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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가을호) 기획 젊은 시의 징후를 찾아서/ 유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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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외 1편
우거진 구름의 숲을 지날 때 머리 위에서 빛나는 크고 멋진 뿔을 꺾어 흰 나무 그늘에 버린다 나는 쫓기고 있다
불 밝히던 뿔을 잃고 이제 추락하는 영혼, 뒤를 쫓는 속도는 어둠 속에 숨어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나는 어두워진다
빛나는 꼬리를 잃고 아름다운 무늬를 잃고
어둠을 닮아간다
이제 다 잃었으니 태양에게조차 들키지 않을 테니
돌아가면
아직 그 흰 나무 아래 뿔이 빛나고 있을까 잘라버린 꼬리는 맹독의 들판 어디서 꿈틀거리고 있을까
어둠에 쫓기는 자들이 버리고 간 뿔처럼 아득하게 별이 빛나는 밤
성난 얼굴로 돌아보면
인간의 얼굴
내 그토록 도망친 지상의 얼굴
만灣
여기는 울음이 태어나는 곳, 물속의 생이 걷는 법을 배우는 곳, 무릎이 생기고 발자국이 생기고 후회가 생기는 곳
바다가 끝나는, 그리고 육지가 시작하는 곳에 한 사내가 서 있다
몸을 휘감던 그날의 바람을 떠올리고 있을까 바람이 훔쳐서 달아난 물의 체온을 기억하려 애쓰는 중일까
무릎을 내려놓고 실패한 걸음을 번복하려는 듯, 말을 내려놓고 울음을 내려놓고 없던 일로 되돌리려는 듯
사내가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어떤 거부처럼 바람이 불고 또 파도가 밀려오는
여기는 아주 천천히 변해왔을 해안선, 출렁거리는 심연, 육지가 끝나는, 그리고 바다가 시작하는 곳
여자의 가랑이 아래 고개를 처박고 사내가 울부짖는다
거기 물속의 나는 울지 않습니까
다시는 물 밖의 생을 꿈꾸지 않기로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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