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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린 왕자를 찾아서
번호 29 조회수 64
작성자 서아람 (alyadne) 작성일 2002-06-01 오후 9:03:32
안녕하세요, 이 방에 글을 올리는 건 처음이네요.
전 영광스럽게도 위대하신 스승님께 소설에 대한 고귀한 가르침을 전수받고 있는..
좀 간단히 말하자면 박나리 선생님의 제자인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여기 올리는 소설은 제가 제대로 써 본 첫 소설이라서 많이 서투르지만, 잘 봐주세요.
어린 왕자를 찾아서
서초고등학교 1학년 서아람
어린 왕자
"너 미쳤어!"
친구는 통화를 하다 말고 다짜고짜 고함부터 내질렀다. 실상은 이제부터가 중요한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는 더 이상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매우 단호하고 완강한 어조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 몸으로 부닥치고 보니 여간 머쓱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전화 버튼 틈새로 스며든 케케묵은 먼지를 새끼손가락으로 쓸어 내리고 있었다. 씩씩대며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친구 모습이 짐작만으로도 생생히 그려지는 터라 여간 맘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머쓱해진 나를 향해 그녀는 특유의 논리적인 어조로 따발총 같은 얘기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막? 사막이라고 했니 지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 대학 졸업하고 다들 취직하느라 바쁠 때, 혼자 동화를 쓰네 어쩌네 뒹굴 거릴 때부터 내가 너 알아봤지! 철부지처럼 원고 들고 헤매는 게 안타까워 기껏 출판사 하나 소개해줬더니, 그 고료로 사막에 간다고? 게다가 뭐? 어린 왕자를 찾겠다고? 정신차려, 이 과대망상증아! 너 정말 동화만 쓰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창작의 세계도 좋지만, 제발 현실이랑 작품을 혼동하지 말라구!"
금방이라도 수화기를 박살낼 것처럼, 친구는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며 나를 극구 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급기야는 어디 내 마음대로 한번 해 보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말았다. 그래, 원래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스레 계획을 세웠던 이유도, 주위 사람들의 이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때론 짐작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현실 앞에 당황하는 법이다. 조금쯤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했던 나의 일말의 바램은 씁쓸함을 더욱 배가시킬 뿐이었다.
한숨과 함께 방 한구석에 미리 준비해 둔, 여행 꾸러미를 바라본다. 매사에 한 발짝씩 꾸물거리기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20여 년이 넘게 꿈꾸던 계획이 눈앞의 현실로 그려지자 실로 놀라운 추진력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게다가 활자 화 된 모든 서류 앞에서는 일단 주눅부터 들던 내가 스스로 여권과 비자를 마련한 일은 여간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다. 20년 전부터 계획해온 일생 일대의 여행이 아닌가. 철모르던 6살배기의 생일날, 선물로 받은 동화책 '어린 왕자' 속에서 난 꿈에 그리던 운명의 상대를 찾았던 것이다. 어린 왕자를 향한 애타는 내 짝사랑은 20년 간 식지 않고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생텍쥐페리의 자취를 따라 어린 왕자 이야기의 배경인 사막으로 나 홀로 여행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오늘은 바로 손꼽아 기다려오던 출국 일이다. 오로지 이 날만을 위해서 난 소질도, 관심도 없어 학생 시절에도 등한시했던 영어를 밤을 꼬박 지새우며 공부해왔다. 떠나기 전 마지막 점검을 해 보는 내내, 나의 심장은 시집가는 처녀처럼 막연한 두려움과 겪어 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세차게 뛰었다. 난 어깨에 집채만한 짐을 진 채로 제법 비장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가슴에는 20년 묵은 '어린 왕자'의 낡은 문고본을 꼭 품은 채로 말이다.
친구와의 전화통화로 꽤나 시끄러운 전초전을 치르던 탓일까. 사막 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하루만에 난 기대에 잔뜩 부푼 모습으로 리비아 공항 한복판에 멀거니 서 있었다. 여행사를 통해 한국에서 소개받은 현지인 가이드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겁내지 않을 거란 다부진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나도, 막상 생전 처음 보는 흑인들의 물결을 보며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문짝만한 피켓을 들고 거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던 가이드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얼빠진 얼굴로 우두커니 출구를 지키고 있었다. 귓가에는 의미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낯선 아프리카의 언어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그와 함께 휩싸이는 막막함에 나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때, 흑백의 물결 속에서 피켓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서툰 한글로 삐뚤 빼뚤하게 적혀 있는 것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등위에 얹힌 달팽이집 같은 배낭 때문에 중심을 잃고 잠시 주춤거렸지만, 아직은 버틸만한 체력이었다.
"아, 아년하세요."
미리 연락해두었던 가이드가 어설픈 한국말로 인사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의 귀밑까지 흘러내린 부스스한 곱슬머리는 거무스름한 피부를 덮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해묵은 상아색 천을 마치 터번처럼 멋지게 감고 있었다. 그 이국적인 머리 모양은 단번에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다짜고짜 수줍어하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물론 그의 영어 발음은, 영어라기보다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얼핏 들어본 히랍어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사막 여행의 풍경에 딱 들어맞는 근사한 가이드가 아닌가. 온갖 근심들은, 드디어 사막 지대에 내려섰다는 벅찬 감격에 묻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가이드는 나의 짐을 덜어주려고 정중히 손을 내밀었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의 마음은 하늘이라도 훨훨 날 것 같았으므로, 가방의 무게 따위는 전연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난 언제 겁을 먹었었냐는 듯,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씩씩한 발걸음으로 공항을 걸어나갔다.
주차장에는 차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로 허름해 보이는 가이드의 차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삭 무너져 내릴 듯한 그의 차는 간간이 그나마 차의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수위의 것이었다. 때문에, 아마 일반 관광객이라면 타기를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함조차도 사막의 비 세속적인 풍경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다녔던 탓인지, 차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마시다만 물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붉은 좌석 시트 위에는 백인 관광객의 것으로 보이는 금발이 몇 올 거뭇거뭇 떨어져 있었다. 가이드는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진 뒷좌석을 보더니 뒤로 넘어 갈 만큼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의자 위를 청소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호텔까지 차를 모는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흔히 한국 사람에게서는 보기 힘든 공손한 태도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보며, 난 도리어 황송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으로 떠난 사막 여행에서 이렇게까지 세심하고 상냥한 가이드를 만나다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차창 밖으로 광활한 사막의 그림이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흔한 풀 씨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모래바다가 넘실거리듯 엄청난 규모의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색 지평선 너머, 하늘은 잿빛으로 이글거렸다. 하늘조차 녹여 삼켜 버릴 듯한 태양의 기세가 무서웠다. 마침내 나는 내가 지구의 한여름 속으로 발을 내디뎠음을 실감했다.
사막의 공기를 맡아보고 싶어 창문을 열자,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은 강렬한 열기가 텁텁한 모래 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가이드는 좌석 밑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뒤적 거리더니, 쓰임을 알 수 없는 천 덩어리를 내게 건네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길고 얇은 흰 천이 달린 원주민들의 모자였다. 나는 입이 귀에 걸쳐져서는 냉큼 그것을 받아들었다. 대충 고무줄로 동여매고 살았던 머리채를 풀어 내리고, 흰 모자를 쓰자 제법 현지인 티가 나는 것 같아 우쭐해졌다.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묵으세요. 이래봬도 이 근방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입니다."
가이드는 꽤 근사한 라운지 호텔 앞에 다다라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흰 종이에 볼펜으로 글을 써서 건네주었다. 다행히도 그의 영어 작문 실력은 회화 실력에 비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이 근처에 생텍쥐페리가 여행했다는 그 사막이 있죠? 내일은 틀림없이 가는 거겠죠?"
나는 여행 오기 전 이미 몇 십 번도 더 확인했던 일정 문제에 또다시 확답을 받고자 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안달복달하는 나를 향해 피식 웃으며 다시 펜을 쥐고 글씨를 썼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올 테니까요."
호텔에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직원이 많아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별달리 없었다. 그렇지만 친절한 가이드는 호텔 안까지 따라 들어와 내가 체크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객실까지 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체크인하는 내내 229호에 방을 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가이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그 곳은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에요."
그 말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성격의 것이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어차피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메마른 모래언덕뿐일 텐데 2층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는 그런 내 의문을 금새 이해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가 바로 정원이지요. 사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온갖 꽃과 나무들을 구해와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았답니다. 호텔 지배인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뒤뜰을 연상시킨다며 늘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지요. 호텔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와 구경을 하고 갈 정도니 말입니다. 그 정원이 제일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 바로 2층이에요."
"아, 그렇군요."
나는 가이드의 배려에 감사하며 229호에 방을 잡았다. 마침 그곳은 비어 있었다. 가이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짐을 나르는 내내 그 호텔의 정원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는 쉴새없이 229호의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그 정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밤에는 반드시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 보세요, 그처럼 환상적인 별세계가 따로 없지요.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사막의 밤 속에서 그 정원은 오아시스처럼 반짝인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꼭 가봐야겠네요."
과연 그 정원은 굉장해 보였다. 결코 적지 않은 부지에 온갖 빛깔의 식물들이 우거져 신선한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덩달아 들떠서 벌써부터 밤을 기다리며 설레어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네, 안녕히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가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 뒤 떠났다. 난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을 유리창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움푹 패인 모래 구덩이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자니,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내 마음을 휘어잡았다.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이곳에서라면…'
애초 어린 왕자를 만나겠다는 결심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이 곳에 당도한 순간 그런 자책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단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어린 왕자의 배경이 되었던 사막을 구경하고, 위대한 대작가 생텍쥐페리의 체험을 공감해보고 싶어서라는 데 생각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마치 꿈만 같은 드넓은 사막이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순간,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또다른 의문은 다시금 나를 꿈꾸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방에 들어선 나는 일단 집채만한 트렁크를 방 한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허리에 차고 온 쌕은 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사로부터 한적한 관광지일수록 오히려 경비가 허술해 소매치기가 흔하다는 경고를 들었던 까닭이다. 할 일 없이 방안을 서성이던 난 아치형 창문 앞에 놓여진 테이블 옆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창 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이 연출하는 사막의 노을만큼은 백 만금을 치러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장관이었다. 며칠 굶은 사람의 낯빛처럼 누렇게 떠 있던 하늘에 붉은 구름이 조금씩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지평선 끝까지 강렬한 빛깔로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 꿈결같은 풍경에 넋을 완전히 빼앗긴 채, 손으로 턱을 괴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여독이 조금씩 눈꺼풀에 올라앉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는 자취를 감추고 새까만 어둠이 고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깜깜한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새벽 한시 위에 놓여져 있었다. 난 밤 산책을 놓칠 뻔했다는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외투를 찾아 대충 걸쳐 입었다. 그리고 급한 마음으로 방을 뛰쳐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졸고 있던 사이, 스치고 지나갔던 꿈속에서 어린 왕자를 본 듯 정신이 몽롱했다.
손으로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컴컴한 호텔을 빠져나오자 뒤뜰이 보였다. 담쟁이 넝쿨이 기이한 형태로 얽혀 있는 흰 울타리 사이로 세워진 낮은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내 눈앞에는 한 순간의 신기루처럼, 지상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아름다운 숲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정원에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방금 물 속에서 건져낸 것처럼 촉촉한 달빛이 온 정원을 적시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장대한 거목들이 잎줄기를 시원스럽게 뻗으며 정원의 둘레를 둥그스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두 팔을 벌려 안아도 한참 모자랄 것 같은 거친 갈색 몸통 사이로 적막한 사막의 밤 풍경이 언뜻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젖혀 나무 줄기를 따라 올라 가 보다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흙 사이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무 뿌리 사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자잘한 들꽃들이 하얀색, 보라색, 청 남색, 선홍색 등의 갖가지 빛깔을 내비치며 한 움큼 씩 만발해 있었다. 반면에 정원 가장자리 군데군데 심어놓은 계절 꽃들은 볼록한 꽃봉오리를 금새라도 터뜨릴 듯 피어 올리고 있었다. 이국의 꽃들이 점점이 흩뿌리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는 너무도 화려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특히 부채꼴로 드리워진 여러 겹의 꽃잎을 이제 막 펼친 주홍색 꽃 무리는 한층 짙어져 가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홍채를 발하며 유난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읽었던 책자에서 본 적이 있는, 우유 빛 겹꽃이 길고 가는 대롱을 이따금씩 불어오는 밤바람에 춤추듯이 흔들어댔다. 우리나라의 동백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 꽃송이도 질세라 너울너울 피어오르며 애잔한 향기를 뿜었다. 종종 짓궂은 바람이 꽃잎을 들추고 지나갈 때마다, 채 여물지 않은 보송보송한 씨앗이 살짝 엿보였다. 부드러운 밤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꽃잎 위에는 자잘한 윤기가 흘러 내렸다. 잎새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상쾌한 소리도 귓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까운 사막에서는 바람이 모래알을 뒤척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난 사막에서만 들을 수 있을, 단조롭고 평화로운 음악에 기분 좋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서리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비밀스럽게 달빛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거닐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오색의 찬연한 꽃향기가 새록새록 코끝으로 날아들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울처럼 맑고 잔잔한 연못 표면에는 흑단 빛 하늘이 곤히 잠자는 듯 했다. 나는 한 조각의 흙덩이도 보일 새 없이 곱게 메워진 잔디밭을 지나 연못가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히자 물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잔물결이 일 때마다 매끄러운 물빛 선으로 아로새겨진 희끄무레한 형체가 휘청였다. 나는 반쯤은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느낌에 잠겼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바람이 머리 위의 활엽수를 뒤흔들었다. 비단처럼 얇고 고운 연녹색 잎사귀들이 색종이처럼 잘게 흩날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던 그들은 이윽고 사뿐히 연못에 내려앉았다.
"누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그 때였다, 피콜로처럼 가늘고 청아한 미성이 나를 깨운 것은. 내 귀를 의심할 찰나, 물가를 뒤덮은 나뭇잎 배들이 물결에 싹 걷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거짓말처럼 한 소년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갓 구워낸 옥수수 빵처럼 부드러운 노란색과, 생크림의 고소한 우유 빛이 한데 어우러져 조그만 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나는 차마 믿기 지 않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휘영 찬 은색 달빛을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환하게 받으며 수줍게 서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나는 행여 그가 달아나기라도 할 세라,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우뚝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책장에서 처음으로 목격했던, 그리고 지난 20년 간 항상 꿈에서만 그려오던 낯익은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내 눈길은 제일 먼저 그의 아담한 발에 신겨진 푸른 털 장화에 가 닿았다. 이어 하얀 빌로드를 부풀려 만든 독특한 모양의 바지와 그의 상체를 빈틈없이 감싼 블라우스에 시선이 멎었다. 막대기처럼 마른 몸을 감추고 싶었는지, 그는 폭신폭신해 보이는 푸른색 겨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는 그의 작은 키에 비해 애처로울 정도로 길어서, 그 끝이 발목까지 끌렸다. 접어 올린 양쪽 깃이 선명한 장밋빛을 띠고 있는 것까지, 책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같았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둥근 목 깃 사이로 7월의 밀밭보다 더 탐스러운 금발이 흘러내렸다. 양털처럼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진주처럼 하얗고 투명한 얼굴이 미소지었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는 한순간에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어린 왕자다, 나는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난 것이다. 숨막히는 감격이 벅차 오르는 순간, 그가 능금알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깜박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누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그제서야 나는 어린 왕자가 하고 있는 말이 영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발음과 문법 상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 어설펐지만 어쨌든 영어는 영어였다. 어린 왕자가 영어를 사용하다니! 나는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왜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해 본 적이 없는지 의아스러워졌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그와 어린 왕자가 대화를 했다면 그 언어는 프랑스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은 어째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일까? 내가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그는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프랑스어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그 한마디로 모든 수수께끼는 단박에 풀렸다. 나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 자신을 꾸짖었다. 어떻게 어린 왕자가 평범한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는 이미 수 십 년 전에 전 세계를 여행했으므로, 어떤 나라의 언어이든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발음을 조금이라도 더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며 영어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혹시 소행성 B-612호에서 온 어린 왕자가 아니니?"
그는 나의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듯, 끈기 있게 양을 그려달라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왕자에게 세 개의 구멍이 뚫린 상자를 그려줘야만 했다. 수 십 년 전에 생텍쥐페리가 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만 했다. 나는 배낭을 가지고 나온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재빨리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긴장이 되었는지 배낭의 자크를 내리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새끼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환희는 발끝까지 빠르게 전이되어 마침내는 똑바로 서 있기도 힘에 겨울 지경이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당장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듯한 환자처럼 보였는지, 어린 왕자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누나, 괜찮아?"
"거,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그보다 양을, 양을 그려줘야지."
나는 파르르 떠는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풀 위에 주저앉았다. 습작용 노트를 꺼내 양을 그리는 동안 나의 흥분도 차츰 진정되어 갔다. 종내는 내 그림을 들여다보며 아침 햇살처럼 밝게 미소짓는 어린 왕자를 보며 몇 가지 질문을 할 만한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넌 이미 양을 가지고 있지 않니? 양이 든 상자를 갖고 네 별로 돌아갔던 걸로 기억 하는데…"
"응, 그 양은 내 별에서 잘 자라고 있어. 그렇지만 한 마리뿐이니까 너무 외로워할 것 같아서, 친구를 만들어주려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나는 어린 왕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하면서 더욱 정성스럽게 양을 그렸다. 내가 봐도 썩 훌륭한 솜씨였다. 그야 어린 왕자 책을 보며 삽화를 따라 그린 게 적어도 몇 십 번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린 왕자는 완성된 그림을 받아 품에 꼭 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미소였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사귀어 온 것처럼 친근하게 내 옆에 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누나는 참 신기한 사람이야, 어떻게 내 양에 대해서 아는 거야?"
"음…"
나는 '책에서 읽었어.'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여태까지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어린 왕자의 존재가 한낱 활자 속에 묻힌 가공의 것으로 취급될 것만 같아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너를 만났던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 그럼 누나와 비행사 아저씨는 서로 아는 사이야? 아저씨는 지금 어디 있어?"
"아저씨는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어, 자기가 살았던 별로."
이것만큼은 듣기 좋게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약력에는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앙투안 생텍쥐페리가 1944년 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실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푸른 하늘의 평화와 자유를 사랑했던 그라면, 끝끝내 어른이 되기를 거부했던 순결한 심성의 그라면 틀림없이 우주 어딘가에서 영원한 비행을 계속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터였다.
"아아, 다행이야. 그렇다면 언젠가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 있겠네. 그 아저씨, 어른이었지 만 어른이 아닌, 참 좋은 사람이었어."
생텍쥐페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어린 왕자는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 어린 왕자를 읽으며 떠올린 수많은 물음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모아두고 있었다.
"저, 네 장미꽃은 잘 지내고 있니? 혹시 양이 장미꽃을 다치게 하진 않았니? 아저씨도 오랫 동안 네 장미를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고는 했었는데."
"내 장미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 그가 장미를 하나가 아닌 복수로 말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정원을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꽃들을 둘러보고 조금 뻐기듯이 말했다.
"이 꽃들도 물론 아름답지만, 내 별에서 살고 있는 장미들에 비하면 초라해."
"네 별의 장미들?"
"그래, 오래 전 내 별에 있던 장미가 씨앗을 뿌려서 아기 장미를 낳았어. 그리고 일 년 후에 또 그 아기 장미가 아기 장미를 낳고, 다시 낳아서 지금은 장미가 별에 한 가득이야. 그래서 옆별에 사는 사람들은 내 별을 장미의 별이라고 부르기도 해. 석양을 받으며 피어나는 장미꽃들이 얼마나 근사하다고! 장미가 한 송이밖에 없을 때는 늘 양에게 잡아먹힐 까봐 조마조마했었거든. 하루도 빠짐없이 바람막이를 해 주어야 했고, 졸린 잠을 깨워가며 보초를 서 줬었어. 그런데 장미가 불어난 후로는 내 양은 떨어지는 꽃잎만으로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어."
어린 왕자는 고사리처럼 작은 손을 휘저으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그의 눈빛이 충만한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래, 그거 잘됐구나."
나도 덩달아 기뻐져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가녀린 상체는 무척이나 여위어 있었다. 살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아 부딪힌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내 눈에는 연민의 눈물이 핑 돌았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게 이 지구를 떠돌던 어린 왕자,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럼 왜 그 별을 떠나 지구로 온 거니? 혹시 비행사 아저씨를 만나려고 온 거야?"
"응, 그리고 내 여우도. 나는 여우만 나를 길들인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어. 내 별에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아저씨와 내가 어느새 서로를 길들여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 때부터 아저씨가 보고 싶어졌어. 틀림없이 아저씨도 매일 밤 5억 개의 별들을 보면서 나를 그리워했겠지."
"맞아, 그는 네가 떠나고 나서 한참을 슬퍼했어."
나는 정말 생텍쥐페리와 친분이 있는 사람처럼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어린 왕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다면 지구에서는 만날 수 없겠지, 그렇다면 여우만이라도 만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무리 찾아다녀도 여우가 보이지 않아. 내 여우뿐만이 아니라, 그 여우의 동족들도 싹 사라져버렸어."
그는 중대한 미스테리에 부딪힌 듯, 고개를 갸웃갸웃하다 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알아? 여우들이 어디로 갔는지?"
난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여우들은, 동물원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어."
"그래? 동물원은 여기서 멀어? 얼마나 걸어가야 해?"
"동물원은 너무 멀어서, 네 조그만 발로는 갈 수 없어."
"문제없어, 누나가 차를 타고 가서 여우를 불러주면 되잖아. 여우는 내가 부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올 거야."
"아마 그럴 수 없을 거야, 그들은 쇠창살 속에 갇혀 있거든."
"뭐? 여우를 가뒀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내가 여우를 잡아 가둔 장본인이기라도 한 듯 몹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허둥지둥 대꾸할 말을 찾았다.
"여우만이 아니고, 모든 동물들이 다 그래. 사람들은 동물들을 편안하게 키워주려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야! 갇혀 있는 동물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들은 자유를 사랑해!"
나는 뭔가 알맞은 변명거리를 찾아내 어린 왕자의 화를 가라 앉혀 주고 싶었지만 어떤 거짓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린 왕자의 순진 무구 한 눈동자 앞에서는 아무런 거짓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린 왕자는 복숭아처럼 붉게 변해 가는 내 낯빛을 보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는 불현듯 울음을 터뜨렸다.
"어른들은 너무해!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날아가고."
나는 어쩔 줄 몰라 그저 눈물에 젖은 그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스며들어 왔다. 그는 내 품에 벌꿀 빛 금발머리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이따금씩 가냘픈 그의 어깨가 들썩거릴 때마다, 내 가슴에서도 부서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섬세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수줍음을 타는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밀어냈다. 그의 울음소리가 차츰차츰 잦아드는 동시에 내 가슴의 통증도 사라졌다. 대신 진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차 올랐다.
"내가 너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줄게, 우리도 서로 길들여질 수 있을 거야.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날 믿어. 나는 20년 간 너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는걸."
나는 그와 나의 신비스러운 인연을 되새기며 확신에 차 말했다. 백 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넓디 넓은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기적에 가까운 인연을. 만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친구들처럼 허물없이 기대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나는, 저 위대한 작가 생텍쥐페리의 영혼이 오직 어린 왕자와의 재회를 위해 환생한 몸일지도 모른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의 어린 왕자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침묵을 깨고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 누나."
그 때, 하늘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축포처럼, 수많은 유성들이 꼬리를 빛내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와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유성우의 빛은 천국의 꽃처럼 신성하고 아름다웠다. 어린 왕자는 날씬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행사 아저씨야, 아저씨가 우리를 축하해 주고 있어."
나는 말없이, 그러나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의 영혼은 금가루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빛 속에서 교감하고 있었다. 억겁의 공간을 뛰어넘어, 광활한 우주의 한가운데에 우리 둘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행여 별들의 축제에 방해라도 될까봐 숨을 죽여 말했다.
"너의 별에 초대해 주지 않을래? 이 사막 어딘가에, 네 별로 가는 계단이 있지."
"글쎄,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손님을 초대해본 적이 없어."
그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누나라면, 좋아. 날이 밝으면 함께 사막으로 떠나자, 해가 떠오르면.."
그의 말은 점차 꺼져 가는 불꽃처럼 사그라들며 끝내는 작은 중얼거림처럼 들렸다. 꾸벅꾸벅 졸던 그는 서서히 눈을 감으며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나에게도 졸음이 찾아왔다. 혹시 잠들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꿈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른해진 몸은 금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오밥나무
동이 터올 무렵, 호텔 앞으로 너덜너덜한 고물 차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려와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가이드가 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남루한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여송연이었다.
"이번에 한탕하고 나면 이 차도 바꿔야겠군."
그는 도금이 벗겨진 낡은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 때, 호텔 뒷문에서 어린 왕자가 허겁지겁 차를 향해 달려왔다.
"아버지, 가요."
어린 왕자, 아니 그의 아들이 뒷자리에 타자 가이드는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의 손에는 한 뭉치의 지폐와 여권, 카드 등이 쥐어져 있었다.
"그래, 오늘은 얼마나 털었냐? 그 여자, 별로 부유해 보이진 않던데."
"쌕 안에 현금이 제법 있길 래 살짝 빼왔어요, 여권하고 카드도 암 매상에게 팔면 될 것 같아 서 가져왔고요."
"잘했다."
가이드는 짤막한 칭찬을 하며 아들에게서 돈 뭉치를 넘겨받고는,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긴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건네주었다. 아들은 좁은 좌석에서 꼼지락거리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의 복장을 벗어 잘 개켜놓은 후, 그는 머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노란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마를 흥건히 적신 식은땀을 닦으며 후련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과 양손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자 피부를 감싸고 있던 밀가루처럼 하얀 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가이드와 똑같은 거무스름한 피부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백미러를 보며 렌즈를 빼내자, 사파이어처럼 푸르고 유난히 영롱하던 눈동자도 짙은 먹빛으로 변했다.
다른 사막의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진 그는 지친 낯빛으로 차창에 얼굴을 기댔다. 가이드는 평소보다 우울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건 뭐냐?"
아들의 손에는 꾸깃꾸깃 접힌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아들은 종이를 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삽화를 쏙 빼 닮은, 상자 속에 담긴 양의 그림이었다.
"그 사람이 그려준 거에요."
"그딴 것, 가지고 있어서 뭘 하냐. 버려라."
가이드가 그림을 빼앗아 창 밖으로 내던지려는 것을 아들이 얼른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 그림을 도로 가져가 소중히 품안에 넣었다. 그는,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양을 그려준 사람은."
여우
호텔 정원의 아침은 항상 일찍 시작된다. 오늘도 정원사는 동이 터 오자 마자 가위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는 정원 곳곳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키고, 나무 사이를 돌며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했다. 호숫가 옆에 있는 스프링클러의 스위치를 누르고 돌아서는 순간, 그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하나 띄었다. 웅크려 있는 여자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프링클러의 꼭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여자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정원사는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그 쪽을 미처 보지 못해서…당장 수건을 갖다 드릴게요, 아니면.."
그러나 여자는 정원사의 말을 무시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불현듯 물었다.
"혹시 어린 왕자를 못 보셨어요?"
"예?"
얼떨떨해하는 정원사를 그대로 놔둔 채, 여자는 벌떡 일어나 정원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정원사는 그녀가 말하는 어린 왕자가 책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그녀의 영어를 자기가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녀의 정신 없는 발걸음이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울타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앗, 조심해요!"
넓게 드리워진 담쟁이 잎 사이로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손은 여자가 막을 틈도 없이 잽싸게 여자의 허리춤에 채워진 쌕을 낚아 채 갔다.
"소매치기! 거기 서지 못해!"
얼이 빠져버린 여자 대신 정원사가 가위를 집어던지고 쫓아갔지만, 발빠른 소매치기는 이미 지름길을 통해 도망가고 있었다. 한참의 추격전을 벌이던 끝에 소매치기는 어느 지점에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공범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미안해요, 잡지 못했어요. 호텔 근처에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설마 대담하게 정원까지 들어올 줄이야… 쌕 안에 뭐가 들어 있었죠?"
"돈하고…카드. 그리고 .여권도 들어 있었는데."
떠듬떠듬 말을 잇던 여자는 다리에 스르르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정원사가 얼른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그는 눈꼽이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아저씨, 저 이제 어떻게 하죠?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뭔가 수가 있을 거에요. 일단 경찰의 도움을 받아보는 게.."
자상한 말로 그녀를 위로해주려는 정원사를, 그녀의 서글픈 울먹임이 가로막았다.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에요. 돈이야 다시 벌면 되고, 여권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잖아요. 평생동안 찾아오던 어린 왕자를 이제야 만났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헤어져야 하다니.. 함께 사막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도 다 하지 못했는데.. 아직 길들 여지지도 못했는데…정말 하늘도 무심하네요."
이제는 아예 바닥에 앉아 엉엉 우는 여자를 보고, 정원사는 괜히 미안해져 몸둘 바를 몰라했다. 여자가 우는 이유가 돈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소매치기를 잡아주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를 달래주려는 마음에 호숫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되풀이해 말하는 어린 왕자 이야기 속에 장미가 등장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던 까닭이었다.
"저, 이런 말 아세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인데요.."
그가 내민 장미를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울기만 하던 그녀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는 반응을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대요. 아가씨의 어린 왕자를 현실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린 왕자가 다시 아가씨를 떠나버렸다고 해서, 실망하면 안돼요. 어린 왕자가 정
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가씨의 마음 속에서일 테니까요. "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지만, 정원사는 그녀의 눈물이 그쳤음을 알았다.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간밤에 어린 왕자에게 그려주었던 그림, 양의 그림이 없었다. 어린 왕자는 그녀가 그려준 양을 데리고 그의 별로 떠난 것이다. 그녀를 기억하면서, 그녀에게 길들여졌다는 증거를 남기면서.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눈처럼 맑고 투명한 이슬이 맺힌 붉은 장미를 받아들며 말했다.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실 래요?"
~~~~~~~~~~~~~~~~~~~~~~~~~~~~~~~~~~~~~~~~~~~
제목 아람양~
번호 29 조회수 35
작성자 박나리 (yepyepyep) 작성일 2002-06-03 오전 12:52:26
아람양의 작품은 제가 이미 한번 읽어보았기때문
또 다른 코멘트는 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작품 쓰느라 수고하셨구요,
다음 작품도 열쉬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박나리님이 홈지기로 있는 문학관련 사이트에서 퍼온 글 입니다.
박나리님의 말의 뜻으로 볼때 적어도 퇴고에는 관련된것 같아서 이렇게 참고하십사 올려봅니다.
그리고 서아람님의 말에 어폐가 있는듯도 싶네요.
번호 29 조회수 64
작성자 서아람 (alyadne) 작성일 2002-06-01 오후 9:03:32
안녕하세요, 이 방에 글을 올리는 건 처음이네요.
전 영광스럽게도 위대하신 스승님께 소설에 대한 고귀한 가르침을 전수받고 있는..
좀 간단히 말하자면 박나리 선생님의 제자인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여기 올리는 소설은 제가 제대로 써 본 첫 소설이라서 많이 서투르지만, 잘 봐주세요.
어린 왕자를 찾아서
서초고등학교 1학년 서아람
어린 왕자
"너 미쳤어!"
친구는 통화를 하다 말고 다짜고짜 고함부터 내질렀다. 실상은 이제부터가 중요한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는 더 이상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매우 단호하고 완강한 어조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 몸으로 부닥치고 보니 여간 머쓱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전화 버튼 틈새로 스며든 케케묵은 먼지를 새끼손가락으로 쓸어 내리고 있었다. 씩씩대며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친구 모습이 짐작만으로도 생생히 그려지는 터라 여간 맘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머쓱해진 나를 향해 그녀는 특유의 논리적인 어조로 따발총 같은 얘기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막? 사막이라고 했니 지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 대학 졸업하고 다들 취직하느라 바쁠 때, 혼자 동화를 쓰네 어쩌네 뒹굴 거릴 때부터 내가 너 알아봤지! 철부지처럼 원고 들고 헤매는 게 안타까워 기껏 출판사 하나 소개해줬더니, 그 고료로 사막에 간다고? 게다가 뭐? 어린 왕자를 찾겠다고? 정신차려, 이 과대망상증아! 너 정말 동화만 쓰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창작의 세계도 좋지만, 제발 현실이랑 작품을 혼동하지 말라구!"
금방이라도 수화기를 박살낼 것처럼, 친구는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며 나를 극구 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반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급기야는 어디 내 마음대로 한번 해 보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말았다. 그래, 원래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스레 계획을 세웠던 이유도, 주위 사람들의 이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때론 짐작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현실 앞에 당황하는 법이다. 조금쯤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했던 나의 일말의 바램은 씁쓸함을 더욱 배가시킬 뿐이었다.
한숨과 함께 방 한구석에 미리 준비해 둔, 여행 꾸러미를 바라본다. 매사에 한 발짝씩 꾸물거리기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20여 년이 넘게 꿈꾸던 계획이 눈앞의 현실로 그려지자 실로 놀라운 추진력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게다가 활자 화 된 모든 서류 앞에서는 일단 주눅부터 들던 내가 스스로 여권과 비자를 마련한 일은 여간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다. 20년 전부터 계획해온 일생 일대의 여행이 아닌가. 철모르던 6살배기의 생일날, 선물로 받은 동화책 '어린 왕자' 속에서 난 꿈에 그리던 운명의 상대를 찾았던 것이다. 어린 왕자를 향한 애타는 내 짝사랑은 20년 간 식지 않고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생텍쥐페리의 자취를 따라 어린 왕자 이야기의 배경인 사막으로 나 홀로 여행을 떠나게 만든 것이다.
오늘은 바로 손꼽아 기다려오던 출국 일이다. 오로지 이 날만을 위해서 난 소질도, 관심도 없어 학생 시절에도 등한시했던 영어를 밤을 꼬박 지새우며 공부해왔다. 떠나기 전 마지막 점검을 해 보는 내내, 나의 심장은 시집가는 처녀처럼 막연한 두려움과 겪어 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세차게 뛰었다. 난 어깨에 집채만한 짐을 진 채로 제법 비장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가슴에는 20년 묵은 '어린 왕자'의 낡은 문고본을 꼭 품은 채로 말이다.
친구와의 전화통화로 꽤나 시끄러운 전초전을 치르던 탓일까. 사막 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하루만에 난 기대에 잔뜩 부푼 모습으로 리비아 공항 한복판에 멀거니 서 있었다. 여행사를 통해 한국에서 소개받은 현지인 가이드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겁내지 않을 거란 다부진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나도, 막상 생전 처음 보는 흑인들의 물결을 보며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문짝만한 피켓을 들고 거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던 가이드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얼빠진 얼굴로 우두커니 출구를 지키고 있었다. 귓가에는 의미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낯선 아프리카의 언어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그와 함께 휩싸이는 막막함에 나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때, 흑백의 물결 속에서 피켓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서툰 한글로 삐뚤 빼뚤하게 적혀 있는 것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등위에 얹힌 달팽이집 같은 배낭 때문에 중심을 잃고 잠시 주춤거렸지만, 아직은 버틸만한 체력이었다.
"아, 아년하세요."
미리 연락해두었던 가이드가 어설픈 한국말로 인사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의 귀밑까지 흘러내린 부스스한 곱슬머리는 거무스름한 피부를 덮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해묵은 상아색 천을 마치 터번처럼 멋지게 감고 있었다. 그 이국적인 머리 모양은 단번에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다짜고짜 수줍어하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물론 그의 영어 발음은, 영어라기보다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얼핏 들어본 히랍어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사막 여행의 풍경에 딱 들어맞는 근사한 가이드가 아닌가. 온갖 근심들은, 드디어 사막 지대에 내려섰다는 벅찬 감격에 묻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가이드는 나의 짐을 덜어주려고 정중히 손을 내밀었지만,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나의 마음은 하늘이라도 훨훨 날 것 같았으므로, 가방의 무게 따위는 전연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난 언제 겁을 먹었었냐는 듯,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씩씩한 발걸음으로 공항을 걸어나갔다.
주차장에는 차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로 허름해 보이는 가이드의 차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삭 무너져 내릴 듯한 그의 차는 간간이 그나마 차의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수위의 것이었다. 때문에, 아마 일반 관광객이라면 타기를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함조차도 사막의 비 세속적인 풍경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다녔던 탓인지, 차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마시다만 물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붉은 좌석 시트 위에는 백인 관광객의 것으로 보이는 금발이 몇 올 거뭇거뭇 떨어져 있었다. 가이드는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진 뒷좌석을 보더니 뒤로 넘어 갈 만큼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의자 위를 청소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호텔까지 차를 모는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흔히 한국 사람에게서는 보기 힘든 공손한 태도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보며, 난 도리어 황송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으로 떠난 사막 여행에서 이렇게까지 세심하고 상냥한 가이드를 만나다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차창 밖으로 광활한 사막의 그림이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흔한 풀 씨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모래바다가 넘실거리듯 엄청난 규모의 것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색 지평선 너머, 하늘은 잿빛으로 이글거렸다. 하늘조차 녹여 삼켜 버릴 듯한 태양의 기세가 무서웠다. 마침내 나는 내가 지구의 한여름 속으로 발을 내디뎠음을 실감했다.
사막의 공기를 맡아보고 싶어 창문을 열자,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은 강렬한 열기가 텁텁한 모래 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가이드는 좌석 밑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뒤적 거리더니, 쓰임을 알 수 없는 천 덩어리를 내게 건네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길고 얇은 흰 천이 달린 원주민들의 모자였다. 나는 입이 귀에 걸쳐져서는 냉큼 그것을 받아들었다. 대충 고무줄로 동여매고 살았던 머리채를 풀어 내리고, 흰 모자를 쓰자 제법 현지인 티가 나는 것 같아 우쭐해졌다.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묵으세요. 이래봬도 이 근방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입니다."
가이드는 꽤 근사한 라운지 호텔 앞에 다다라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흰 종이에 볼펜으로 글을 써서 건네주었다. 다행히도 그의 영어 작문 실력은 회화 실력에 비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이 근처에 생텍쥐페리가 여행했다는 그 사막이 있죠? 내일은 틀림없이 가는 거겠죠?"
나는 여행 오기 전 이미 몇 십 번도 더 확인했던 일정 문제에 또다시 확답을 받고자 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안달복달하는 나를 향해 피식 웃으며 다시 펜을 쥐고 글씨를 썼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올 테니까요."
호텔에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직원이 많아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별달리 없었다. 그렇지만 친절한 가이드는 호텔 안까지 따라 들어와 내가 체크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객실까지 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체크인하는 내내 229호에 방을 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가이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그 곳은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에요."
그 말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성격의 것이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어차피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메마른 모래언덕뿐일 텐데 2층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이 뭐가 있을까. 그는 그런 내 의문을 금새 이해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가 바로 정원이지요. 사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온갖 꽃과 나무들을 구해와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았답니다. 호텔 지배인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뒤뜰을 연상시킨다며 늘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지요. 호텔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와 구경을 하고 갈 정도니 말입니다. 그 정원이 제일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 바로 2층이에요."
"아, 그렇군요."
나는 가이드의 배려에 감사하며 229호에 방을 잡았다. 마침 그곳은 비어 있었다. 가이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짐을 나르는 내내 그 호텔의 정원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는 쉴새없이 229호의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그 정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밤에는 반드시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 보세요, 그처럼 환상적인 별세계가 따로 없지요.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사막의 밤 속에서 그 정원은 오아시스처럼 반짝인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꼭 가봐야겠네요."
과연 그 정원은 굉장해 보였다. 결코 적지 않은 부지에 온갖 빛깔의 식물들이 우거져 신선한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덩달아 들떠서 벌써부터 밤을 기다리며 설레어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네, 안녕히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가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 뒤 떠났다. 난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을 유리창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움푹 패인 모래 구덩이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있자니,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내 마음을 휘어잡았다.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이곳에서라면…'
애초 어린 왕자를 만나겠다는 결심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이 곳에 당도한 순간 그런 자책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단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어린 왕자의 배경이 되었던 사막을 구경하고, 위대한 대작가 생텍쥐페리의 체험을 공감해보고 싶어서라는 데 생각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마치 꿈만 같은 드넓은 사막이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순간,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또다른 의문은 다시금 나를 꿈꾸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방에 들어선 나는 일단 집채만한 트렁크를 방 한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허리에 차고 온 쌕은 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사로부터 한적한 관광지일수록 오히려 경비가 허술해 소매치기가 흔하다는 경고를 들었던 까닭이다. 할 일 없이 방안을 서성이던 난 아치형 창문 앞에 놓여진 테이블 옆의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창 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이 연출하는 사막의 노을만큼은 백 만금을 치러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장관이었다. 며칠 굶은 사람의 낯빛처럼 누렇게 떠 있던 하늘에 붉은 구름이 조금씩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지평선 끝까지 강렬한 빛깔로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 꿈결같은 풍경에 넋을 완전히 빼앗긴 채, 손으로 턱을 괴고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여독이 조금씩 눈꺼풀에 올라앉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는 자취를 감추고 새까만 어둠이 고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깜깜한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새벽 한시 위에 놓여져 있었다. 난 밤 산책을 놓칠 뻔했다는 아찔함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외투를 찾아 대충 걸쳐 입었다. 그리고 급한 마음으로 방을 뛰쳐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졸고 있던 사이, 스치고 지나갔던 꿈속에서 어린 왕자를 본 듯 정신이 몽롱했다.
손으로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컴컴한 호텔을 빠져나오자 뒤뜰이 보였다. 담쟁이 넝쿨이 기이한 형태로 얽혀 있는 흰 울타리 사이로 세워진 낮은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내 눈앞에는 한 순간의 신기루처럼, 지상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아름다운 숲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정원에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방금 물 속에서 건져낸 것처럼 촉촉한 달빛이 온 정원을 적시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장대한 거목들이 잎줄기를 시원스럽게 뻗으며 정원의 둘레를 둥그스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두 팔을 벌려 안아도 한참 모자랄 것 같은 거친 갈색 몸통 사이로 적막한 사막의 밤 풍경이 언뜻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젖혀 나무 줄기를 따라 올라 가 보다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흙 사이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무 뿌리 사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자잘한 들꽃들이 하얀색, 보라색, 청 남색, 선홍색 등의 갖가지 빛깔을 내비치며 한 움큼 씩 만발해 있었다. 반면에 정원 가장자리 군데군데 심어놓은 계절 꽃들은 볼록한 꽃봉오리를 금새라도 터뜨릴 듯 피어 올리고 있었다. 이국의 꽃들이 점점이 흩뿌리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는 너무도 화려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특히 부채꼴로 드리워진 여러 겹의 꽃잎을 이제 막 펼친 주홍색 꽃 무리는 한층 짙어져 가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홍채를 발하며 유난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읽었던 책자에서 본 적이 있는, 우유 빛 겹꽃이 길고 가는 대롱을 이따금씩 불어오는 밤바람에 춤추듯이 흔들어댔다. 우리나라의 동백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 꽃송이도 질세라 너울너울 피어오르며 애잔한 향기를 뿜었다. 종종 짓궂은 바람이 꽃잎을 들추고 지나갈 때마다, 채 여물지 않은 보송보송한 씨앗이 살짝 엿보였다. 부드러운 밤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꽃잎 위에는 자잘한 윤기가 흘러 내렸다. 잎새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상쾌한 소리도 귓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까운 사막에서는 바람이 모래알을 뒤척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난 사막에서만 들을 수 있을, 단조롭고 평화로운 음악에 기분 좋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서리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비밀스럽게 달빛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거닐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오색의 찬연한 꽃향기가 새록새록 코끝으로 날아들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울처럼 맑고 잔잔한 연못 표면에는 흑단 빛 하늘이 곤히 잠자는 듯 했다. 나는 한 조각의 흙덩이도 보일 새 없이 곱게 메워진 잔디밭을 지나 연못가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히자 물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잔물결이 일 때마다 매끄러운 물빛 선으로 아로새겨진 희끄무레한 형체가 휘청였다. 나는 반쯤은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느낌에 잠겼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바람이 머리 위의 활엽수를 뒤흔들었다. 비단처럼 얇고 고운 연녹색 잎사귀들이 색종이처럼 잘게 흩날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던 그들은 이윽고 사뿐히 연못에 내려앉았다.
"누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그 때였다, 피콜로처럼 가늘고 청아한 미성이 나를 깨운 것은. 내 귀를 의심할 찰나, 물가를 뒤덮은 나뭇잎 배들이 물결에 싹 걷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거짓말처럼 한 소년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갓 구워낸 옥수수 빵처럼 부드러운 노란색과, 생크림의 고소한 우유 빛이 한데 어우러져 조그만 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나는 차마 믿기 지 않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휘영 찬 은색 달빛을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환하게 받으며 수줍게 서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나는 행여 그가 달아나기라도 할 세라,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우뚝 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책장에서 처음으로 목격했던, 그리고 지난 20년 간 항상 꿈에서만 그려오던 낯익은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내 눈길은 제일 먼저 그의 아담한 발에 신겨진 푸른 털 장화에 가 닿았다. 이어 하얀 빌로드를 부풀려 만든 독특한 모양의 바지와 그의 상체를 빈틈없이 감싼 블라우스에 시선이 멎었다. 막대기처럼 마른 몸을 감추고 싶었는지, 그는 폭신폭신해 보이는 푸른색 겨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는 그의 작은 키에 비해 애처로울 정도로 길어서, 그 끝이 발목까지 끌렸다. 접어 올린 양쪽 깃이 선명한 장밋빛을 띠고 있는 것까지, 책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같았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둥근 목 깃 사이로 7월의 밀밭보다 더 탐스러운 금발이 흘러내렸다. 양털처럼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진주처럼 하얗고 투명한 얼굴이 미소지었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는 한순간에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갔다. 어린 왕자다, 나는 정말 어린 왕자를 만난 것이다. 숨막히는 감격이 벅차 오르는 순간, 그가 능금알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깜박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누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그제서야 나는 어린 왕자가 하고 있는 말이 영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발음과 문법 상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 어설펐지만 어쨌든 영어는 영어였다. 어린 왕자가 영어를 사용하다니! 나는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왜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해 본 적이 없는지 의아스러워졌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그와 어린 왕자가 대화를 했다면 그 언어는 프랑스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은 어째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일까? 내가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그는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프랑스어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그 한마디로 모든 수수께끼는 단박에 풀렸다. 나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 자신을 꾸짖었다. 어떻게 어린 왕자가 평범한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는 이미 수 십 년 전에 전 세계를 여행했으므로, 어떤 나라의 언어이든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발음을 조금이라도 더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며 영어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혹시 소행성 B-612호에서 온 어린 왕자가 아니니?"
그는 나의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듯, 끈기 있게 양을 그려달라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왕자에게 세 개의 구멍이 뚫린 상자를 그려줘야만 했다. 수 십 년 전에 생텍쥐페리가 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만 했다. 나는 배낭을 가지고 나온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재빨리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긴장이 되었는지 배낭의 자크를 내리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새끼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환희는 발끝까지 빠르게 전이되어 마침내는 똑바로 서 있기도 힘에 겨울 지경이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당장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듯한 환자처럼 보였는지, 어린 왕자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누나, 괜찮아?"
"거,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그보다 양을, 양을 그려줘야지."
나는 파르르 떠는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풀 위에 주저앉았다. 습작용 노트를 꺼내 양을 그리는 동안 나의 흥분도 차츰 진정되어 갔다. 종내는 내 그림을 들여다보며 아침 햇살처럼 밝게 미소짓는 어린 왕자를 보며 몇 가지 질문을 할 만한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넌 이미 양을 가지고 있지 않니? 양이 든 상자를 갖고 네 별로 돌아갔던 걸로 기억 하는데…"
"응, 그 양은 내 별에서 잘 자라고 있어. 그렇지만 한 마리뿐이니까 너무 외로워할 것 같아서, 친구를 만들어주려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나는 어린 왕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하면서 더욱 정성스럽게 양을 그렸다. 내가 봐도 썩 훌륭한 솜씨였다. 그야 어린 왕자 책을 보며 삽화를 따라 그린 게 적어도 몇 십 번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린 왕자는 완성된 그림을 받아 품에 꼭 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미소였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사귀어 온 것처럼 친근하게 내 옆에 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누나는 참 신기한 사람이야, 어떻게 내 양에 대해서 아는 거야?"
"음…"
나는 '책에서 읽었어.'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여태까지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어린 왕자의 존재가 한낱 활자 속에 묻힌 가공의 것으로 취급될 것만 같아서였다.
"아주 오래 전에 너를 만났던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 그럼 누나와 비행사 아저씨는 서로 아는 사이야? 아저씨는 지금 어디 있어?"
"아저씨는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어, 자기가 살았던 별로."
이것만큼은 듣기 좋게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약력에는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앙투안 생텍쥐페리가 1944년 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실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푸른 하늘의 평화와 자유를 사랑했던 그라면, 끝끝내 어른이 되기를 거부했던 순결한 심성의 그라면 틀림없이 우주 어딘가에서 영원한 비행을 계속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터였다.
"아아, 다행이야. 그렇다면 언젠가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 있겠네. 그 아저씨, 어른이었지 만 어른이 아닌, 참 좋은 사람이었어."
생텍쥐페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어린 왕자는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 어린 왕자를 읽으며 떠올린 수많은 물음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모아두고 있었다.
"저, 네 장미꽃은 잘 지내고 있니? 혹시 양이 장미꽃을 다치게 하진 않았니? 아저씨도 오랫 동안 네 장미를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고는 했었는데."
"내 장미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 그가 장미를 하나가 아닌 복수로 말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정원을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꽃들을 둘러보고 조금 뻐기듯이 말했다.
"이 꽃들도 물론 아름답지만, 내 별에서 살고 있는 장미들에 비하면 초라해."
"네 별의 장미들?"
"그래, 오래 전 내 별에 있던 장미가 씨앗을 뿌려서 아기 장미를 낳았어. 그리고 일 년 후에 또 그 아기 장미가 아기 장미를 낳고, 다시 낳아서 지금은 장미가 별에 한 가득이야. 그래서 옆별에 사는 사람들은 내 별을 장미의 별이라고 부르기도 해. 석양을 받으며 피어나는 장미꽃들이 얼마나 근사하다고! 장미가 한 송이밖에 없을 때는 늘 양에게 잡아먹힐 까봐 조마조마했었거든. 하루도 빠짐없이 바람막이를 해 주어야 했고, 졸린 잠을 깨워가며 보초를 서 줬었어. 그런데 장미가 불어난 후로는 내 양은 떨어지는 꽃잎만으로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어."
어린 왕자는 고사리처럼 작은 손을 휘저으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그의 눈빛이 충만한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래, 그거 잘됐구나."
나도 덩달아 기뻐져 그의 등을 툭툭 쳤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가녀린 상체는 무척이나 여위어 있었다. 살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아 부딪힌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내 눈에는 연민의 눈물이 핑 돌았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게 이 지구를 떠돌던 어린 왕자,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럼 왜 그 별을 떠나 지구로 온 거니? 혹시 비행사 아저씨를 만나려고 온 거야?"
"응, 그리고 내 여우도. 나는 여우만 나를 길들인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어. 내 별에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아저씨와 내가 어느새 서로를 길들여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 때부터 아저씨가 보고 싶어졌어. 틀림없이 아저씨도 매일 밤 5억 개의 별들을 보면서 나를 그리워했겠지."
"맞아, 그는 네가 떠나고 나서 한참을 슬퍼했어."
나는 정말 생텍쥐페리와 친분이 있는 사람처럼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어린 왕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다면 지구에서는 만날 수 없겠지, 그렇다면 여우만이라도 만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무리 찾아다녀도 여우가 보이지 않아. 내 여우뿐만이 아니라, 그 여우의 동족들도 싹 사라져버렸어."
그는 중대한 미스테리에 부딪힌 듯, 고개를 갸웃갸웃하다 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알아? 여우들이 어디로 갔는지?"
난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여우들은, 동물원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어."
"그래? 동물원은 여기서 멀어? 얼마나 걸어가야 해?"
"동물원은 너무 멀어서, 네 조그만 발로는 갈 수 없어."
"문제없어, 누나가 차를 타고 가서 여우를 불러주면 되잖아. 여우는 내가 부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올 거야."
"아마 그럴 수 없을 거야, 그들은 쇠창살 속에 갇혀 있거든."
"뭐? 여우를 가뒀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내가 여우를 잡아 가둔 장본인이기라도 한 듯 몹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허둥지둥 대꾸할 말을 찾았다.
"여우만이 아니고, 모든 동물들이 다 그래. 사람들은 동물들을 편안하게 키워주려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야! 갇혀 있는 동물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들은 자유를 사랑해!"
나는 뭔가 알맞은 변명거리를 찾아내 어린 왕자의 화를 가라 앉혀 주고 싶었지만 어떤 거짓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린 왕자의 순진 무구 한 눈동자 앞에서는 아무런 거짓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린 왕자는 복숭아처럼 붉게 변해 가는 내 낯빛을 보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는 불현듯 울음을 터뜨렸다.
"어른들은 너무해!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날아가고."
나는 어쩔 줄 몰라 그저 눈물에 젖은 그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스며들어 왔다. 그는 내 품에 벌꿀 빛 금발머리를 묻고 한참을 울었다. 이따금씩 가냘픈 그의 어깨가 들썩거릴 때마다, 내 가슴에서도 부서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섬세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수줍음을 타는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밀어냈다. 그의 울음소리가 차츰차츰 잦아드는 동시에 내 가슴의 통증도 사라졌다. 대신 진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차 올랐다.
"내가 너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줄게, 우리도 서로 길들여질 수 있을 거야. 아니,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날 믿어. 나는 20년 간 너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는걸."
나는 그와 나의 신비스러운 인연을 되새기며 확신에 차 말했다. 백 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넓디 넓은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기적에 가까운 인연을. 만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친구들처럼 허물없이 기대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나는, 저 위대한 작가 생텍쥐페리의 영혼이 오직 어린 왕자와의 재회를 위해 환생한 몸일지도 모른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의 어린 왕자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침묵을 깨고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 누나."
그 때, 하늘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축포처럼, 수많은 유성들이 꼬리를 빛내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와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유성우의 빛은 천국의 꽃처럼 신성하고 아름다웠다. 어린 왕자는 날씬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행사 아저씨야, 아저씨가 우리를 축하해 주고 있어."
나는 말없이, 그러나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의 영혼은 금가루처럼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빛 속에서 교감하고 있었다. 억겁의 공간을 뛰어넘어, 광활한 우주의 한가운데에 우리 둘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행여 별들의 축제에 방해라도 될까봐 숨을 죽여 말했다.
"너의 별에 초대해 주지 않을래? 이 사막 어딘가에, 네 별로 가는 계단이 있지."
"글쎄,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손님을 초대해본 적이 없어."
그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누나라면, 좋아. 날이 밝으면 함께 사막으로 떠나자, 해가 떠오르면.."
그의 말은 점차 꺼져 가는 불꽃처럼 사그라들며 끝내는 작은 중얼거림처럼 들렸다. 꾸벅꾸벅 졸던 그는 서서히 눈을 감으며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나에게도 졸음이 찾아왔다. 혹시 잠들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꿈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른해진 몸은 금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오밥나무
동이 터올 무렵, 호텔 앞으로 너덜너덜한 고물 차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려와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흰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가이드가 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남루한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여송연이었다.
"이번에 한탕하고 나면 이 차도 바꿔야겠군."
그는 도금이 벗겨진 낡은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 때, 호텔 뒷문에서 어린 왕자가 허겁지겁 차를 향해 달려왔다.
"아버지, 가요."
어린 왕자, 아니 그의 아들이 뒷자리에 타자 가이드는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의 손에는 한 뭉치의 지폐와 여권, 카드 등이 쥐어져 있었다.
"그래, 오늘은 얼마나 털었냐? 그 여자, 별로 부유해 보이진 않던데."
"쌕 안에 현금이 제법 있길 래 살짝 빼왔어요, 여권하고 카드도 암 매상에게 팔면 될 것 같아 서 가져왔고요."
"잘했다."
가이드는 짤막한 칭찬을 하며 아들에게서 돈 뭉치를 넘겨받고는,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긴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건네주었다. 아들은 좁은 좌석에서 꼼지락거리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의 복장을 벗어 잘 개켜놓은 후, 그는 머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노란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마를 흥건히 적신 식은땀을 닦으며 후련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과 양손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자 피부를 감싸고 있던 밀가루처럼 하얀 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가이드와 똑같은 거무스름한 피부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백미러를 보며 렌즈를 빼내자, 사파이어처럼 푸르고 유난히 영롱하던 눈동자도 짙은 먹빛으로 변했다.
다른 사막의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진 그는 지친 낯빛으로 차창에 얼굴을 기댔다. 가이드는 평소보다 우울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그건 뭐냐?"
아들의 손에는 꾸깃꾸깃 접힌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아들은 종이를 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삽화를 쏙 빼 닮은, 상자 속에 담긴 양의 그림이었다.
"그 사람이 그려준 거에요."
"그딴 것, 가지고 있어서 뭘 하냐. 버려라."
가이드가 그림을 빼앗아 창 밖으로 내던지려는 것을 아들이 얼른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 그림을 도로 가져가 소중히 품안에 넣었다. 그는,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양을 그려준 사람은."
여우
호텔 정원의 아침은 항상 일찍 시작된다. 오늘도 정원사는 동이 터 오자 마자 가위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는 정원 곳곳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키고, 나무 사이를 돌며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했다. 호숫가 옆에 있는 스프링클러의 스위치를 누르고 돌아서는 순간, 그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하나 띄었다. 웅크려 있는 여자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프링클러의 꼭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여자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정원사는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그 쪽을 미처 보지 못해서…당장 수건을 갖다 드릴게요, 아니면.."
그러나 여자는 정원사의 말을 무시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불현듯 물었다.
"혹시 어린 왕자를 못 보셨어요?"
"예?"
얼떨떨해하는 정원사를 그대로 놔둔 채, 여자는 벌떡 일어나 정원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정원사는 그녀가 말하는 어린 왕자가 책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그녀의 영어를 자기가 알아듣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녀의 정신 없는 발걸음이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울타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앗, 조심해요!"
넓게 드리워진 담쟁이 잎 사이로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손은 여자가 막을 틈도 없이 잽싸게 여자의 허리춤에 채워진 쌕을 낚아 채 갔다.
"소매치기! 거기 서지 못해!"
얼이 빠져버린 여자 대신 정원사가 가위를 집어던지고 쫓아갔지만, 발빠른 소매치기는 이미 지름길을 통해 도망가고 있었다. 한참의 추격전을 벌이던 끝에 소매치기는 어느 지점에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공범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미안해요, 잡지 못했어요. 호텔 근처에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설마 대담하게 정원까지 들어올 줄이야… 쌕 안에 뭐가 들어 있었죠?"
"돈하고…카드. 그리고 .여권도 들어 있었는데."
떠듬떠듬 말을 잇던 여자는 다리에 스르르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정원사가 얼른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그는 눈꼽이 덕지덕지 붙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아저씨, 저 이제 어떻게 하죠?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뭔가 수가 있을 거에요. 일단 경찰의 도움을 받아보는 게.."
자상한 말로 그녀를 위로해주려는 정원사를, 그녀의 서글픈 울먹임이 가로막았다.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에요. 돈이야 다시 벌면 되고, 여권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잖아요. 평생동안 찾아오던 어린 왕자를 이제야 만났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헤어져야 하다니.. 함께 사막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도 다 하지 못했는데.. 아직 길들 여지지도 못했는데…정말 하늘도 무심하네요."
이제는 아예 바닥에 앉아 엉엉 우는 여자를 보고, 정원사는 괜히 미안해져 몸둘 바를 몰라했다. 여자가 우는 이유가 돈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소매치기를 잡아주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여자를 달래주려는 마음에 호숫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되풀이해 말하는 어린 왕자 이야기 속에 장미가 등장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던 까닭이었다.
"저, 이런 말 아세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인데요.."
그가 내민 장미를 받아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울기만 하던 그녀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는 반응을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대요. 아가씨의 어린 왕자를 현실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어린 왕자가 다시 아가씨를 떠나버렸다고 해서, 실망하면 안돼요. 어린 왕자가 정
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가씨의 마음 속에서일 테니까요. "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지만, 정원사는 그녀의 눈물이 그쳤음을 알았다.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간밤에 어린 왕자에게 그려주었던 그림, 양의 그림이 없었다. 어린 왕자는 그녀가 그려준 양을 데리고 그의 별로 떠난 것이다. 그녀를 기억하면서, 그녀에게 길들여졌다는 증거를 남기면서.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눈처럼 맑고 투명한 이슬이 맺힌 붉은 장미를 받아들며 말했다.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실 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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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람양~
번호 29 조회수 35
작성자 박나리 (yepyepyep) 작성일 2002-06-03 오전 12:52:26
아람양의 작품은 제가 이미 한번 읽어보았기때문
또 다른 코멘트는 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작품 쓰느라 수고하셨구요,
다음 작품도 열쉬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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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리님이 홈지기로 있는 문학관련 사이트에서 퍼온 글 입니다.
박나리님의 말의 뜻으로 볼때 적어도 퇴고에는 관련된것 같아서 이렇게 참고하십사 올려봅니다.
그리고 서아람님의 말에 어폐가 있는듯도 싶네요.
추천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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