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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집중조명/ 눈썹 외 4편/ 박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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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봄
그해,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들른 미용실에서 문신을 싼 값에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누나와 내가 어린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유월의 독서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그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에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셨던 유월이었다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나를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을 뚝뚝 뜯어 넣는다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청파동․13
저녁이면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주공아파트 단지를 돌며 배달을 했다 성동여실 여자애들은 치마통을 바짝 줄여 입었지만 안장을 높이 올린 오토바이에도 곧잘 올라탔다 황달을 핑계로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책상 밑에 있는 내 침통이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집을 나온 연화는 가난한 엄마의 광대와 먼저 죽은 아버지의 하관下觀을 훔쳐와 역에서 역으로 떠났다 벌어진 잇새로 함부로 뱉어낸 시절이 후미진 골목마다 모여 앉아 흰 허벅지를 드러내 보이며 낄낄낄 웃고 있었다
독
몇 해 전 장마 끝에 수로로 넘어온 향어를 건져 독에 넣고 키웠다 할머니는 벌레나 미꾸라지 같은 것들을 손수 잡아주었다 어느 날 향어가 병이 들었는지 비늘이 헐고 흰 배를 내보이며 기울었다
굵은 소금과 고춧가루를 한 움큼 독에 뿌린 것은 할머니였다 며칠 후에는 향어의 굽은 등이 펴지고 비늘에서도 다시 윤기가 났다 죽어버리고 싶던 순간들은 죽을 것 같이 아픈 일들로 어루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래 독을 들여다보던 할머니도 잠깐 허리를 폈다
시작메모
청파동에 나가면
청파동 사람들이 찾은 최초의 종합병원은 사실 동네에 있던 작은 의원이었습니다. 의원에 가면 배가 아픈 사람도, 눈이 가려운 사람도 감기에 걸린 사람도 포경수술을 하러 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정말 복잡한 것이지만 또 어느 방면에서는 단순하기 그지없습니다. 음식을 적당하게 먹고, 물을 많이 마시고, 몸을 따듯하게 하고, 손을 깨끗하게 씻고, 잠을 충분하게 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앓는 대부분의 병이 사라집니다. 의원에서 주사를 한 방 맞고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 속도가 더 빨라졌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 의원을 다니면서 아무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낫지 않는 병이 있었습니다. 아픈 곳도, 아픈 일도 점점 많아지는 병, 저는 그 병을 ‘엄마 병’이라 불렀습니다. 청파동 엄마들이 가슴팍에 안고 갔을 약봉지, 그 안에 빨갛고 푸르고 노란 알약들의 빛깔이 청파동 아이들의 눈에는 야속할 정도로 곱고 예쁘게 비쳤을 것입니다.
―2011년 7월 10일 시작메모 中
요즘은 청파동으로 자주 나가서 시를 씁니다. 오래된 서울 동네들이 다들 그렇지만, 청파동에는 시가 될 만한 것들이나 시보다 좋은 것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은 문을 닫은 작은 의원醫院입니다. 저의 요즘 시작詩作은 위의 글과 같은 상상과 생각을 하다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이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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