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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기획 젊은 시의 징후를 찾아서/ 서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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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의 약국 외 1편
우리는 왜 약국으로 왔을까? 문 닫힌. 가루약 먹기를 그만두고 알약을 먹을 때부터 예감된 병이라면, 약 먹을 시간이 지났는데 우리가 아직도 약국인 이유를 아니?
아직 병원엔 무서운 것이 많아서. 아픈 곳은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해서. 우릴 아프게 하는 것들은 다 똑같아서. 건강했을 때를 떠올린다. 스물의 문턱을 닮은 약국의 문턱.
그동안 방해 투성의 여정이었다. 다칠 수 있는 위험과 아플 권리는 충분했지만 아프지 않았다. 몸살을 앓던 것은 뒤척이던 학교와 잘못 처방된 책이었을 뿐.
비겁한 증상만 생겼다. 약에 의지해서 나약해진 우리들의 비약. 약이 남고 우리가 녹아버리면 알아 봐줄까? 엄살은 도통 약발을 받지 않는데
그나마 우리가 가진 가장 건강한 부위니까. 약국 문은 열리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에 아픈 줄 모르는 것. 여기 스물들은 왜 두드러기를 안고 살았을까.
전염은 아닌 것이, 스물에서 발치된 방치관의 마음. 잘난 척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정말 잘난 사람. 어른인 척 하다가 소화 불량으로 답답해서, 답답해서.
풋사과도 농약 없이 농염해질 수 없는 시대. 새벽녘에 문 연 약국은 거의 보이지 않고, 통증들을 안고 지상의 골목으로 흩어진다. 진통하는 도시의 소음. 우리의 다문 입 닮았고
면역력은 질투에서 오지만, 너무 믿었다. 건강한 얼굴 속에 헬쓱한 표정 거둬 줄 약 좀 주세요. 약이요? 네 귀와 입 속에 있는 것은 뭐죠?
약봉지처럼 구김살 많은 스물. 서른에는 더 큰 약국으로 가나요?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약사보단 환자이고 싶은 마음이군요.
해변으로 독립하다
늙은 콘트라베이스.
파렴치한 꽃.
발가락들의 무덤.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락 없이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맨 몸으로 서 있다. 폭풍우를 타고 왔다.
더 이상 흘러내릴 것도 떠나보낼 것도 없는
차분하게 소라처럼 앉아 파도 소리를 녹음한다.
직업을 구해야 하고, 부모를 구해야 하고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소년의 바다와 어린 당신의 바다들이
안녕하게 다시 만나 해변을 이루고
발목까지 나를 담갔다.
밀물에 발목의 싱싱함을 가늠하는 소일거리로
버틸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가엾은 아가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불안한 마음으로 날씨를 걱정했다.
외투를 챙겨준 부모를 등지고
애인에게 그 외투를 벗어주던 체온들이
나를 어른스럽게 만들었다는 착각과 배신.
유목과 유랑, 유령처럼 풍경을 빚지며
떠도는 일은 이미 지쳐버렸다.
불편하더라도 쓸모 있는 구역이 필요했을 뿐.
(이곳으로 온 이유는 명백히 늘어만 간다.)
누군가 지어놓고 찾아오지 않는 통나무집처럼
나에겐 들리지 않는 오래된 해적 방송처럼
방관자가 되고 싶다.
바다보단 주변을 맴돌며 뒤돌아보고 싶다.
찍힌 발자국들이 온전히 다시 떠오를 때까지
보호받던 시절이 어쩌면 더 위험했음을
빈 팻말까지 산책하면서, 조금 무서워하면서.
바다 속에서 집 짓고 사는 손발 쭈글쭈글한,
용감한 이웃들의 거둬가지 않는
신발 빨래들과 같이 햇빛에 미안한 마음으로
내 살갗을 벗겨 말리는 뜨거운 시간일지라도
돌아갈 곳, 하물며 떠나온 곳을 서서히 잊어버리는 것이
해변이 들려준 말.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불시에 말하는
이곳의 외국어를 듣는 일.
여기저기, 무언갈 기념하듯 폭죽 터지고
나를 닮은 소년들이 백사장을 뛰놀 때
같은 바다에서 다른 생각 했으므로
우리는 거기서 달라진 것 같으므로
누군가 버리고 간 백사장의 콘트라베이스가
해변에 피어난 꽃처럼 들리고
단단하게 쌓여있는 모래처럼 만져질 때
다시, 백사장에 모래찜질하며
씨앗처럼 누워, 나의 뿌리를 생각해 보는 것.
그 다음 사람이 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나는 해변으로 돌아왔을 뿐
돌아왔는데 모든 것이 낯설어 질 때
그것은 독립이었을까.
그것은 고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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