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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기획 젊은 시의 징후를 찾아서/ 유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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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외 1편
벽 너머 누군가 삽니다
저금을 모르고 산 어머니가 물려준 애인입니다 아픈
그를 위해 내가 더 병약해지기로 합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이 사랑의 모양이라 배웠습니다
벽 너머 당신에게
벽 너머 다른 벽
그게 내 얼굴입니다 당신이 사랑해야 할
밤이라 부를 수 있는 칼을 겨눕니다
우리 놀이의 이름은 ‘전생이 되어보기’입니다*
저금을 모르고 산 어머니가 물려준 붉은색 단어들, 공산품, 돌연변이, 서커스처럼
당신과 자식을 많이 낳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병든 아이와
병을 지켜 볼 아이를 골고루
우리 애들은 우애가 깊을 겁니다
다투듯이 양보하고 증상을 나눠가며
둥근 가계도를 완성할 겁니다
당신과 나는 원의 중심에 깃발을 꽂고
한 아이는 반드시 백발로 태어날 것입니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허리케인>중, “그 놀이의 이름은 ‘이런 삶을 한번 상상해 봐’이다” 변용.
Salon de poissons*
…… 일어서려다 열린 서랍에 머리 찧었을 때, 왜 웃었니. 네가 선생으로 일하는 샵이면 그래도 된다는 거니. 조롱거리가 되기 싫어서 담담한 표정 지었던 건데. 티내는 성격은 변하지도 않는구나. 그래도 학교는 그만두지 말았어야지.
…… 너 없는 동안 잠깐 동물애호가인 남잘 만나보기도 했어. 그 남잘 만날 땐 개를 사랑하는 척 했지. 길에서 마주친 개들이 꿈에까지 쫓아와서 넓적다릴 물어뜯는데 비명을 지르면서도 예쁘지! 예쁘다! 외쳤어. 내가 질색하는 트럭 밑 고양이, 그것들은 나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데 불쌍하다고 참 안됐다고. 예뻐하고 불쌍해하는 거 말곤 좋아하는 방법을 알아야 말이지. 이 정도 노력이면 진심이라 불러도 되는 거 아니니. 우리가 장작불에 던져 넣던 딱정벌레들 기억해?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불빛, 우리 참 잘 어울렸는데. 이사는 왜 간 거라고?
…… 그때부터 넌 항상 머리를 빗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것 같더라. 내 방에서 치던 나쁜 장난 말인데, 너 꼭 머리를 빗으면서 마무리 지었잖니. 앞으로 너와 함께 할 수 없겠다, 그런 건 질투가 아니야. 네가 침대에 흘리고 간 머리카락만 한줌이잖아. 어떻게 매일 소원이 한줌씩 새로 생겨날 수가 있니. 넌 욕심이 너무 많아. 그걸 다 채워주느라 내 비밀까지 다 털어놓게 되는 거잖니.
…… 불 꺼진 가게에서도 빛나는 프랑스제 가위들, 대체 다 얼마니? 가위치고 끔찍하게 비싼 것 같다. 자를 수 있는 게 머리카락 말고 더 있다는 듯이. 우린 멸종인어쯤 된다는 거니? 그러지 말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
…… 이제와서 무슨 사과를 하라는 거야. 내 잘못을 묻는다면 남은 평생을 고백하는 데 다 써도 멈추지 못해. 나가라니. 그럴 수 없다는 걸 네가 잘 알잖니. 나가라니. 너도 마찬가지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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