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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기획 젊은 시의 징후를 찾아서/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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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왕은 소년처럼 웃는다 외 1편
이곳은 우기야 몇 년째 비가 내리지 않고 있어 혹은 태양이 뜨지 않는 한여름이야 어쩔 수 없네요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지요라고 답하지 이곳의 아침 인사야 무력한 것들이 서로 바라보는 시선 왕국의 뉘앙스랄까 그런 것이 계엄처럼 도시를 짓누르고 있단다
시는 잘 되니 어제는 이곳의 한 승려가 몸에 불을 질렀어 그런데 나는 하루 종일 구름만 보고 있지 구름이라도 보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았으니까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이 이곳에서는 매일 일어나서 구름의 일들과 대조해야만 감각을 되찾을 수 있지 시에 구름을 전혀 담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같아 말하자면 시인이란 구름이 아닐까 그런데 너는 구름에 대해 그렇게나 떠들어댔으니 시를 쓰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쓸데없는 소리지 주가가 낮으면 주식을 사고 높으면 판다 그런 격언쯤으로 받아들여 누구에게나 최대한의 멍청함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으니까
지혜란, 이곳의 사전에 따르면 개나 소라면 상시 기억하지만 사람이라면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야 아이러니는 세련된 패션과 같아서 그것을 모르면 고지식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 아이러니에 아이러니로 대응하면 버릇없다는 말을 듣고 마니까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이를테면 균형 감각이 중요해 그럼에도 오해받는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을 미칠 때까지 건강하게 만들지 전승되어 온 최면요법인 셈이랄까 깊은 오해의 숲속에서 왕은 태어난다… 앵무새들이 받아 적는 새로운 건국신화 얘기야
나름 아귀가 맞는 말이라도 하는 날엔 못생겨지고 만다 걱정하지는 마 거울 보면서 정성껏 이빨을 닦다보면 익숙해지는 풍토병이니까 누구나처럼 너도 가끔 옳은 말을 했지 특별한 말들은 아니었어 하지만 옳은 말을 할 때마다 놀랄 만큼 못생겨져서 누구라도 네 뺨을 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던 것을 기억하니? 어쩌다 이 따위 얼굴이 된 거니 안쓰러워 너의 얼굴을 밤새도록 후려갈기면, 정신 좀 차려 봐 하고 쓰러진 나를 누가 흔들어대던 풍경, 물론 나는 뺨이 욱신거려 눈물이 다 났고 나 떨고 있니 물으면 아니 너 발작 중이야 하고 나는 벙긋거렸지 별 이상한 게임이 다 있다고 너는 중얼거렸다
더 망가질 것도 없을 때면 언제나 너는 다른 곳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다른 생활법이 아니라 다른 곳, 그저 다른 곳이기만 하다면 가장 많은 오해를 받았다는 사내의 쪼그라든 불알주머니 속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그곳에서 테니스라도 치며 건강하기를 바랄게 그곳에서도 왕은 오해의 갑옷을 둘러 입고 포르노 배우가 다 된 앵무새들은 왕이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퍽미 퍽미 소리지르겠지
아직도 타락한 왕국을 구할 소년 타령이니 나는 이곳에서 네가 부탁한 소년을 찾아다녔다 이곳 모든 소년의 이름은 겨울, 네가 말한 소년의 이름도 겨울이었어 모든 소년을 찾고 네가 말한 단 하나의 소년은 잃어버렸지 이곳은 그런 식으로 소년을 흡수하는 걸까 오직 왕만이 소년처럼 웃지
노래 부르는 눈 먼 소년의 바구니에 동전을 던지고 사랑이 이곳 말로 무엇
인지 물어 보았지 사랑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더군 감탄해서 나는 시는 무엇인지 물어보았고 소년은 시가 없는 것이라 답했어 마지막으로 그럼 삶은 무엇이지? 물었더니 뭐라는 거야 못생긴 자식이! 침 뱉으며 가버렸지
나는 이곳을 질질 끌고 산책을 나갈 생각이야 네가 엽서를 받을 때면 나는 이미 그곳에 가 있겠지 구름을 준비해 두렴 그럼 이만 들려줄 얘기는 여기까지 독재자의 웃는 얼굴에 침 발라 붙이며……
공중곡예사
열대, 열대어, 열대어들, 줄무늬, 속에 얼룩말, 열대의 초원에 저녁이, 저녁 위에 어둠이 내린다, 얼룩말, 물소, 물소의 뿔, 당신은 말했다, 뿔 위에는 나비, 구름, 공중곡예사.
물소, 물소와 기린, 우기를 기다리며 마른 연못에서, 태양은 지평선으로 떨어지고, 기린의 목은 자꾸만 길어지는데, 잠들 때 저 긴 목은 어디에 두나, 눕고 싶은 하이힐을 두고, 줄무늬 스커트를 두고, 당신은 뛰어 내린다, 나비, 구름, 공중곡예사.
초원에 비가 내린다, 비, 연못, 수족관, 에 잠긴 서른 살, 의 줄무늬, 나비, 구름, 공중곡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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