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조연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46회 작성일 11-12-29 22:31

본문

  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조연정

 

 

번역시를 읽는 우리에게 원작의 묘미는 얼마나 전달될 수 있을까. 시(어)는 그것이 단순한 의미 전달의 매체가 아닌 이상 번역 너머에 있다. 특히 번역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권에 속한 시가 번역될 때 가까스로 보존되는 것은 시의 산문적 내용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체계 사이의 불가피한 거리로 인해 산문적 내용의 전달에만 만족하게 될 때 번역시는 원작을 배반한 것이 되기도 한다.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당도한 외국의 명시들이 역사적 거리나 심정적 거리를 감안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명성에 못 미치는 범작으로 느껴져 당황스러웠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는 번역의 과정에서 ‘시적인 것’, 벤야민의 표현을 따르자면 ‘본질적인 것’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번역자들이 토로하는 번역의 고충과 아쉬움, 그것은 번역자의 독서 과정까지도 살아 있던 ‘시적인 것’이 번역의 과정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안타까움과 관련될 것이다. 원작을 재현할 적당한 번역어를 찾아내고 그것들의 알맞은 조합을 고안하더라도 번역시과 원작과 똑같을 수 없다. 시는 번역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시를 읽는 일은 때로 원작과 전혀 다른 새로운 창작을 경험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번역자가 자신의 시적 감각을 발휘하여 번역자의 언어 안에서 원작의 리듬을 나름대로 구현하고자 시도한다면 이때 번역은 그야말로 창작으로까지 육박하게 된다. 그러나 번역자의 능력으로 ‘시적인 것’이 잘 보존된 번역시라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 번역시의 아름다움은 원작의 아름다움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다. 어쩌면 원작과 번역은 ‘시적인 것’이라는 교집합을 나누는 서로 다른 작품인지도 모른다. 시의 경우, 번역은 이처럼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이다”라는 고은의 추천사가 붙어있는 다르위시의 시선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아시아, 2008)을 읽는 일도 우리에게는 썩 마음 편한 독서가 될 리 없다.  “나는 어디에서 아침을 맞이하든 아랍어 사전을 네 쪽씩 소리내어 읽는다”1)고 고백한 다르위시는 다른 언어에 비해 특별히 음악성이 잘 살아 있다는 자신의 모국어를 각별히 아낀 시인이었다고 번역자 송경숙은 전한다. “나는 시에 있어 노래를 중요하게 여긴다”2)라고 말한 팔레스타인의 국민시인 다르위시의 탁월한 리듬감을, 번역시를 읽는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누릴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48년, 여덟 살의 나이에 ‘나크바Nakbah’라는 ‘대재앙’(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 만 명이 죽고 칠십만 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된 비극)을 겪은 이후, 평생을 집 없는 난민으로 살아온 다르위시의 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랍어의 리듬감이라는 시적 묘미 그 이상일 수 있다. 그는 모국어의 리듬감 속에 숨어 나 자신의 집 없는 상황을 연민한 것이 아니라, 귀향의 그날까지 자신의 시가 집없는 모든 자들의 노래가 되기를 바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위시 시가 품고 있는 ‘시적인 것’은 아랍어의 리듬감 그 이상인 것이다. 그는 고향상실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아름다운 언어로 섬세히 그려낸 시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누군가가 처한 특별한 비극으로서 용감히 그려낸 시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은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다르위시! 그가 바로 팔레스타인”인 것이다.


그는 흰 나리꽃을 꿈꾼다

올리브 가지를…

밤이면 잎을 틔우는 올리브나무의 가슴을

그는 꿈꾼다고 __ 내게 말했다 __ 한 마리 새를

     레몬 꽃을

그는 자신의 꿈을 철학화하지도 않았고 사물을 이해하기보다는

느끼고…냄새 맡을 뿐이다

그는__ 내게 말했다 __ 조국을

엄마가 끓여주는 커피를 훌쩍 마시는 것

       그리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병사는 흰 나리꽃을 꿈꾼다」(밤의 끝, 1967) 부분


1967년에 출간된 밤의 끝3)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병사는 흰 나리꽃을 꿈꾼다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똑같은 구절이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반복된다. 이 시는 아랍인 ‘나’와 이스라엘 병사 ‘그’의 대화로 이루어진 시다. 인용한 부분의 ‘그’가 이스라엘 병사이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그에게, 과연 “조국”이란 무엇일까. 인용된 부분을 읽기 전에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을 먼저 살피자. “국토를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병사는 “내가 사랑하는 건 짧은 산책/혹은 한 잔의 포도주”라고 답한다. “국토를 위해 죽을 수 있어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와 국토 사이의 유대는 고작해야/전쟁 이야기…그리고 대학의 강의뿐이죠!”라고 답한다. “국토를 내 피부, 내 맥박으로 느끼지 못”한 저 병사는 왜 “조국”을 위한 전쟁에 투입되어 “총알 채워 넣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젊은 병사는 “조국”을 위한 애국적 사명감으로 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끓여주는 커피를 훌쩍 마시는 것”, 그리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조국”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집에서 엄마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조국”이라면 그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 되찾고 싶은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철학화”한 적도 없으며 어떤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내맡긴 적도 없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꿈꾼 병사는, 그저 소박한 일상으로서의 ‘조국’과 ‘국토’를 쟁취하기 위해 지금 “전쟁하는 기계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손에 돌을 든 팔레스타인 난민이 아니라 손에 총을 든 이스라엘 병사를 내세움으로써 다르위시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이스라엘 병사이든 모두 집밖에서 집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불쌍한 인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다르위시의 시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시가 아니다. 그는 그저 인간적 삶에 대해 말할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누려야 할 것을 빼앗겨버린 자들의 당연한 꿈을 그리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조국과 국토라는 관념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흰나리꽃”이고 “올리브가지”이다. “한 마리의 새”이고 “레몬 꽃”이다. 죽음이 난무한 전장에서 저 병사가 꿈꾸는 것은 엄마의 커피이고 돌아갈 집이다. 꽃이 피고 새가 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 저 병사는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나는 꿈꿨어요 어린 나이의 결혼을

눈이 큰 여인을 꿈꿨어요

나는 꿈꿨어요 머리채 곱게 땋아 늘인 여인을

나는 꿈꿨어요 돈 몇 푼에 팔리지 않을

한 그루 올리브나무를

나는 꿈꿨어요 당신의 역사 그 풀리지 않는 비밀들을

나는 꿈꿨어요 긴 밤들의 슬픔을 불태울

아몬드 향기를

나의 가족들을 꿈꿨어요…

용맹을 기리는 휘장을 내 몸에 감아 줄

내 누이의 팔을

나는 꿈꿨어요 한여름 밤을

무화과 광주리를

나는 꿈꿨지요 너무도 많이

너무도 많이 나는 꿈꿨지요…


    그러니 날 용서해 줘요!!

―「사과謝過밤의 끝, 1967) 전문

  

이제 팔레스타인 청년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꿈꿨어요”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이 시의 제목은 “사과”이다. 화자는 자신이 “너무도 많이” 꿈을 꾼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말한다. 꿈꾸기, 즉 희망을 바라는 일이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너무 많이 바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눈이 큰 여인”과 “어린 나이에 결혼을” 꿈꾸었다. “한그루 올리브나무”와 “아몬드 향기”, 그리고 “무화과 광주리”를 꿈꾸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바란 것이다. 그것은 용서를 구할 일인가. 결정적으로 “나의 가족들을” 꿈꾸었다. 이것은 꿈꾸어야 할 일인가. 이 시의 ‘나’ 역시 앞에 인용한 「병사는 흰 나리꽃을 꿈꾼다」에서처럼 전장에 내몰린 병사로 보인다. 이 시에서 ‘꿈꾸다’라는 표현은 이중적으로 읽히는데 단순히 자신이 지금 갖지 못한 무엇을 바란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하고, “긴 밤들의 슬픔” 속에서 ‘내’가 밤마다 꾸는 꿈을 뜻하기도 한다. 긴 밤의 꿈에서 깨고 나면 소박한 일상이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긴 밤의 슬픔” 속에서만 꿈꿔 보는 것이다.

꿈에 관해서라면, 즉 희망에 관해서라면, 너무 많은 꿈이라 하더라고 그것은 결코 사치일 수 없다. 아무도 아닌 이름 없는 자로 내몰린 사람들도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 꿈꾸기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며 한계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시의 화자가 꿈꾸는 것은 실제로 “너무도 많”은 꿈이 아니라 소박한 삶일 뿐이다. 그러니 “날 용서해 줘요!”라고 말하고 있는 ‘나’는 지금,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를 ‘사과’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로서의 희망,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마지막 권리로서의 희망, 저들이 박탈한 것은 비단 집과 가족뿐이 아니라 바로 희망이라는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니 날 용서해 줘요!!”라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처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나’는 자신의 마지막 권리인 ‘꿈’마저 박탈해간 저들에게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라는 인간 자체를 용서하라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너희들이 앗아간 것이 한 인간의 사치스런 꿈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이 된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저들이 가져간 것은 “엄마의 커피”이고 “한그루의 올리브나무”이며, 결국 ‘반성없는 꿈’이다. 다르위시가 말하려는 팔레스타인의 절망은 인간의 마지막 권리로서의 꿈을 박탈당한 절망이다. 다르위시의 시에서 ‘시적인 것’을 찾자면 그것은 단순히 시의 리듬감이나 말의 묘미가 아니라 그의 시가 인간적인 것에 밀착했다는 사실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다르위시의 시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꿈을 박탈한 ‘저들’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리’의 슬픔에 대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따져 묻는 일에 더 열중한 시인이다. 그는 ‘나는 아프다’라고 말하기에 앞서 ‘너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시가 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를 데려가 다오, 그대의 눈 밑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비애의 오두막집 그 한 폭의 유화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내 비극의 경전 그 한 행行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난감으로라도… 집의 한 조각 돌로라도

우리의 다음 세대가

집으로 가는 통로들을 기억하도록!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눈과 문신은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꿈과 시름은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손수건, 두 발, 몸뚱이는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말과 침묵은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목소리는

팔레스타인의 그것, 그대의 태어남과 죽음은

나는 나의 옛 노트들 속에 그대를 품었다

내 시의 불로

내 여정의 양식으로

그리고 나는 그대의 이름으로, 골짜기마다 외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1966) 부분


1966년에 간행된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의 표제작인 위 시는 “그대의 눈은 내 가슴속의 가시/나를 아프게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장시이다. 이 시에서 다르위시는 “그대의 눈에 바치는 시”라는 표현을 썼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팔레스타인의 처녀”이자 팔레스타인 그 자체이다. 국가 상실기에 쓰여진 많은 시들이 그러하듯 다르위시의 시에서는 이처럼 ‘조국-어머니-여인’이라는 상징체계가 운용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이러한 상징체계가 운용되는 시들에서 우리는 남성화자의 소영웅심리와 희생정신이 은근히 강조되는 장면을 많이 봐왔다. 그러나 다르위시의 시에서라면 사정이 다르다. “우리 둘이, 한때, 문 뒤에서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다르위시의 화자는, 그래서 “그대의 눈은 내 가슴속의 가시”처럼 아프게 박혔다고 말하는 그는, 영웅심리나 희생정신을 자각할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그는 그저 ‘그대’가 아프고 ‘우리’가 아픈 것이다. 서로를 마주 보았던 눈이 아픈 것이다. 인용한 첫 연을 보자. 그는 ‘내가 가겠다’라는 표현 대신 “나를 데려가 다오”라는 표현을 쓴다. “그대의 눈 밑으로”, “장남감으로라도”, “집의 한 조각 돌로라도”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한다. “다음 세대가/집으로 가는 통로를 기억하도록”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 말한다. 그런데 “나를 데려가 다오”라는 반복되는 표현 자체가 절실하다. ‘그대’를 위한다는 기꺼운 마음보다는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이 더 커 보인다.

다음 연을 보자. “나를 데려가 다오”라는 반복된 표현이 “집으로 가는 통로”, 즉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고 싶은 절박함을 표현했다면, 이제 “팔레스타인의 그것”이라는 반복은 어떤 결의를 표현한다. 내 가슴 속에 아프게 박힌 “그대의 눈”, 그것은 “그대의 꿈과 시름”, “그대의 말과 침묵”, 나아가 “그대의 태어남과 죽음”, 즉 “팔레스타인” 자체이다. 다르위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그대’를 “내 시의 불로/내 여정의 양식”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비교적 초기 시에 속하는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은 다르위시 시의 출사표와도 같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가슴에 새긴 절박함으로 시를 쓰겠다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도 물론 아랍어의 리듬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구문의 반복을 통해 생겨나는 시인의 결기를 느낄 수는 있다. “나는 시에 있어 노래를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할 때의 다르위시는 아마도 이같은 긴장과 결의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그는 고통을 진정시키는 마취의 노래가 아니라 고통을 선명히 하는 각성의 노래를 짓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대”의 고통으로 “나”를 각성시키는 노래를 말이다. 다르위시가 실제로 평생 추방된 자의 삶을 지속하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는 바로 시가 인간다운 삶의 증표였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죽음을 거부해야만 해,

비록 나의 신화들이 죽어 간다 해도

폐허 속에서 나는 빛과 새로운 시를 찾을 것이다

아…이전에 그대는 알았는가

내 사랑아, 사전 속의 글자는 어리석다는 사실을

이 모든 낱말들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

어떻게 성장하는지?…어떻게 커 가는지?

우리는 아직도 이들에게 추억의 눈물과

은유들…그리고 설탕을 먹이고 있다!


아무렴 그래야지…

나는 장미를 거절해야만 해

사전, 혹은 시집으로부터 오는 장미를

장미는 농부의 팔뚝에서, 일꾼의 손아귀에서 움튼다

장미는 전사의 상처에서 움튼다

그리고 바위의 이마에서…

―「장미와 사전」(밤의 끝, 1967) 부분


“사전, 혹은 시집으로부터 오는 장미”를 거절하고 “폐허 속에서 (…) 빛과 새로운 시를 찾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미와 사전」이라는 시는 다르위시가 생각하는 ‘노래로서의 시’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장미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재현이 불가능하다. 사전 속의 아름다운 낱말들을 총동원하여도 그 아름다움은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다르위시가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불가능이 아니다. 그는 지금, 장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도무지 무슨 소용인가라는 말을 하는 듯도 하다. 다르위시가 생각하기로, 지금 자신에게 절실한 시는 폐허로부터 장미를 찾아내는 일에 투신하는 시이다. ‘장미의 아름다움’을 화석화시키는 “사전 속의 글자”를 거절하고를 알농부의 팔뚝”과 “전사의 상처”로부터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아름 길어 올리는 일을 지속할 때 시가 정말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다르위시는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평생 배반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읽고 자신의 말을 교정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죽음의 푸가」를 읽은 아도르노는 고통도 표현의 권리를 갖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떠한 시도 쓰여질 수 없다는 자신의 말은 잘못이었다고, 고백했다. 다르위시는 평생 시를 통해 ‘고통을 표현할 권리’를 행사하며 “집으로 돌아갈 통로”를 찾은 시인이다. 다르위시는 죽었지만 그의 시는 오랫동안 우리 가슴 속에 “가시”로 남아 폐허 속에서 장미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게 만들 것이다.

 

조연정∙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