이고 참신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이러한 외국 고전,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고전 문학에 대한 글은 그 지역 문학 전문가에게 부탁하기 마련인데, 상식을 깨는 청탁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문학에 무지한 필자에게 청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편집진이 문학 작품의 수용은 작품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를 읽고 감응하는 데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요컨대, 필자가 평론 활동을 하면서 시를 적잖이 읽어 왔기에, 현재 발표되는 한국시를 읽듯이 14세기 이란의 고전 시작품을 읽고 글을 써보라는 것이 청탁 취지인 것 같다. 또한 서양의 고전에만 관심을 갖는 문학 풍토에서 벗어나서 아랍권의 고전에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수용하자는 취지 역시 있었다고 생각된다. 청탁을 받은 순간 난감해지긴 했지만 이렇게 짐작된 청탁 취지에 공감하면서, 필자는 “이 시집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해설이나 평론은 가능하지 않고 독후감 수준의 글밖에 쓰지 못한다”는 전제를 두고 청탁에 응했다.
<신비의 혀>라는 시집은 예전에 구입해 두었지만 읽지는 않고 있었다. 책을 구입한 것은 그 책의 번역자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학교 선배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주로 한국 현대시만을 보아 온 필자에겐 시조나 고려가요와 같은 한국 고전 시가도 읽을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데 이란의 낯선 고전시가를 읽으려는 마음은 더욱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청탁에 응하고도 사실 한동안 시집을 열지 않았다. 이 시집 읽기가 일종의 하기 싫은 숙제로 다가왔다. 마감 기일이 다가오자, 숙제하듯이 이 시집에 실린 옮긴이 해제와 저자 연보부터 읽기 시작했다.
해제에 따르면, 허페즈는 1320년대 이란 남부의 쉬러즈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1390년에 죽은 시인이라고 한다. 그의 사망 40주기에 그의 제자가 569편의 가잘을 수집하여 시집을 출간했다고 하니, 상당히 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이 번역판에는 그 중 88편의 가잘이 선정되어 실려 있다. 그 가잘들에는 제목은 없고 번호가 제목 대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하 가잘 인용 시 역서에 표기된 번호를 밝혀두겠다) 역자는 허페즈의 가잘에 미트라교에서 불교와 마니교로 이어지는 페르시아 고유의 신앙과 사상이 녹아 들어있으며, 형식적으로는 의미와 목적이 다양한 행으로 전개되는 불연속적 특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와 함께 이란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대중적 호소력을 지녔으며, 그래서 유럽에도 일찌감치 번역되어 유럽에 가잘(소네트) 형식을 유행시켰고 괴테는 그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서동시집>을 지었다고 한다.
역자 해제는 필자에게 이 시집을 읽어나가는 데 유익한 지식을 주었지만, 일단 이 지식을 잊기로 했다. 자칫 지식이 시 작품 자체에 감응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즉 지식이 독서 행위의 전제로서 작용하면, 시 작품에서 페르시아 고유의 신앙과 사상이 무엇인지 도출하려는 독서 태도를 낳게 될 터였다. 그 신앙과 사상에 대한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독서는 도리어 풍부한 수용을 가로막을 것이었다. 그래서 <신비의 혀>를 현재 간행되는 한국 시집을 읽어 왔던 태도로 읽자고 마음먹고 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교과서에 실린 시조를 읽을 때처럼 좀 지루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시편들을 읽어나갈수록 신기하게도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사실 해제에서 페르시아 고유 신앙이 녹아 있다는 글을 보고는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심오한’ 종교적 교훈을 주고자 하는 시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품게 되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 시편들은 그러한 내용의 시들이 아니었다.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사람들이 품는 욕망과 희망을 솔직하고 간절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편들이 소박한 것은 아니었다. 격조 높고 교묘한 비유로서 섬세한 사유와 감정을 드러내는 시편들이었다. 그 솔직함과 간절함은 현대를 살고 있는 필자의 마음에까지 와 닿을 정도였으니 이란 민중들이 허페즈의 시를 왜 좋아했는지 알 듯했다. 또한 그의 시편들에서 욕망의 긍정과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은 명상과 엄숙함, 금욕을 중시하는 당대의 성직자들과 권력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었고, 한편으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도 승화되고 있었다.
2.
허페즈 시편들의 매력은 사랑의 욕망에 솔직하다는 데 있다. 그 욕망은 육체적 욕정과 관련된다. 또한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술’일 것이다. 허페즈 시인이 사랑과 술을 줄기차게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삶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녀’와의 육감적인 사랑과 술의 도움을 받아 취기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 시집 첫머리에 실린 ‘가잘’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전문 옮겨 본다.
그대와 맘 속 얘기를 나누고 싶고,
그대 맘 소식을 듣고 싶어라.
조심 조심… 원초적 욕망-몰래 새어나간 얘기도
누가 듣지 않도록 숨기고 싶네.
이처럼 점찍어 둔 운명의 밤, 귀하고 성스러운
그대와 중천까지 자고 싶네.
얼마나 설렐까, 그토록 연한 진주막,
캄캄한 밤, 뚫어보는 게 소망이라네.
아! 훈풍아, 오늘 밤 도와주려무나,
동틀 녘, 꽃망울을 피우는 게 소망이라네.
그대 존경하기에 눈썹으로,
그대 흙길을 쓸어내는 게 소망이라네.
허페즈처럼 요구하는 혐오스런 자들 속에서
난 탕아의 시를 읊는 게 소망이라네.
이 첫 번째 가잘에서부터 역자가 말한 불연속적 전개를 확인할 수 있다. 각 행(연)의 의미론적인 간격이 넓어 각 행을 각기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독립적인 행들은 하나의 주제로 묶이게 되는데, 마지막 행(연)에서 그 행들을 통일하는 주제가 표명되는 듯하다. 역자 해설에 따르면 가잘은 7~14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 행에 시인의 호가 등장한다고 한다.(위의 가잘에서는 시에서 두 행으로 된 한 연이 가잘의 한 행이 되는 듯하다. 위의 시보다 더 많은 행으로 이루어진 가잘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집에 실린 88편 가잘 모두 마지막 행(연)에는 어떤 화자가 허페즈를 끌어들여 진술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허페즈는 시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비의 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아마 시인은 이러한 뜻을 가진 ‘허페즈’를 자신의 필명으로 한 것 같다.) 그리고 위의 가잘 뿐만 아니라 다른 가잘에서도 마지막 행에 시인이 각 가잘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를 표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위의 1번 가잘 마지막 행에 표명되고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 그 마지막 행에는 허페즈 시를 관통하고 있는 시 세계가 표명되고 있다고 추측된다. 즉 그 행에는 시인의 시 세계를 시인 자신이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허페즈의 시가 ‘탕아의 시’라는 것, 또는 그 시가 탕아의 시가 되기를 시인이 소망한다는 것이다. 다른 행에서는 이 ‘탕아’의 에로틱한 욕망이 제시된다. 시적 화자는 “그대와 중천까지 자고 싶”어 하며 캄캄한 밤을 뚫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그는 “동틀 녘, 꽃망울을 피”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 에로틱한 소망은 육감적이지만 그렇다고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적 화자는 그대를 육체적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다. 그가 “그대 존경하기에 눈썹으로,/그대 흙길을 쓸어내는 게 소망이라네.”라고 말하고 있음을 보면 그렇다. 시인은 ‘그대’를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눈썹’과 ‘흙길’은 허페즈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특히 ‘흙길’은 이 시집의 후반부 가잘에도 실려 있어서 시인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저 존경이라는 사랑의 정신적 면모는 사랑의 육감성을 축소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페즈 시에서 묘한 점은 저 육감성과 정신성이 다 같이 긍정되며 그래서 시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사랑-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그대의 ‘흙길’을 쓴다고 할 때, 사실 그 ‘흙길’ 자체가 관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3번 가잘에서 시인은 “흙길을 찾는 것은 즐거움의 연금술./난 사향 풍기는 흙길의 그 행복한 종.”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사향은 최음제와 같이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미약 아닌가. 그대의 흙길에는 이 사향이 풍기고 있고 이러한 흙길을 찾는 일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연금술과 같다. 뒤에서 보겠지만, 흙은 인간의 살을 의미한다. 눈썹으로 흙길을 쓸어낸다는 소망은 그러니까 그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자 육체적 접촉에 대한 열망이라고도 할 것이다. 허페즈에게는 지고한 존경과 육적 쾌락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허페즈의 가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술이다. 육체적 만남은 지속되기 힘들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즐거웠던 만남은 소망이 담긴 이미지로서만 기억 속에 지속될 수 있는데, 허페즈에게는 이 기억을 유지하기 위한 매개가 술인 것 같다. 위에서 일부 인용했던 3번 가잘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본다.
잘 빠진 자태, 취한 수선화 같은 눈의 열정에서,
튤립처럼 떨어진 난, 술잔과 더불어 냇가에 있네.
술 가져와라, 허페즈의 칙령으로
순수 의식에서,
위선의 먼지를 술잔의 은혜로 씻어 내리리다.
시인은 자신을 “잘 빠진 자태”를 가진 수선화의 눈길로부터 떨어진 튤립으로 비유한다. 이 튤립은 술잔을 들면서 순수 의식 상태에 놓인다. “술잔의 은혜”를 입어 얻을 수 있는 순수 의식은 위선을 씻어낸 의식이다. 시인은 같은 가잘에서 “난 술잔에서 삶의 산들바람을 찾노라”라고 선언한다. 그 삶의 산들바람이란 바로 순수 의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의식은 “그대 장미 같은 얼굴”(2번)을 떠올린다. 즉 순수 의식은 장미로 상징되는 관능의 기쁨을 기억하는 것이어서, 허페즈에게 순수란 관능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관능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으로, 그래서 그는 “그대 입술의 한 점이 내 인생의 기둥이어라”(2번)라고 말한다. 술과 그대의 육체가 주는 취기와 관능이야말로 삶에 기쁨을 주기에 그 취기와 관능을 막으려고 하는 성직자는 삶에 위선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허페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직자여! 떠나라, 점괘는 나의 점괘이니,
술잔도, 연인의 머리타래도 모두 내 손안에 있다.
우린 누가 술에 취하는지,
탕아 짓을 하는지 괘념치 않네.
미녀들의 입술은 달콤하여, 술맛도 달콤하니.
―「6번」 가잘 일부
‘머리타래’도 허페즈의 시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머리타래란 ‘그대’의 육감적 매력을 상징한다. 위선적인 성직자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삶에서 육감과 취기, 그 달콤함을 제거하고 탕아의 삶을 교정하고자 한다. 시인은 이러한 성직자에게 떠나라고 명한다. 육감과 취기, 입술과 술은 따로 떨어진 무엇이 아니다. 허페즈에게 술은 입술과 같이 관능을 일깨우며 사랑을 생성시킨다. “비천함을 인내하는 흙 인간에게/입술 같은 술 한 모금, 사랑을 퍼부으니”(6번)라는 그의 말은 이를 의미한다. 그에게 술은 사랑을 만들어주는 연금술적인 물질이다. 이 물질은 육체-흙-에 갇힌 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비천한 인간을 사랑으로 충만케 하여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변모시킨다.(시인에게 ‘흙길’이란 육체를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술을 금지하려고 하는 성직자는 신의 뜻을 모르고 있다. 허페즈 역시 신을 경외하지만, 그 신은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다. 허페즈는 “신은 창조 때부터 술 이외의 선물일랑 주지 않았”으며 “신이 술잔에 따르는 것을 우리가 마셨”(7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의 육신을 만들었으며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인간이 생령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성경 창세기 부분을 변조시켜 술을 변호하고 있다. 허페즈의 시에는 성경 인용이 다수 보이는데, 인용되면서 그 대목은 엄숙성이 사라지고 현세의 인간이 누려야 할 기쁨을 강조하는 구절로 변조된다. 방금 인용한 7번 가잘에서, 허페즈는 신이 인간의 코에 불어 넣은 생기를 술로 대체하고 있다. 그래서 술의 취기가 생령이 된다. 관능에 대한 의식-순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술이야말로 인간을 신과 연결시키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령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그러니 말을 통해 신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설교는 술과 비교해보면 속임수에 불과하다. 아래는 10번 가잘의 앞부분이다.
단식 끝나고 축제일 다가오니 마음이 들뜨는구려.
양조장에선 술 끓어오르니 어찌 술을 원치 않을쏘냐.
설교를 팔아먹는 귀하신 몸의 시대는 끝났도다.
탕아들의 즐거움의 시간이 돌아왔도다.
왜 술 한잔 마시는 이를 비난하는가?
우둔하다, 잘못이다, 그 누가 어찌 말할 수 있나.
술을 마심은 뻔뻔함도 속임수도 아니니,
뻔뻔하게 속이고 설교를 팔아먹는 자보다 나을지니.
우리는 남을 속이는 탕아도, 이중적인 친구도 아니니,
신은 마음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 상태를 증명해 보이네.
필자 역시 술을 좋아하는 주당이기 때문일까? 이 거침없는 시를 읽으면서 아주 통쾌했다. 마음의 비밀은 신이 아는 것, 금욕이 신과의 결속을 맺어주는 것은 아니다. 술을 즐기는 탕아들은 남을 속이지도, 이중적인 마음을 갖지도 않는다. 이중적인 마음을 갖고 남을 뻔뻔하게 속이는 인간들은 바로 이러한 술꾼들을 비난하는 설교자들이다. 허페즈에게 천국은 금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집에 있다. “에덴의 낙원을 원하는가, 오라! 나와 함께 가자, 술집으로/술독에 빠진 그대를 바로 천국의 연못으로 인도하리니.”(16번)라고 시인은 쾌활하게 외친다. ‘동양’ 하면 삶의 즐거움을 억압해온 금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대목을 보면 중세에는 서양보다 동양이 더 쾌활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서양에서 지상의 에덴은 술집을 의미한다는 저러한 시구를 읊는다면 당장 처형당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설교가와 성직자는 허페즈를 줄곧 괴롭힌 모양이다. 시인은 “쉬러즈에선/시인과 음악가의 가치를 알지 못하니,/오라! 허페즈여, 다른 나라로 옮겨가세.”(16번)라고 말하고 있으며 “수도원과 수피들의 장삼이 도리어 내 맘을 어지럽히니,/큰스님은 어디 있나. 그립구나! 순수의 술.”(17번)이라고 말하고 있다. 쉬러즈는 허페즈가 살았던 나라를 말하고 수피즘이란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종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수피즘에서는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한 금욕과 명상을 중시했다고 한다. 관능과 취기를 찬양하는 허페즈로서는 수피 성직자들과 친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수피즘이 퍼져 있던 쉬러즈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허페즈가 신을 모독하고자 하는 이는 아니다. 그는 ‘큰스님’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는 생령과 같은 술과 관능의 순수성을 알아보는 이일 것이다. 그 순수성은 시와 음악의 본질과 연결된다. 시인은 “지긋지긋한 설교, 차라리 거문고 가락이 나을 듯.”(17번)이라고 하여 설교와 음악을 대치시킨다. 또한 “부인은 설탕 같은 입, 달콤한 언어의 악사,”(19번)라고 하여 부인의 관능과 시―달콤한 언어―의 창조를 연결한다. 허나 금욕과 명상을 설파하는 수피의 설교가들은 음악과 시를 억압한다. 시는 금욕이 아니라 관능을 노래하며 명상이 아니라 낭만적 취기를 불러와야 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은 당신의 달콤한 입이 이끈다. 당신에 대한 육감적이고 동시에 정신적인 사랑이 시를 쓰게 한다. 그래서 <신비의 혀>에는 연애시, 즉 ‘당신’에 대한 찬양과 사랑의 고백이 많이 실려 있는데 아래의 구절은 특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당신의 얼굴은 달보다 더 눈부시다.
무성한 풀이 꽃보다 못하듯
당신에게 꽃은 풀처럼 하찮다.
내 생명의 집은 지붕 처마 같은 당신 눈썹의 구석.
왕조차 이 구석보다 더 행복한 것을 갖고 있지 않네.
―「40번」 가잘 앞부분
손이 오그라들 정도의 ‘그대 찬양’이다. 하지만 그 찬양이 거짓된 과장으로 느껴지진 않고 도리어 절절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풀은 무성하게 자라 있어도 그 속에 핀 꽃보다 못하듯이, “당신에게 꽃은 풀처럼 하찮다”는 당신에 대한 황홀한 찬양은 허페즈 시인이 아름다운 사랑의 담론을 샘솟듯이 할 수 있는 능력자, 연애의 진정한 고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당신 눈썹의 구석”이야말로 내 생명이 거주하는 집의 ‘지붕 처마’라는 표현 역시 ‘탁월한(?)’ 사랑 고백이다. 이 표현을 보면, ‘당신’ 육체의 일부분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이를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 전환시켜 의미화 하는 허페즈의 뛰어난 주의력과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당신’의 마음을 사기 위한 수사만은 아닐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사랑의 절절함이 저러한 표현을 낳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절절함은 당신을 잃고 난 후의 슬픔에서 더욱 짙게 나타난다. 사랑하는 연인은 언젠가 헤어지게 되는 법,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노래한다.
내게서 마음을 가져갔고 내게서 얼굴을 숨겼나니,
신이시여, 누구와 이 불장난을 할 수 있으리까?
홀로 있던 신 새벽, 자살을 결심했네.
끝 간 데 없는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튤립처럼 난 왜 핏빛 마음이 아닐까?
수선화처럼 반쯤 취한 그녀의 눈,
날 혼란스럽게 하나니.
이 애끓는 마음, 난 누구에게 말할까?
“연인이 이 목숨을 끊으려 하네.”
초처럼 날 그렇게 녹이는구려.
술병도 울고, 가야금도 목 놓아 울었다네.
(중략)
적이라도 허페즈의 목숨에 맞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눈썹 모양의 활,
그 눈의 화살이 날 죽이는구나.
―「43번」 가잘 일부
당신의 얼굴을 보니 나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렸구려.
연인 사이에서 타 버린 사랑의 모든 수확물,
바람아! 가져가 다오.
재앙의 폭풍인 연인에게 맘과 눈을 주었을 때,
슬픔의 홍수 밀려들어 내 존재의 토대를 무너뜨리누나.
강한 향의 그녀 머리타래,
누가 그 내음 맡아 볼 수 있으리? 아! 슬프도다.
오! 욕심 많은 마음아,
‘향내’를 맡겠다는 맘을 기억에서 지우렴.
―「48번」 가잘 전반부
“수선화처럼 반쯤 취한” 눈을 가진 그녀는 시인의 마음을 가져가고는 얼굴을 숨겨버렸다.(43번)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시적 화자는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사랑에 마음 빼앗겼으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그로서는 술과 음악 역시 목 놓아 울어버린다고 느껴진다. 재미있는 것은 생명의 지붕 처마와 같았던 그녀의 눈썹이 이젠 시인에게 화살을 날리는 활이 되어버렸다는 표현이다. 시인이 자신의 삶을 살게 해주었던 눈썹의 이미지가 이젠 그를 죽이는 활의 이미지로 변용된 것이다. 그녀는 적보다 더 잔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편 48번 가잘은 시인이 실연에서 마음을 다소 추스른 상태를 보여준다. 43번 가잘에서 시인은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허나 48번 가잘에서 시인은 아직 홍수처럼 밀려오는 슬픔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정리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사랑에 빠지자 자신의 모든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다고 회상을 통해 판단한다. 그리고 사랑의 모든 수확물을 바람이 가져가기를 원하면서 ‘향내’를 맡겠다는 마음이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시인은 이제 그녀를 기억에서 지우고자 한다.
솔직한 마음을 비교적 직설적으로 써놓고 있는 이 시들은 실연시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중세 한국 문학에서 이러한 실연의 마음을 읊는 노래는 민요에 기초한 고려가요나 기생의 시조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유명한 학자이자 시인이 절절하게 우는 소리를 내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란의 지적 문화가 진솔하고 대중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
쓰라린 실연을 하게 된 시인은 이제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맡게 되는 사향은 그녀와의 관능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던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시인의 마음을 괴롭힌다.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 시인은 삶에 대한 다른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여보시오, 부인! 돌아가며 술 한 잔 권해 보게.
사랑은 처음엔 쉬운 듯 보이나 어려움이 닥치는 법.
정낭의 향, 끝내 그 머리타래를 훈풍이 열어제치고,
사향의 타래로 인해 마음속은 피로 얼룩지네!
연인과의 단계처럼 인생의 역에서 기쁨과 평안은 순간.
낙타방울은 낙타 등의 가마 문을 닫으라고 하네.
또 다른 역을 향해.
―「52번」 가잘 앞부분
그녀의 관능을 응축한 ‘머리타래’의 향을 기억하게 만드는 정낭의 향, 즉 사향은 훈풍에 실려 ‘사향타래’가 되어 시인에게 다가온다. 시인의 마음속은 다시 피로 얼룩진다. 마음의 상처가 도졌기 때문이리라. 이 아픔 속에서 시인은 사랑에도 어려움이 닥치고 기쁨과 평안은 순간이라는 삶의 진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삶도 삶인지라 시인은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다. 낙타 방울은 “가마 문을 닫으라고 하”면서 “또 다른 역을 향해” 가야한다는 삶의 절대적인 명령을 시인에게 일깨운다. 하지만 아픈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상처는 아물어야 한다. 치유는 방금 말한 삶의 진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삶의 본질 자체에 대한 인식, 신에 대한 인식으로 상승할 때 그 치유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가잘의 마지막 행에서 시적 화자가 “허페즈여! 마음의 존재를 원한다면/신에게서 떠나지 말지니,/신에 대한 인식, 무아無我로 이를 테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 치유로서의 깨달음과 관련된다. 신에 대한 인식은 무아이다. 신을 인식할 때에는 자아가 사라지기 때문에 실연의 아픔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인데, 26번 가잘에서는 그 세계관이 더욱 선명하게 표명된다. 시인은 그 가잘에서, 마치 실연의 아픔을 거쳐 이제 깨달음을 얻은 듯이 “즐거움의 경지, 고통 없인 도달하지 못하니./그렇소 신이 내린 재앙의 계명으로/태초의 날은 성립되었네.”라고 말하고는, “있고 없음에 속으로 괴로워 말고 즐거이 보낼진대./존재하는 모든 완전함도 무릇 공空이기에.”라고 설파한다. 즐거움은 신이 내린 고통을 거쳐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즐거움이란 존재가 곧 공空임을 깨닫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와 불교가 혼합된 세계관 같다. 다시 말하자면, 신은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 인간이 고통을 겪게 만든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고통을 통해 신이 공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고 무아를 통해 그 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허나 그렇다고 허페즈가 술을 멀리하고 금욕주의와 명상으로 돌아가는 ‘회개’를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술은 그에게 고통을 깨닫게 해주지만 한편으로 여전히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연금술의 물질, 신의 선물인 것이다. 술에 대한 찬양은 <신비의 혀>의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다음은 37번 가잘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술집 주인에게 묻길, “구원의 길이 무엇이더냐?”
그가 술 한 잔 청하며 답하길,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
세상의 정원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대 얼굴에서 눈의 동공을 통해 장미를 따는 일.
술을 숭배하는 나는 내 그림을 물 위에 그리네,
자기 숭배의 그림을 부수어 버리기 위해.
이 부분은 상당히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짐작된다. 시적 화자는 “구원의 길”을 원한다. 그런데 그는 그 길에 대해 사제나 수도사에게 묻지 않고 술집 주인에게 묻는 것이다! 여전히 시인은 제도 속의 종교인이 삶의 진실과 구원을 알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술집 주인이 “술 한 잔 청하”면서 한 대답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질투나 복수심과 같은 정념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상대방을, 술 한 잔 마시면서 그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할 때 마음의 평온은 찾아올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은 자아에 집착하는 자기 숭배를 부술 때 가능하다. 물 위에 “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신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혹은 자아란 물 위의 그림처럼 허망하고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결코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고 유아唯我의 해탈로 나가자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우리 마음의 목적”이 그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눈의 동공을 통해 장미를 따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대의 눈으로부터 마음을 보며 그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여전히 우리 마음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구원을 얻고자 하면서도 성직자처럼 속세의 삶을 타락했다면서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허페즈에 따르면, 자기 숭배를 부수고 자아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마음, 쓰디쓰고 짠 것에서/욕망과 탐욕의 구미를 씻어”(50번)낼 때 가능하다. 그 해방은 “영원한 만남, 그런 욕심일랑 버”리고 “세상의 향연에서 한두 잔 마시고 떠나”(56번)는 자세를 취할 때 올 수 있다. 욕망과 탐욕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만남”과 같은 욕심도 버릴 때 한두 잔 음주의 즐거움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무아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여전히 “가진 것 없어도 즐거이 취하도록 애쓰라./이 존재의 연금술은 거지를 부자로 만드나니.”(55번)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원한 만남을 원하는 것은 욕심이라지만, 그 인식이 삶의 영원성에 대한 희구를 버리라는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시인은 결코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되는 대로 살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존재의 영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존재의 영원성은 술을 통한 신-공空-과의 접속 속에서 써질 수 있다. 아래의 시편을 읽어보자.
난 잔 속에서 연인의 얼굴 보았네.
오! 그대, ‘영원성의 술’에 대한 우리의 즐거움을 알지 못할 터.
마음이 사랑으로 살아있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세상의 사료使料위에, 우리 존재의 영원성은 쓰여 있네.
쭉쭉 뻗은 실삼나무 같은 여인네들의 교태와 아양이
제아무리 많다 한들,
우아한 걸음걸이 가문비나무의 연인이 나타나니.
훈풍이여, 연인의 정원을 지나치거들랑,
부디, 연인에게 내 소식 전해주오.
―「60번」 가잘 일부
사랑을 잃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 있을 때, 술잔 속에서 연인의 얼굴은 회생할 것이요 그리하여 영원성을 이끌어온 술은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사랑 속에서, 그 신 속에서 우리는 영원성을 살 수 있다. 이때 존재의 영원성은 존재의 사료 위에 써질 것이다. 술잔에 비치는 연인의 얼굴은 영원한 존재다. 그 존재는 ‘가문비나무의 연인’으로 등장한다. 가문비나무는, 필자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페르시아 문화의 맥락에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 시에서 가문비나무의 상징성은 술잔에 나타난 연인의 영원성―이미지―과 연결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상징적 대상이 실삼나무다. 교태와 아양을 잘 부리는 여인들과 연결되는 실삼나무는 허망하게 사라질 존재를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술잔에 비친 이미지로 나타난 연인은 비록 그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시인에게는 영원한 존재다.
그대와 몸으로 붙어 있진 않지만,
내 영혼의 정수精髓는 그대 문지방의 흙이네.
나는 아양 떠는 모든 여자에게 마음의 동전을 뿌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재물함엔 그대의 표시로 봉인되어 있도다.
―「68번」 가잘 일부
이 시편에서 흙은 이제 육신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영혼의 정수”를 의미한다. 그대와 육체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사랑과 기억, 영혼, 이미지 등을 통해 그대는 시인에게 영원한 연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대를 향한 시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아서, ‘나’는 마음의 동전을 아양 떠는 여자들에게 뿌리거나 하지 않는다. 마음의 동전을 모아놓은 재물함은 “그대의 표시로 봉인되어 있”는 것이다. 그대만이 그 재물함을 열 수 있을 터, 그 재물함이란 바로 가잘들을 모은 시집을 의미할 것이다. 위의 시편의 마지막 행이 “허페즈의 시, 달콤한 언어가 그대의 가락이로다.”라고 끝나는 것을 보면, 이 시편 전체가 바로 시를 주제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대’의 가락―“그대 놀이의 보고寶庫에 있는 마술”(68번)―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허페즈의 시라는 것, 그 달콤한 언어야말로 그대의 이름으로 봉인되어 있는 재물함에 들어 있을 ‘마음의 동전’이라는 것, 이러한 내용을 68번 가잘은 독자에게 전해준다. 그래서 허페즈는 영원성은 시-노래를 통해 기록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무슨 곡이었던가, 그 악사가 전통음계로 연주한 것이?/생은 흘렀건만 아직껏 머릿속은 그 가락으로 가득하다.”(66번)고 시인이 말할 때 그 말은 노래-시-의 기록 능력을 찬양하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짐작된다.
시의 기록 능력 덕분으로, 시인 허페즈는 시집이라는 재물함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재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시인은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존재의 영원성을 인식할 수 있었고 시라는 비물질적인 재물함을 가질 수 있었다.
소망으로 이룬 궁궐은 아주 약한 토대임을 알아야 하니,
술을 가져다 주오, 인생의 토대도 바람 위에 있나니.
푸른 하늘 아래 노예인 나는 주인 같은 생각으로,
색계色界를 받아들인다 해도 물질로부터 자유롭도다.
―「70번」 가잘 앞부분
이 대목은 아마도 말년에 들어선 허페즈의 인생관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인생의 토대는 바람이요, 그래서 시인은 술을 마신다. 인생은 무한하고 광활한 푸른 하늘 아래에선 노예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주인과 같은 자유인의 마음으로 살 때 그는 존재의 무한성을 인식할 수 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선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다고 성직자처럼 속세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살자는 것은 아니다. 색계를 받아들이면서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의 지향은 술을 금지하는 시대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몇 편의 시편들에서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당대 권력을 뼈있게 비판하고 있다. 가령, “나의 주인 하느님은 계산을 모르신다./황제의 낙관은 신이 내린 보답의 흔적이 아니라네.”(74번)라든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쫒지 말지니,/술병 바닥의 찌꺼기가/윗부분의 맑은 술 밀치고 올라오는구나.”(72번)와 같은 구절들은 당대의 권력을 암유적으로 비판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자유인으로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는다.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도 나의 소망대로/그런 날에는 세상의 군주도 내 노예일지니.”(73번)와 같은 호방한 구절은 권력에 대한 시인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아름다움과 술과 사랑을 얻은 시인에게는 시퍼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주도 그의 노예에 불과하다. “우리가 겉으로는 왕의 노예일지라도,/우리는 아침 나라의 왕”(84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왕궁은 어떠한 곳인가? 그 왕궁은 “원하는 사람, 누구든지 오고,/원하는 사람, 누구든지 말하”며 “거만도 오만도 없고, 시종도 문지기도 없”(74번)는, 자유와 평등으로 풍족한 곳이다. 그 왕궁은 선술집이나 화류가다. 그곳에서는 군주가 사는 궁궐의 고관대작들이나 승려들, 돈과 지위에 묶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과는 달리 사랑에만 취한 이들이 산다. 74번 가잘의 끝부분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화류가 주인의 노예이며, 그의 미덕 영원하도다.
큰 스님이나 수도자의 미덕, 가끔씩 있다가 곧잘 없다네.
허페즈여! 고결한 성품으로 요직에 앉지 말라.
난 사랑에만 취해 있고,
돈과 지위에 묶여 있지 않다네.
화류가가 궁전이며, 시인을 왕으로 두는 나라, 그 나라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왕국과 전투를 벌인다. 이 힘없는 시인의 나라가 어떻게 저 권력과 전투를 벌인다 말인가? 시인은 같은 위와 같은 가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게임을 어떻게 바꿀까 하다가 난 졸卒을 움직였네.
난봉꾼의 장기판에서 왕은 힘이 없다네.
장기 게임에서 권력을 쥔 자에게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자가 대항하는 방법은 게임 판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차나 마, 포 없이 졸을 움직임으로써 게임 판을 바꾸는 것, 그것이 시와 삶과 술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허페즈의 전술이다. 판을 난봉꾼의 장기판으로 바꾸는 것, 이러한 판에서는 왕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난봉꾼들인 졸들로 판을 채움으로써 권력과 돈의 코드가 통하지 않는 판을 만든다는 전술은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척도나 코드로부터 이탈하거나 이탈당한 소수자들이 척도와 코드 자체를 기능하지 못하게 어지럽히는 것, 이 전략이 현대 사회에서의 대안 정치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렇기에 위의 구절은 필자에게 매우 흥미롭게 읽혔고, 허페즈의 시가 단순한 고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색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유를 찾고자 했던 허페즈의 삶과 문학이 이렇게 권력에 대항하는 정치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현재의 진지한 문학이 가지게 되는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지면 관계 상 이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그치고, 이 글의 독자들도 이 시집이 어떻게 끝맺음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이 시집의 끝 부분 시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연인이 여행했던 길의 흙을 가져와,
내가 본 세상의 눈으로 연인의 처소를 만드나니.
오호라! 여섯 방향에서 나의 길을 막아서는구나.
그 육방위六方位는 점, 몸매, 머리카락,
얼굴, 뺨과 신장.
오늘 난 당신 손아귀에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주오.
내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니 후회의 눈물이 무슨 소용이랴.
―「79번」 가잘 일부
죽음을 앞둔 시인은 “연인이 여행했던 길의 흙을 가져와” “연인의 처소를” 만든다. 시인은 죽을 때까지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는 연인이 살아왔던 흔적들, 그녀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흙을 퍼서, 시인이 세상을 보았던 눈을 도구삼아 말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연인의 처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참 아름다운 구절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시인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다음 행에서 더욱 돋보인다. 시인은 연인이 살아온 행적을 기억하여 자신의 눈으로 연인의 처소를 만들고자 했으나, 여섯 방향에서 어떤 것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들은 바로 그 연인의 육체 이미지들이다. 육체의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는 몸매에서 사랑을 기울여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점까지, 즉 전체적인 모습에서 몸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 육체 이미지들이 기억의 흙을 가져오려는 시인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시인을 둘러싸고는 자신의 손아귀 안에 시인을 가둬놓는다.
그 이미지들이 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시에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어떤 통한과 후회와 연결된 것들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즉 시인이 용서를 빌 어떤 사건들이 그 육체 이미지들에 녹아들어가 있는데, 그 이미지들은 연인의 기억과 같이 마지막을 보내고자 처소를 만들려는 시인의 시도를 회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방해한다. 그래서 시인은 “내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그 여섯 육신들에게 애원한다. 위선을 증오하는 시인의 의식이 그만큼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 대목 역시 죽기 직전이라도 마음의 평온을 위해 자신을 기만하는 의식은 갖지 않겠다는 시인의 비타협적 성격을 보여준다 하겠다. 시인은 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각인되어 있을 구체적인 육체 이미지들을 죽을 때까지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인은 죽음 앞에서 때늦게 흘리는 “후회의 눈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고 시인이 니힐리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순환적 우주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영원한 우주의 순환 속에 낮과 밤은 끊임없이 찾아든다오.”라고 말하면서 “낮의 시대는 끝났”(81번)다는 인식을 표명하고 있다. 낮이 이성의 시대라고 한다면 밤은 감성의 시대, 시와 술과 사랑과 희열과 기억과 슬픔과 회한의 시대다. 시인은 이 밤의 시대 속에서 슬픈 사랑의 기억을 안고 술을 마시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또 낮을 맞이할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우주는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삶으로, 회한은 기쁨으로 전화될 것이라고 시인은 믿을지 모른다. 그래서 허페즈의 시에는 낙관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낙관은 이 세계 자체에 내재해 있는 아름다움을 순수한 마음으로 발견하고 맞이하는 자세로부터도 나온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는 아름다운 구절이 많다. 방금 눈에 띈 구절만 예로 인용해본다.
내가 그녀의 흙길이 된다면
그녀는 나로 인해 치마를 흔든다.
“나의 마음이 돌아온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내게서 얼굴을 돌릴 텐데.
―「83번」 가잘 앞부분
이 구절에서 시인은 현대시에서도 보기 힘든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기막힌 구절들을 이 시집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자는 숙제하듯 펼친 이 시집을 감동적으로 읽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허나 앞부분에서는 좀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읽어나가면서 점점 많은 시편들에 몰입되어 갔다. 독자들 역시 이 시집을 읽게 되면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일독을 권유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시집의 끝에 실려 있는 88번 가잘의 뒷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회오리바람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잔디에는 장미와 재스민이 있다.
보라, 이 유리잔에 보이는 야릇한 그림,
나의 몽롱한 모습에도 놀라지조차 않는구나.
화원을 스쳐가는 돌풍에도,
기이하다. 장미와 향기와 찔레꽃의 색깔이 머물다니.
진리포기는 불가능하니, 오! 마음 견디어라,
그런 귀한 보석 인장은 악마의 손아귀에.
세상 본성이 파괴되는 이 재난, 허페즈여!
고름을 짜낼 전의典醫는 한의더냐, 양의더냐.
이 대목을 보면 허페즈 시인이 평생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회오리바람이나 돌풍처럼 바람이 폭력적으로 휘몰아치는 이 세계에도 그 폭력을 무력화하는 아름다움-‘장미의 향기’, ‘재스민’, ‘찔레꽃의 색깔’-이 내재해 있다는 믿음,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진리이며 그 진리를 얻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 그리고 본성이 파괴되어 재난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을 그 아름다움을 통해 더러운 고름을 짜내어 치료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고름을 짜낼 전의”가 바로 시인일 터, 그 시인이 한의든 양의든 허페즈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양의 문학이든 서양의 문학이든, 그에게 문제는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성혁∙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1999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는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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