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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헤지라 이후, 끝없는 노래의 길/신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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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942회 작성일 11-12-29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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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특집/아시아 시의 매혹/헤지라 이후, 끝없는 노래의 길/신동옥

 

 

2005년 9월, 팔레스타인 시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남성 둘이었다. 신촌의 어지러운 토요일 저녁, 어느 몽환적인 카페. 카펫이 깔린 바닥에 좌식 테이블. 군데군데 커다란 쿠션들. 벽면엔 어지러운 ‘춘화春畵’들. 천장에서 하늘하늘 흩날리는 붉은 잠자리 날개 커튼들. 내게 에스오에스를 친 선배는 특유의 쾌활함이 싹 가신 무표정이었다. 침묵. 이쪽은 이삼십대 혼성으로 시인 여섯.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Shin Dong Ok’라고 써 건네자, 그쪽은 아라비아어로 큼직하게 내 이름을 써 돌려준다. 아라비아 말의 기하학적인 곡선의 율동을 처음 읽은 순간이다. 찰나의 감광感光이 유쾌하고 또 개결하게 이어지는 밤이었다. 시를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하지 말았어야할 말은 이렇다; “한국의 시문학사는 중국의 시문학사에 종속된 것이 아닌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자문화권 가운데 한국의 역사는 고작 100년 이쪽을 빼고는 중국에 정신까지 빚진 것 아닌가?” 화가 났다. 서로의 문화에 대해 캄캄하게 무지한 상태에서 대화는 대치 국면으로 들어갔다. 분노하고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한 것은 내 편에서 더욱 무참했다; “나는 코란을 취미로 읽는다. 당신들의 노래는 당신들의 노래로 남아 있을 뿐 아닌가. 당신들은 왜 여기에 있는가? 당신들은 가자Gaza의 경계벽에 벽보시를 붙이고 있어야할 젊은이들이다.” 서로의 시를 짧은 영어로 자가 번역하면서까지 대화를 이었다. 「제망매가」를 번역하려고 ‘짱구’를 굴리다가 풋, 웃음이 터지고 만다. 우리는 시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시인들이 이렇다. 스스럼없다. 그날의 치기를 생각하면 여직도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젊은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맑은 눈동자가 기억에 남는다. 

젊은 팔레스타인 시인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노래song’, ‘부족tribe’, ‘역사history’였다. 노래와 부족과 역사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건 인류 문명사 만년의 형극과 질곡을 고스란히 일깨운다. 노래와 부족과 역사는 비로소 칼날 같은 각성으로 매순간 스스로를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유랑’이니 ‘디아스포라’니 얘기해도, 그 팔레스타인들의 영혼(그들은 이 단어도 자주 꺼냈다)과 심장에 아로새긴 감각과 정의까지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헤맴이란 역사의 완결이자 노래의 아름다움이자 부족(아랍)의 정의의 과정인 것이다. 이것을 정의의 실현이라 이르면 그들이 아담에게 꿇어 엎드려 하는 말을 헤아릴 수 있다. “저를 헤매게 하였기 때문에 저는 당신의 바른 길에서 인간들을 숨어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뒤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그들에게 쳐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그들의 대다수가 감사하는 인간이 아닌 것을 알 게 될 것입니다.”1) 마흐무드 다르위쉬의 시선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아시아, 2007. 11)을 읽으며 코란의 몇몇 기도의 음성을 노래의 근음根音으로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E. 피츠제랄드의 영역으로 유명한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영혼의 깃대의 펄럭임을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잘랄 앗 딘 루미의 도저한 신비주의의 일자성一者性, 그 비밀한 시원을 느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노래와 부족과 역사와 개인의 영혼, 이것은 이슬람력 제 1년의 시작인 622년 7월 16일, 헤지라 이후에 지금 이 순간까지 아랍을 사로잡는 삶의 주제일 지도 모른다.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생각은 다르위쉬를 위시해서 그 이전에 바드르 샤키르 알 샤이얍, 압둘 와합 알바야티와 다르위쉬와 동시대에 속하는 아도니스를 묶어 읽는 공통되고 일관된 특징이다2). 그들에게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더불어 시작된 역사이다. 종교와 신성이 문명과 동시에 시작된 발원지로서, 아랍이 그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이루어온 삶 전부가 무의식과 DNA에 새겨져 있어서, 그들에게 역사는 ‘하나의 일체화 과정’에 다름 아닐 거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국가는 무엇인가? 물리적인 국가는 역사의 과정에서 일의적으로 스치는 토대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살로 이루어지지 않은 한 나라로 간다.

그 밤 나무들이 우리의 뼈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 바위들이 산 노래의 염소들이 아닌. 그 자갈들의 눈이 붓꽃이 아닌.

우리는 우리 위에 우리만의 해를 걸어 주지 않는 나라로 간다

신화 속의 여인들 우릴 위해 박수를 친다: 우릴 좋아하지 않는 바다, 우릴 좋아하는 바다

당신들에게 밀과 물이 떨어지면, 우리의 살을 먹고 우리의 눈물을 마셔라

검은 손수건들은 시인들의 것. 줄 지어 대리석 조상彫像들은 우리의 목소릴 높여 줄 거다

우리 영혼을 세월의 먼지에서 지켜 줄 탈곡 마당. 우릴 좋아하지 않는 장미, 우릴 좋아하는 장미

당신들에겐 당신들의 영광이, 우리에겐 우리의 영광이. 아! 보이지 않는 우리의 비밀만을 볼 수 있는 나라

―「우리는 한 나라로 간다」 부분


조국祖國이라는 단어가 적확할 것이다.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의 살로 이루어진 나라. 우리의 뼈로 일어선 나무와 숲. 바위는 염소로 더불어 노래를 품고, 자갈은 붓꽃으로 더불어 눈을 뜨는 나라. 조국은 이와 같이 규정이나 고착을 벗어나 미끄러지며 재정의 되는 명사들의 집적이다. 조국은 호명으로 완성되는 어떤 경지 형태의 내면에 다름 아니다. ‘우리’라는 인칭은 항용 아랍의 다른 이름이 되고, 이는 ‘꿇어 엎드리는 자(코란에 따르면 꿇어 엎드리는 자는 천민이다, 깨달음 앞에 놓인 자)’이자 노래하는 자인 시인에게는 단수이자 복수인 1인칭이 된다. 시인에게 조국이라는 낱말은 이렇게 기능한다; “나는 법칙을 깨기 위해 피의 법정에 적합한 모든 말을 배웠다./나는 모든 말들을 배웠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어휘를 조립하려고 그 말들을 해체했다/그것은:조국……”(「나는 거기서 왔다」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문학을 나누는 어떤 세목들에는 ‘무슨 무슨 주의’나 ‘무슨 무슨 이즘’이니 갈래가 생긴다. 당대가 당대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전과 이후는 분리된다. 불연속이 시작된다. 지금을 지금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뇌 속에서 해마hippocampus는 기억이라는 창발적인 오독의 집적을 ‘기능하기’ 시작한다. 언제가 되었든 처음으로 문학에 ‘주의’나 ‘이즘’을 붙인 그 당대의 문학은 처음으로 불연속을 인식한 것이다. 봉합할 수 없는 또는 봉합을 거부하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을 전제로 한 불연속을 인식한 것이다. 이때 쓰이는 문학은 이상이나 사념, 감성이나 감정, 행복과 충일함의 추구, 희망과 완성, 이 모든 것들의 재배치와 통합을 위해 기능한다. 또는 그 역을 위해 기능했다. 가정이 이럴 때 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불연속에 대한 대처와 사념에 다름 아니다. 미추美醜. 문학이 쓰는 자와 읽는 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이러한 기능성에서 출발한다. ‘아도니스의 낭만성’, ‘다르위쉬의 모더니즘’…… 이런 비평적 분류도 문학의 ‘진화’에서 세목을 빌어 보다 눈 밝은 감식안을 제공하고자하는 방편일 것이다. 이러한 문학사적인 방편이 하등 소용이 없어지는 지점이 바로 노래가 태어나는 지점이다. 다르위쉬에게 노래로서의 시는 코란 이후의 모든 시가詩歌를 품어 안는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코란의 ‘메카 계시’의 짧은 읊조림의 문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불케 하는 극시에 이르기까지, 다르위쉬의 시력은 폭넓고 일관된다. 그의 시는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관련된 그의 실천적 행보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의 삶의 기저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다르위쉬는 지사적 감상성에 기대기도 한다. 애초에 노래가 이루어지는 자리는 “조국을 위한 조가弔歌”이자 “그대의 말씀”이다. 시는 “그것을 불러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감상성을 빠져나오며 “순교자와 입맞춤 그보다 더 고귀한 하나의 문장을 쓰리라:/그녀는 팔레스타인의 처녀였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하다!”(「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서)로 나아간다. 이때 노래하는 자로서의 시인은 선지자다. 선지자로서의 시인은 화려함을 지닌 탁월함과 위엄을 영혼에 각인하고 있다. 이는 노래의 특질에 다름 아니다. 헤럴드 블룸에 따르면 월트 휘트먼, 페르난두 페소아, 하트 크레인, 가르시아 로르카, 루이스 세르누다 등의 시인들에게 발견되는 광휘이다.3) 블룸의 분류를 참고하자면, 다르위쉬의 시가 갖는 노래성과 화려한 위엄, 탁월함과 종교성은 이 분류에 해당할 것이다. 다르위쉬의 시에서 노래로서 시가 가져야할 상징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단어는 ‘장미’다. 이슬람의 전통에서 장미는 예언자의 피를 상징한다. 예언자의 피는 꿇어 엎드리는 자의 이마에 떨어지는 순연한 피이자 이슬이 된다. 이 피와 이슬은 시인의 노래의 노래성이라는 청동과 같은 상징에 덧대어진다. 문명이나 종교를 초월하는 공통되고 일반적인 상징 말이다. 다르위쉬는 “아무렴 그래야지……/나는 장미를 거절해야만 해/사전, 혹은 시집으로부터 오는 장미를”라고 노래한다. 이어서 “장미는 농부의 팔뚝에서, 일꾼의 손아귀에서 움튼다/장미는 전사戰士의 상처에서 움튼다/그리고 바위의 이마에서……”(「장미와 사전」에서)라고 쓴다. 예언이 실현되는 곳은 칼날 같이 미분되는 이 현실의 시공간과 그 자장 안이다. 시인은 예언을 받아 적는 자가 아니라, 예언과 간섭하면서 함께 숨 쉬는 자다. 시는 이때 일상적인 종교라는 아이러니에까지 이른다.


무엇도 나를 현실로-흙이 됐든 불이 됐든-데려오지 못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마르칸트의 장미가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달빛 머금은 돌로 노래하는 이들을 단련시키는

무대에서? 우리는 먼 바람 속 우리들의 집만큼

가벼워졌다. 우리는 구름 속 이상한 존재들과도

친구가 되었다…그리고 우리는 정체성의 땅

그 중력에서 풀려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무엇을

우리는 할 것인가, 유랑이 없다면,

그리고 긴 밤이 없다면

강물을 응시하는 이 긴 밤이?

―「유랑이 없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부분


「네 개의 개인 주소」라는 작품(큼직하고 또 아름다운 작품이다!)에서 다르위쉬는 “1. 감옥의 1제곱미터”, “2. 어느 기차의 한 좌석”, “3. 중환자실”, “4. 호텔 방”을 자신의 주소로 든다. 자신의 운명에 새로운 중심을 부여하려는 기도企圖는 경험 속의 주소들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어 “1. 감옥의 1제곱미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것은 문이다. 그 뒤에 마음의 낙원이 있다. 우리 물건들은? 모든 게 다 있지만―엉망이다. 그런데 문은 문이다, 환유의 문, 이야기의 문. 문은 4월을 손질한다.” 다르위쉬가 어떤 장소를 시 속에 불러들이는 방식은 이처럼, 무언가의 질서를 재구조화하려는 기도이다. 떠돎이란 단순이 휩쓸려 다니며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운명론적 체념의 자리가 아니다. 떠돎, 유랑은 그 자체로 재구조화된 중심으로 삶에 기능한다. 인용한 시에서 알 수 있듯. 그 중심은, 흙과 불의 교차로에 있는 현실이라는 지점, 돌과 노래의 교차로에 있는 무대라는 지점, 정체성-중력과 구름을 아우르는 대지라는 지점의 한 가운데다. 시의 부르짖음으로 육박해 들어가며 재구조화하는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랑이 있다. 유랑이 진실을 가지고 전진하는 자리에 장미가 핀다. 이때 장미는 예언자의 피라는 이슬람 상징을 넘어서서 재구조화된 현실의 중심에 피어나는 초월적인 성스러움에까지 이를 것이다. 사마르칸트의 화려한 푸른 모스크와 붉은 장미의 색채 대비를 연상해보라. 진정한 유랑은 진짜 삶에 닺을 내리는 것과 같다. 인용한 시에서 유랑의 지점은 “티그리스 강과 나일 강 사이”,  “파라오의 배”, “사마르칸트의 장미”, “몽골의 준마”, “꿈의 언덕”에 이른다. 스스로 다짐하는 아픈 물음이 있기에 유랑은 “강물을 응시하는 이 긴 밤”에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체현한다.

다르위쉬에게서 노래, 유랑, 장미, 교차점이라는 테마를 좇으며 읽는다. 역사를 묻고 부족을 묻고 인간을 물을 때 다르위쉬는 아랍인으로서 자신, 인간의 삶과 인간의 현상과 인간적 삶의 위치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다르위쉬의 물음은 아프리카 반도의 에이메 세제르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타자화 되며 의미를 소급하지 못하고 미끌어지는 아프리카 니그로의 문화의 의미를 웅숭깊게 되묻는 에이메 세제르의 작업 말이다. ‘유랑’의 의미와 ‘귀향’의 의미와 ‘뿌리’의 의미에 기원과 관점을 덧씌울 때, 미시화하는 의미 물음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다르위쉬는 에이메 세제르와는 또 다른 입장에서 아랍을 노래한다. 다르위쉬의 시에서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단어는 ‘결혼’ 즉 ‘혼인’이다.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다르위쉬는 “나는 꿈꿨어요 어린 나이의 결혼을/눈이 큰 여인을 꿈꿨어요”라고 고백한다.(「사과謝過」에서) 그 혼인과 잔치는 전쟁의 순간에도,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한데 모이는 순간에도, 꿈이 시작되고, 잠이 시작되다가, 죽음으로 파묻히는 순간에도 삶에 끼어든다. 유랑의 한 지점에서 “사랑에 겨워 나 죽으면 나를 묻지 마시오/바람의 속눈썹이 내 묘지가 되게 하시오/진흙마다 내 그대의 목소리를 기르도록/싸움터마다 내 그대의 검을 꺼내 들도록” 절규하며, 결혼과 혼인에 대한 의지는 계속된다.(「십자가 위의 사랑 노래」에서) 부족, 노래, 역사, 영혼, 각성, 유랑, 장미, 교차점, 혼인, 잔치, 총과 칼…… 이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50년 동안 한 시인의 내면을 키우고 지켰다. 이 단어들은 다르위쉬가 압제와 통곡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시적 구심점이 되었다. 끊임없이 현실, 현실, 현실이라고 노래하면서도 특칭의 현실을 넘어서는 작용점이 되기도 했다. 아라비아의 마흐무드 다르위쉬, 이렇게 불러야 다르위쉬의 50년과 앞으로도 계속될 그의 유랑의 나날을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역사는 인간의 미래를 위한 행위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게 한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다르위쉬의 구상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1960년대 이후, 노래하는 자로서의 시인, 예지의 피를 구현하는 시인의 의미는 낡았다는 의미에서 용도 폐기되었다. 케네디와 박정희가 손을 잡은 바로 그 순간이다. 학살과 척살이 보다 정교하게 전술―전략 속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다. 지옥과 같은 대전大戰의 개념이 사라지고, 보다 정교한 소규모 전투와 국가 간 민족 간 명분과 자본을 내건 협잡으로서의 전쟁이 연옥을 TV에 재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다. 자신에게 직접적이고 또 구체적이며 절박한 문제들을 통해 창조력을 발휘하는 노래의 시대는 끝이 났다. 노래는 잠시 잠깐 불렸다 휘발되고, 호출되었다 나달나달해지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다르위쉬는 바로 그 순간 인류의 역사를 역행하며, 세계 난민으로서 팔레스타인으로서 삶을 살았고, 그 유랑의 삶을 노래로 기루어 시를 썼다.

원고를 쓰며 바시르와 왈츠를4)을 다시 보았다. 애니메이션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다룬다. 그 잔인한 학살의 한 가운데 있었던 감독 자신의 트라우마를 역추적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다르위쉬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며, 필자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실사實寫 장면을 떠올렸다. 시체들이 뒹굴고, 그 위로 파리 떼가 검은 구름을 만들고, 울부짖는 여인들, 그 뒤에 세워총 자세로 선 군인들…… 다르위쉬는 그 참화 속의 레바논에 어김없이 있었다. 1972년부터 1982년까지 그는 베이루트에 거주하면서 PLO에 깊숙이 간여했다. 저널리스트로, 문필가로, PLO 대변인으로, PLO 집행위원으로, PLO 문교상으로 활동했다.5) 1982년을 겪고 레바논에서 PLO와 함께 축출되면서 다르위쉬의 유랑은 더욱 처참한 곤경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그의 시는 서사시, 극시로 스케일을 키워간다. 브레히트는 ‘연극은 혁명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르위쉬에게 혁명은 아랍의 역사의 현재가 될 것이다. 아마도 다르위쉬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팔레스타인의 시는 아랍의 역사를 위해 노래해야 한다. 노래는 부족의 일부이고, 부족은 역사의 입각점이고, 역사는 인간의 궁극에 다가서는 리허설이다.

역사는 인간의 궁극에 다가서는 리허설이다.

 

신동옥∙2001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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