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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오늘의 시인/아버지의 죽음 외9편-시론/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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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외 9편
사진첩 속 사진이 퇴색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육이오 전쟁 일사후퇴 때
빙판길 미끄러지며 미끄러지며
찾아간 첫 피난 마을
피난 간 빈집 안방 차지하고
쌀독이며 김치독이며 마구 허는 재미에
전쟁도 잠시 잊은 듯 마냥
흥겹기까지 한 피난민들, 그 속에 끼어서
우리도 하룻밤을 잤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튿날 아침 ,우리 소 우리 소가 없어진 것을.
우리 여섯 식구의 전 재산을 실은 우리 소
놀란 아버지 찾아 나섰지만
소는 이미 어떤 집 마당
큰 가마솥에서 끓고 있고
소의 머리통, 버젓이 전승물처럼 걸어놓고
무법천지 음미하고 있는 그들
“이 소, 우리 소요”
채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 여섯 장정 우루루 몰려나와
‘무슨 개수작이냐’ 며 소주인도
소처럼 요절낼 듯한 아- 그 험한 얼굴들
나는 그 때 보았다.
아버지의 하얗게 질린 얼굴
햐얗다 못해 파아래진 안색
그 안색은 그 후에 회복이 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 하시고
자주자주 깨시던 아버지
의사들은 주사바늘 꽂으며
“신장염입니다. 만성 신장염입니다”
꽤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 후 십 년 동안 곯다가 곯다가 가신
우리 아버지의 정말 병명을
‘물음’ 연가․6
큰 짐 하역하는 대형 크레인의 손가락이
어쩌면 저리도 보드라울까
우리 아기 고사리 손보다도 더 보드랍네
두더지에겐 땅을 파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딱따구리에겐 나무결을 파는 정교한 부리가 있다
사람에겐 존재의 근원을 파는 보드라운 물음이 있다
얼음이 녹아 물방울 되는 모습, ?의 모양이다
슬픔이 녹아 눈물방울 되는 모습, ?의 모양이다
0의 실타래 막― 풀어지기 시작하는 모습, ?의 모양이다
사람들은 한 點 종지부로 우주를 닫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닫기가 무섭게 여는 것이 있으니 ?. ?. ?.
?은 지상 최대의 열쇠일까
네발나비, 뒷날개 아래쪽에
? 모양의 은빛 무늬가 있다 해서
밤늦게까지 찾고 찾던 날 밤
나는 꿈속에서 구멍 숭숭 난 색안경을 썼다
막걸리 頌
불콰한 얼굴에 불콰한 웃음
아이들 만나면 넓은 바다가 되고
노인들 만나면 대추 빛 노을이 되고
여자들 만나면 군고구마 따뜻한 내음이 되는
정겨운 주신酒神이여
왜 북풍이 당신을 보면
흐물흐물 밑이 풀어지는가
나는 알고 있지
우리 동리 크고 작은 시비是非들
누가 가려주었는지
“논은 타들어가고
물은 병아리 오줌만큼만 흐르고
무례할래서 무례했겠오. 거칠래서 거칠었겠오
설날 당신 앞에서 이렇게 주고받는
떡국들 이야기 들으면서 나도 한마디 했지
“너희들 화해 안 하면 주욱여”
소주가 불이라면 막걸리는 흙이리라
화끈하게 목을 태우는 맛은 소주가 났지만
아무래도 나는 흙 체질, 막걸리 편이다.
감치는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텁텁하게 흐려있어 요즘 아이들은
목 고개를 넘어 위胃의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평가절하 하려드는 것 같지만
위를 거쳐 장腸, 장을 거쳐
전국 방방곡곡에 이를 때까지 한 번 기다려 보라
흐림 속의 맑음과
텁텁함 속의 개운함이 지기地氣를 닮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밤새도록 풍류와 담소를 쏟아도
시의 가슴 화로는 아침까지 뜨겁기만 하다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술이
이 세상에 막걸리 말고 또 있을까
오늘도 나는 해가 실풋하면 이십일 세기
전세계의 젊은이들을 뜨락에 불러놓고
맛과 영양이 고루 섞인 우리의 술
사람의 체질을 꼭 닮은 우리의 술
동동주 막걸리를 함께 들며
세계의 평화를 아리랑으로 푼다.
국경 너머엔
늙은 알콜―중독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부러운 듯이 부러운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방충망 엘레지
파리 한 마리 방충망에 붙어
방안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호시탐탐
혀 휘둘러도 숭어의 볼그레한
가슴살엔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두 손 비벼대도
소금 뿌려 창가에 걸어놓은
비릿한 젖은 살엔 닿지 못한다
그래도 포기 하지 않는 그
히― 웃으며 방으로 들어와
신문 잡지 뒤적이다가
한참 후에 나가보니 그 때까지
두 손 비비고 앉아있다
“질긴 녀석” 혀를 차며 다시 들어와
K씨의 소설 ‘방충망과 법망’ 읽다가
한 시간 쯤 뒤에 나가보니
그땐 가고 없다
그러나 적어놓고 간 글귀 하나
“방충망에 갇힌 인간들 퉤―”
꽃과 종
종은 하늘에 심은 꽃이고
꽃은 땅에 매단 종鐘이다
봄의 꽃동산에서
종소리를 들으면
꽃의 무한을 종소리가
전하고 있는 것 같다
높은 종루鐘樓에 올라 종을 치면
종소리의 무한을
발아래 무수한 꽃들이
전하고 있는 것 같다
두 소리의 끝이 맞닿아
아득히 하나 되는 자리
분명히 들리는 한 소리 있다
‘꽃과 종鐘을 결혼케 하라’
신농씨의 봉변
“네 평 땅에 심은 상추 쑥갓 아욱
세 집이 싫건 먹고도 남았소
감자 한 쪽 쪼개 심었는데
두 달 사이에 열 개가 되었소“
“팔자 좋은 소리 마시오
농사가 그리 쉬운 줄 아시오
등골 빼먹는 것이 농사요“
앞의 소리는 밭의 소리이고
뒤의 소리는 시장市場의 소리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 소리만 커진다
이러다간 밭의 소리 영영 죽을 것 같아
신농神農 씨가 한마디 한다
“농사農事 쉽지 않을 때도 그렇소
땅의 이자利子는 믿어도 되오
아기 손톱만한 호박씨 하나 심었는데
석 달도 채 안 되어
장군 머리통만한 호박 다섯 개가 열렸소
흥부네 집 호박만이 아니오
놀부네 집 호박도―”
시장 안 잠시 조용한듯하더니
다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다
“병신 바보 미친놈 개 같은 놈
아가리 닥쳐”
애저
어미돼지 배 속의 새끼
맛이 기가 막힌다고들 하지만
이상한 비린내 역겨워
먹지를 못한다
생강을 찧어 넣고 청주를 붓고
오래 끓이지만 이상한 비린내
끝내 가시지가 않아
또 퇴― 하고 만다
‘애저는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최고급 보신으로 먹는 것’이라며
비장한 독주毒酒 내오지만 소용 없다
나긋한 씹힘
왠지 애를 삶아먹는 것 같아서
엑― 왝― 또 토하고 있노라면
앞에 앉은 장인丈人 될 분 표정이 영 안 좋다
“그런 비위 갖고 어떻게 세상을 사냐
너 같은 놈에겐 딸 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십 년 전의 일
비선대飛仙臺에서
선녀 나린 자리일까
오른 자리일까. 오뚝 솟은
콧날 바위도 예쁘지만
옥계玉溪 살결 더욱 곱구나
그러나 황종규 황종림
김병영 김병기 형제들을 위시해서
많은 이름들 많이도 새겨있다
그대로 두었으면 맑은 속살
소곤대는 숨소리 들릴 듯도 하건만
찢고 깎고 헤집고 아 상처투성이―
허지만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
아름다운 여체女體 보면 ‘내 이름’
새겨 넣고 싶지 않은 이 있는가
이 때
느닷없이 불어오는 내설악 강풍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봄바람이
캉― 콧물을 이르켜
성대聲帶로 통하는 길을 막아버리네
노래와 노랫말
노랫말이 물 위로 솟자
노래가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노래가 물 위로 솟구치자
노랫말이 어디로 가고 없다
노래방에선 고래고래
고래소리가 진동하고
강단講壇에선 노랫말이 핏대를 올린다
영천靈泉 매립지엔
노래와 노랫말의 이혼을 부추기는
메탄가스가 스며올라오고
황토색
철교가 황토색이 되어간다
철마鐵馬도 황토색이 되어간다
폐타이어도 황토색이 되어간다
바래지고 바래지고 또 바래져
더 이상 바래질 것이 없는
백발白髮도 죽어 황토색이 되었다
황토색 틈새로
갑자기 보이는 초록별 하나!
마른 잔디풀숲 사이로
하나 둘 보이는 초록빛 새싹들
하 그렇구나
하늘― 천天 따― 지地가
초록빛 낳는 누루― 황黃이었구나
시인이 넘쳐난다. 유행가수도 시인, 개그맨도 시인, 음란물 각색자도 시인, 과대광고 푸로듀서도 시인,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이름 날리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것 같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름 부풀리기 기법은 더욱 기묘해지는 것 같다. 시인이라는 이름이 창피할 때가 있다. 얼굴 화끈거릴 때가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인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神話를 거쳐 신학神學을 거쳐 계몽시대를 지나 낭만시대를 지나 큰물로 들어서는 서양문명과 희비애락 구비구비 돌고 돌아 큰 강물이 되고 있는 동양문명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간간히 들리는 새 물결소리가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일까.
석탄 석유 우라늄 싸움으로 번지던 큰 싸움이 지진 해일 쓰나미에 된통 얻어맞더니 태양 에너지 바람 에너지 물결 에너지로 눈을 돌리며 송곳 철학이 부엌칼 철학이 되고 머리 따로 가슴 따로 놀던 몸이 한 몸 되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기 때문일까
높은 흥분으로 오히려 눈이 맑아져, 만물 속의 생명을 보다 그윽이 바라보게 된다는 그 시인의 말이 나의 귀를 잡고 놓지 않기 때문일까
마른 갈비뼈 사이로 운명을 영접하여 죽은 형이상학도 다시 살려놓는다는 그 시인의 맑은 눈빛이 나의 눈을 잡고 놓지 않기 때문일까
뿌리의 엄숙에서 솟는 침묵의 탑, 온 나무에 탑을 세우는 시인, 죽어서까지 많은 젊은 시인들에게 푸른 탑을 세워주고 있는 그 시인에게 나도 많이 끌리기 때문일까
돌처럼 굳어진 마음도 큰 회의로 풀면 어머니―지혜가 된다는 그 시인의
대의심大疑心에 나의 작은 물음들도 합류하고 있기 때문일까
키쓰가 지혜보다 나은 운명을 보장해준다는 그 시인의 높은 농弄에 만물과 입 맞추고 싶은 나의 본능도 은연중에 합세하고 있기 때문일까
순수무지의 순수 노래, 내용 없는 순수 넌센스를 노래하는 그 꿀벌 시인의 날갯짓에 내 날개도 조금은 들썩이기 때문일까
쟁기에 잘리는 벌레를 보면서 많이 아프다가도 다음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에 들곤 했다는 이천 오백 년 전 그 시인의 큰 사랑이 나에게도 조금은 닿아있기 때문일까
산상수훈의 그 시인, 그의 절대고독이 나에게도 조금은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측은지심이 머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발로 가슴으로 뻗어 행行으로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옛날 그 시인들의 따순 맥박이 나의 유전자 속에도 조금은 뛰고 있기 때문일까
저주의 땅도 시로 개간하면 축복의 포도원이 된다는 그 시인의 말을 상기하며
시간의 홍수에 모든 것 다 떠내려가도 아름다움은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그 시인의 말을 반추하며
커피 한 잔 진하게 하고 비틀비틀 찾아가는 장례식장 영안실. 조화弔花에 둘러싸여 절 받으며 향 받으며 난생 처음 사람대접 받고 있는 영정 속 친구와 작별인사 오래 하고 떠들썩 시끄러운 조객들 사이에 끼어 쓴 술 한 잔 또 한 잔 기울이다가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 나 가장 정신 맑다. 커피에 취하고 술에 깰 때 나 가장 정신 맑다. 중천에 뜬 달이 이백李白과 함께 나를 동행해주는 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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