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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집중조명/ 쓸쓸한 고백 외 4편/ 이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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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17회 작성일 11-12-29 23:06

본문

  이채민

 쓸쓸한 고백 외 4편



나는 분명 그로테스크하다

이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화성에서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와 준

남자를 위해

부서진 알몸으로

기꺼이 대나무잎을 흔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대통 속으로

기어들어가 수액을 빨고

투명한 햇살을 끌어와 손뼉을 치고

바람도 가르지 못한

완벽한 하나의 물방울이 된 것처럼


멀리서 날아온 멍텅구리 새들이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

이 울타리를

언제나 떳떳하게 펼쳐놓을 수 있을까

벼락이라도 맞아 부끄럽지 않게 된다면

나, 기꺼이

치자꽃 향기 뭉개어 바르고

또 다른 화성의 남자 깊숙이 끌어안고

천국의 계단에서 

벼락, 왕창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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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호, 그녀의 여름



케냐의 새끼 코끼리 캉가는 

어미 코끼리가 학살당한 충격으로

밤새도록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래서 군복을 벗으면, 제일 먼저

캉가를 만나러 가겠다던 그녀 아들의 목소리는 이미

나이로비의 푸른 초원을 날아가고 있었다는데.


아침밥을 먹기도 전에

혼자 사는 그녀의 현관에 떨어진 전보쪽지가

나풀거리며 복도에 안착했다

 ‘남00병장 순직’

그 후 701호 현관을 통해

몇 개의 눈알과 열 개의 이빨이 빠져나가고

시냐크 앞에서 발작하던 고흐의 모습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다행이 귀는 자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심장을 도려내고 싶다고 했다


열흘 후면

아들과 함께

캉가의 악몽을 달래주려 했던 그녀는

누르스름한 빛깔로

정수리가 깨진 듯이 몹시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내내

701호 현관에서는 아프리카의 눈물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1초에 한 마리씩 그들은 죽어간다


코트를 위해 순식간에 껍질이 벗겨지는

여우와 밍크

전깃줄을 입과 직장에 넣고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두 개로 분리된다

가죽이 벗겨진 하얀 알몸에서

수천만 개의 붉은 실핏줄이 드러나고

수천만 개 피의 강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별자리판 하나 얻지 못한 슬픈 운명들은

벗겨진 자기의 분신들이 지금

화려한 백화점에서, 변두리 상가 윈도우에서 

배꼽이 없는, 음모가 없는 여인의 몸을 감싸 안고

대 바겐세일, 폭탄세일, 눈물의 땡처리를

끈덕지게 호소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옷장문을 열자

유일하게 내가 만든, 황폐하고 좁은 거리에

은회색 밍크 몇 마리가 서로의 절망을 끌어안고 

배회하고 있음을

창이 없어, 부서진 햇빛 알갱이 하나 들어오지 못하는

검은 상자 속, 그곳에

 

아메리카 대륙의 푸른 철책을 기억하는

눈 코 입이 빼곡히 박혀있음을

왜 진즉 보지 못했을까


등골에서 붉은 강줄기 하나가 서늘하게 지나갔다

 

 

 

 

 

개와 같은 사람이 그립다


 

유월 폭양이었다

벗은 채로 운동장 가운데 서 있었다

스무 살 나이만큼 통통한 햇볕 주렁주렁 매달고

하염없이, 기다림과 맞짱 뜨고 있는데


처음으로 씨앗을 심어보고

싹을 틔우고, 그 설레임에 땀 흘리며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개를 닮은 그의 어깨 위에서

흐벅지게 물든 꽃잎 한 장이 

실눈을 뜨고 나불거렸다

맞짱 한 번 떠 볼래?


햇빛이 땅 속으로 휘어들었다

허공으로 치솟은 한쪽 귀에 화살이 박히고

목구멍에 걸려있던 욕 한 사발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사람이 뱀보다 징그러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주인에게 일생을 걸고

복종과 순종 밖에 모르는

진돗개, 풍산개, 시베리안 허스키, 막내처럼 키우던 푸들과

치와와 그리고 똥개라고 부르는 진짜 개들의 순정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개를 어설프게 닮은 사람에게는 욕 밖에 줄 것이 없다

오뉴월 논두렁에 황소개구리마냥

 

그래서 욕들이 세상에 득실거리고

수상한 외로움과 마주섰을 때

사람들은 진짜 개 같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만사는 형하고 통한다



작은 키와 작은 체구는 도무지 화려한 변신이 되지 않는다고

두바이에 사는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높이를 공개하지 않는 세계 최고의 빌딩 부르즈 두바이에서 열리는

왕족들의 만찬에 초대 받고 며칠 전부터 고민 중

작다고 주름이 적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세월이 비켜서지도 않는 것이, 조금은 억울한지

한참을 조상님을 들먹이며 모래바람을 날리는 그녀에게


―동생아! 네가 너무 변신을 해서 나타나면 그 파티장에서 널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려구 그래 그리고 두바이 왕족들이 한국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너의 그 빼어난 미모에 일부다처를 거느리는 왕족 하나가 청혼이라도 하면 어쩔래? 나는 작아서 비도 적게 맞고, 추위도 덜 타고, 작아서 덜 우울하고 덜 외롭고 덜 배고프고……


―그러게…… 역시 만사형통이네


금새, 햇살 묻은 목소리가 페르시아만을 가볍게 건너와 곁에 앉는다

뚱딴지 같은 왠 만사형통?

인터넷 검색란에 만사형통을 쳐 보았다

‘만약에 사건이 생기면 형하고 통화한다’

‘만사는 형을 통해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동생들아 물어볼 게 있으면 게시판에 묻지 말고 형한테 전화하거라’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형한테 전화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작은 몸에서 시베리아 칼바람소리 왜 자주 들리는지

하루에 7잔의 커피를 왜 마셔야 하는지

한 자리에 왜 오랫동안 앉아있는지

오지 않는 전화를 왜 기다리는지

두통은 왜 자주 힐끗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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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은 역지사지의 경지



어느 날부터인가 귓가에 익숙하게 들리는 말이 소통이다. 소셜네트워크, 트위터, 펠로우…… 살겹고 그리운 이웃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데 또 한쪽에서는 불통의 볼멘 소리가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소통은 다수와 소수가, 자연과 인간이, 강자와 약자가 서로의 의견을 들어주는 한 마디로 역지사지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뒤집어보면 빈자가 부자를 이해하고, 약자가 강자의 외로움을 다독여주고 보듬어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허용하는 넓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이 궤변 같은 넋두리가 격자 원고지에 비만한 몸을 구겨 넣는 것은 아닌지 머쓱해질 때가 많다. 나에게도 은밀히 저 우주의 성감대에 가닿는 비밀통로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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