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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이숲/오늘의 감정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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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신작시/이숲/오늘의 감정 외 1편
이숲
오늘의 감정 외 1편
의뭉스런 빛줄기가 근심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 한다
햇살의 각도를 반대쪽으로 돌리려고 나는,
하늘을 까맣게 올려다보다 눈구름 떼를 만났다
서설瑞雪이라도 내리려나
시선이 기척을 따라가다
작은 연못을 만난다
하늘과 구름 다 품는 연못 속엔
내가 나 아닌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언제부터 얼어있었던 걸까, 나의 표정들은
움직임 없이 멈춰있는 물고기들처럼
나만의 빙하기를 통과하는 중일 거다
근심의 방향은 금새 눈발 속으로 휩쓸려 숨어든다
그러다 나를 따돌리려고 흩어진다
나의 감정이 부드러운 악보의 선율처럼
고요하게 자라난 풍경을 넘기면서
품지 않아도 되었을
그러나 어차피 품었어야 했을 찰나를
자꾸 되새김질하며 걷는다
연꽃은 저렇게 뿌리를 감추고도
가능성을 내색하지 않는다
난 연못 가장자리에서
오랫동안 겨울의 안쪽이 던져주는
경전을 읽고 또 읽는다
달개비를 읽다
추모공원 가는 길
쓰러진 나무토막 갈라진 틈새
매끈한 모습으로
이파리 속에 얼굴을 가린 채
가녀린 허리를 길게 늘이고 있다
할 일이 남았을까
8월 염천 아래 뿌리내리고
내 발목 한참 붙잡는다
양산이 만든 작은 그늘이 민망하다
죽음을 잊은 듯
죽음과 아무 상관 없는 듯
싱그럽게 안부를 묻고 있다
나는 괜찮아 너만 꽃피우면 돼
거처가 된 썩은 부위를 유순하게 핥으며
서럽지 않다고 재차 토닥인다
개화를 기다리며 내민 손짓
몸부림치는 질긴 상징
무덤에 도착하기도 전에
난 그만 젖어버린다
이젠 달개비만 보면
당신의 하나뿐인 마중인 줄 알겠다
*이숲 2016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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