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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집중조명해설/문학, 그 지질함의 물화, 혹은 ‘쓰기’의 중단―박준 신작시의 밀도/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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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17회 작성일 11-12-2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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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집중조명해설/문학, 그 지질함의 물화, 혹은 ‘쓰기’의 중단―박준 신작시의 밀도/장이지

 

 

 

1. 인간실격/죄의식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실격(1948)에는 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쉽게 상처 받는 실격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순수하고 상처 받기 쉬운 영혼으로는 치사한 술책과 처세술이 범람하는 동정 없는 세상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 오히려 이렇게 각박한 세계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것이야말로 ‘병적’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실격의 진정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연극을 하는 것이야말로 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실격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 ‘죄의식’에 가닿게 된다.

    어느 날 박준의 시를 읽다가 다시 그 ‘죄의식’에 부닥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다소 의외라면 의외가 되는 사건이었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2009)이라든지 「꾀병」(2010)이라든지 하는 시에는 ‘미인’이라 불리는 여자가 등장하고, 내레이터인 ‘나’는 그 여자에 기생하는 무능한 남자로 그려진다. 이러한 구도는 다분히 1930년대의 이상李箱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상 소설의 동거나 기생이 자본주의의 비대해진 교환 논리에 대한 풍자를 위한 세트 구실을 했다면, 박준 시의 동거나 기생이 풍자하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도 박준의 시에는 풍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풍자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죄의식’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다.

   2008년에 문단에 등장한 박준이 미래파의 작풍에 휩쓸리지 않고, 문학 그 지질함을 동거나 기생의 클리셰 속에서 매우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미래파 이후의 젊은 시인들이 저마다 언어의 어떤 이질감을 강조하려고 한 것에 비할 때, 박준의 이 구태의연하면서도 진지한 고투에는 사뭇 성실함마저 느껴진다. 아니, 그것을 구태의연함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본령’인지도 모른다. 참된 질료를 구성하는 것은 언제나 그 내용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죄의식이라니? 가령 인간실격의 죄의식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준 시에 나타난 죄의식은 어떤 맥락에서 유래한 것인가.

 

2. 물화한 것의 정체, 혹은 체험의 밀도

    박준이 쓴 가작 중에는 「동지」(2010)라는 시도 있다. 이 시는 동짓날 팥죽을 함께 먹어야 했지만, 남녀가 작은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끓여 나누어 먹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는 ‘농담’이 아닐뿐더러 매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 시에서도 남녀는 여자가 직장 생활을 해서 생계를 담당하고, 남자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이 동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내레이터인 남자는 원래 팥죽을 싫어한다는 둥 여자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여자는 라면을 게걸스럽게 먹는 남자에게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나” 보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남자는 여자의 일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먹은 것은 체한다. 여자는 남자의 손가락을 따주고, 남자는 손가락 끝에 맺힌 피로 여자의 이름을 적어본다.

    이 혈서 쓰기의 장면은 담백하기 때문에 애달프다. 어떤 티끌도 묻어 있지 않은 장면이다. 혈서를 위해 손가락 끝을 베어내고 과장 섞인 몸짓으로 쓰는, 혈서의 맹세를 위반하기 위해 쓰는 혈서와는 전혀 다른 것을 박준은 그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피로 여자의 이름을 적는다. 이 붉은 마음은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않는다. ‘당신’은 종로로 나가고 내레이터인 ‘나’는 그 자리에 누워 꿈을 꾼다. 박준은 보여주지도 않을 비장감 없는 혈서를 쓴다. 혹은 그것을 여자에게 보여주어도 전혀 반향이 돌아오지 않는 혈서를 쓴다.

    이 무용한 행위를 통해 시인은 시간을 견딘다. 무능한 남자의 ‘지질함’은 꿈에서 ‘당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물화되어 나타난다. ‘긴 머리카락’은 현실 공간의 추레함을 재현한다. 그 현실 공간이 꿈을 통해 시에 틈입할 때, 그것은 여자의 부재, 여자의 희생을 암시하는 징표가 된다. 남자는 ‘봄의 들판’을 꿈꾸고, 봄이 도래했을 때, 여자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우울해진다. 박준은 이 우울한 시간을 1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긴 어둠의 시간, ‘동지’라고 말한다. 여자가 영영 떠나버린 시간이 동지가 아니라, 여자가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준 시에 나타난 우울증적 양상과, 무능한 삶의 물화로서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왕년의 백석이 생각난다. 「통영」의 내레이터는 ‘천희’라는 여자를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난다.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러운 방’이다. 그 더러운 방에서 여자를 만나야하는 남자의 여수 또한 그 ‘생선가시’의 물화는 내포하고 있다.

누구나가 다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므로, 이제 가난은 매우 상투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지만, 가난은 어떤 동정심으로만은 그릴 수 없는 것이다. 가난의 재현은 어떤 세목들을 필요로 한다. ‘물화’가 필요하다. ‘물화’는 구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추상화하는 것이다. 시인은 현실 공간의 스케일을 추상화를 거치지 않고 2차원의 평면 공간으로 이식할 수 없다. 시인은 현실 공간의 특정한 사물에 시선을 주고, 다시 되비쳐오는 시선에 의해 자신의 감정을 그 사물에 투사할 수 있다. ‘긴 머리카락’ 그 자체가 가난의 상징이거나 추레함의 상징인 것은 아니다. ‘긴 머리카락’을 통해 시인이 받았을 느낌을 유추할 때, 그것은 가난이나 추레함과 결부되는 것이다.

    「광장」(2010)에서도 박준은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노랗게 마르는 시간을 통해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이 서서히 퇴색해가는 시간의 침식을 물화하여 보여준다. 거기에는 노랗게 바래가는 빨래들을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 나름대로 의미를 따져보았을 시인의 현실 경험이 개입해 있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박준의 공간 재현은 이처럼 체험의 밀도에 있어서 망상이나 환상에 의존하는 동시대의 경쟁자들을 압도한다.

 

3. 무용한 시간의 공간 재현, 그리고 쓰기의 중단

    어머니의 눈썹 문신이 초래한 가족의 불화에 대해 적고 있는 「눈썹―1987, 봄」 역시 어떤 물화의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이때 문신으로 새긴 눈썹은 다시 원상 복구할 수 없는 어떤 흔적을 육체에 기입한 것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운명, 잘못 기입된 초라한 운명의 징표라고 할 수 없을까.

    물화를 거친 대상들은 차츰 ‘미신’이 되어가고, 박준은 이와 같이 물화된 대상들 앞에서 더욱 의기소침해진다. 박준 시의 내레이터들은 패기가 없다. 「동지」의 내레이터는 피를 흘리면서도 비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띠고 있지 않다. 여자가 식충 보듯이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여자에게 화를 내고, 피를 흘리면 비장한 포즈를 취하는 것은 마초 기질이지 패기와는 무관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박준 시의 내레이터들은 수줍은 듯한 몸짓으로 여성 앞에 선다. 그들은 그녀들 앞에 시를 적은 쪽지 같은 것을 밀어 놓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광장」).

    사정은 「유월의 독서」도 마찬가지다. 박준은 ‘산자락 아래의 집’을 공간 재현한다. 그 집에는 ‘눈 밑에 작고 새카만 점이 난 여자’가 살고 있으며,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다. 내레이터는 그 여자의 ‘새카만 점’에서 일 년은 살았다고 고백한다. 이 ‘눈 밑의 점’은 나중에 ‘집의 불빛’과 이미지 중첩되므로, 이 거주의 환유에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이 환유는 다시 ‘울음’의 이미지로 미끄러진다. 궁극적으로는 ‘산자락 아래의 집’은 ‘눈 밑의 점’이 되고, ‘마당’은 실로 울 만한 장소가 되므로, 이 시는 온통 ‘울음’에 관한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집에서 내레이터는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고 고백한다. 남자는 여자가 있는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눈 속의 물기’를 말리고 있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책을 열어도 책을 덮어도 눈이 부신 세월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람의 슬픔인지도 모른다. 박준은 그렇게 무와도 같은 시간을 공간 재현했던 것은 아닐까.

    박준 시에 나타나는 죄의식은 바로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다분히 자본주의적 비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박준 시의 내레이터는 무엇이라도 써야만 한다.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와 같은 엉성한 비문을 남자는 여자에게 내민다. 남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 본다(「광장」). 그 정도의 경구는 시에 미달한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준 시에 나타나는 죄의식은 ‘쓰기의 중단’으로 가장 음울하게 그려진다. 「꾀병」은 “나는 유서도 못쓰고 아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오래된 저녁」은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구들에 불을 지피러 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래된 저녁」에 이르러 박준은 여자에게 빌붙어 살기를 그만둔 남자의 후일담으로 넘어가는데, 이 ‘쓰기의 중단’이야말로 오히려 여자와의 관계가 ‘중단’된다는 의미를 선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를 썼지만, 그것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이야말로 박준 시의 성실함이라고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선택’은 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완성한다는 것은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능한 인생을 연극화해버리는 일이다. 시를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위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박준은 그런 포즈를 포기하고 시의 윤리를 택한다. 그는 여전히 ‘당신의 연음’에 대한 감각을 떠올리며(「오래된 저녁」) 오랫 동안 지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오래된 저녁’의 고독한 시간을 견딘다. 한 번 끊어진 마음(‘맥박’)은 잘 이어지지 않지만.

 

4. 감각과 시간에 대한 부기

    박준이 경험의 재현에 있어서 다른 젊은 시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 것은 그가 ‘시간’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박준은 감각적인 것과의 교류에서 유래하는 표상으로서의 ‘시간’을 문제 삼는다. 이때의 시간은 공간과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을 산출한다. 가령 「눈썹―1987, 봄」을 보자. 박준에게 이 재현 공간으로서의 기억이, 이 시간이 왜 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앞에서 그것은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시간의 불가역성이 빚어내는 운명성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1987년 봄의 재래, 다시 말해 그 운명적인 ‘기억’이 망각 속에서 다시 작품의 시간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을 거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오래된 저녁」의 ‘느릅나무의 푸른 불길’이나 ‘연음’과 같은 감각적인 것들이 ‘쓰기’가 중단된 시간을 에워싼다. 수제비 반죽을 뜯는 촉각적인 감각도 여기에 가미된다. 이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시간을 에워싸게 한다는 데 박준 시의 뛰어남이 있다. 「유월의 독서」에 등장하는 ‘산자락 아래 집’에 대한 공간 재현은 공간적 표상들을 산출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현실을 극히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월의 독서」나 「오래된 저녁」을 영화와 같은 장면 장치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재현해 놓은 것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인 아이템들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준의 공간 재현이 궁극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러한 추상화된 공간 너머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우리가 흔히 수치화하고 계량화하여 재단하는 시간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의 교류 속에서 뛰쳐나오는 것이어서 희귀한 발견이다.

    박준은 시간과 무관하거나 시간이 멈춘 공간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시간은 감각적인 것들과의 교류 속에서 뛰쳐나온다. 감각적인 것들은 몸을 필요로 한다. 그의 시가 경험적이라고 한 것은 이 ‘몸’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시(문학)를 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이 그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알리바이로서의 쓰기를 중단한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쓰는 것은 위선이거나 위악으로 귀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 쓰기의 중단이라는 방법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시간을 감각적인 것들 속에서 뛰쳐나온 ‘진정한’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다시 말해 쓰기의 중단을 통해 시쓰기가 가능해진다. 그의 시간은 아무래도 어른들의 치사한 세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의 시간이 자기만의 세계로의 침잠이나 퇴행과도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쓰기의 중단이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낭떠러지에 선 문학에 대해 더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문학은 아직 ‘연음’을 발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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