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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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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인철
댓글 0건 조회 3,651회 작성일 02-07-1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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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서울역 풍경

        楊  仁  哲





민정이도 과연 투사가 될 수 있을까. 여성스런 몸짓과 언어로 친구들에게 조소를 받던 민정이 과연 정부의 졸개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잽싸게 달아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고 놀라움이 가라앉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상황근무를 하는 내내 투사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갑옷이나 날카로운 검과 민정의 해맑은 얼굴, 긴 손가락을 연결시켜 보려고 했지만 이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헛소문일지 모른다, 라고 생각하다가 민정과 함께 찍은 최초의 사진을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봄 소풍 때 찍은 사진으로 우리는 우정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있어서 늘 붙어 다녔고, 어떻게 해야만 그 말에 합당한 언어를 사용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또한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한계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내게 있어서 우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쩌면 무당에 의해 중재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처럼 신비스럽고 영원한 생명이나 불멸의 영혼이라는 말처럼 항구성을 가진 것이었을 것이다.
소풍의 목적지는 몇 번이나 다녀온 백제의 고성이었는데 봄에는 진달래꽃, 가을에는 억새가 고지의 평원에 펼쳐졌기 때문에 꽤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몇 번이나 다녀온 터라 기대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소풍 때마다 주어지는 음식이나 지폐 등의 감각적인 즐거움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들뜬 것 같지는 않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진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반 친구들은 그것과 관련해서 추억이니 영원이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나중에까지 남게될 줄도 몰랐다. 아니 주변의 것들은 늘상 변모하고 있어서 영원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머릿속에만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콧수염이 약간 돋아난 민정과 나란히 연록색 이끼가 덕지덕지 검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민정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옆에 검게 탄 얼굴로 잔뜩 찌푸린 내가 왜소하게 앉아 있었다. 그 불만스런 표정을 떠올리자 과거가 뒤따라 나왔다. 내가 짓고 있는 그 표정은 바로 집이나 학교를 향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물려받은 것이 없이 물질적인 것이나 그 반대적인 것에서 모두 가난했다. 돈이든 애정이든 깊이 감추어두기만 하면 되는 것인 줄 아는 분이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요구했던 것은 자유로운 상상이 아니라 정해진 지식을 아주 잘 머릿속에 구겨 넣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몽상에 잠겨 산 너머의 세상을 마음껏 그려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불만스럽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사진 속에서 하얀 손을 무릎 위에 포개어 다소곳이 앉은 민정이라는 여자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우리 사이는 좀이 슨 죽마고우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소녀들간에 사랑의 상징으로 품에 지니고 다녔던 하트와 유사하다면 모를까.
사실 난 민정을 친구라기보다는 누나나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민정에게 지긋이 기대어서 지나친 동경과 욕구불만으로 생긴 우울과 슬픔을 달랬다. 그러면서 나는 좀 별난 데가 있어, 늘 공중에 붕 떠 있어서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라는 말들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못했다. 그랬다가 어느 한 순간 민정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거나 핏기 없는 표정이 나타날까 두려워서였다. 그럴 때 내가 민정에게 말한 것은 책에서 읽은 역사적인 일들이었고 중국 시인의 노래였다. 그것들을 듣는 민정은 말이 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우리 사이에 끼여든 방해꾼 때문에 간간이 깨어졌다. 영수라는 같은 반 녀석이 의자를 빼기 위해 슬며시 내 뒤로 다가가곤 했던 것이다. 민정이 옆에 있을 때는 감시자가 되어 주었다. 녀석이 뜨기만 하면 민정이 자, 일어나 하고 외쳤던 것이다. 그렇지만 민정이 잠시 자리를 뜨면 어느 새 영수는 도둑 고양이처럼 내 의자 뒤로 다가왔다. 그럴 때 나는 멍청히 창 밖에 흔들리는 박태기나무를 보거나 먼지가 낀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뵈는 미래를 보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 순간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삶이란 즐겁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모두 저주스런 욕망을 가지고 있고…….'
뒷자리에 앉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날 모르는 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본 기억이 없었다. 맨 앞자리는 아니었지만 늘 중간에서 이쪽저쪽이었다. 나는 이런 어중간함이나 선생님이 곧잘 말하는 균형 잡힌 중용이라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분명 내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던 또 하나의 힘을 말해주는 것으로 변화나 갈망, 방종이나 동경 같은 것이었다. 사실 나는 많은 아이들 속에 섞여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나라는 존재가 무리 속에 묻혀 아무런 색깔도 맛도 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중간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도 늘 형이나 부모님으로부터 그것을 느꼈는데 학교에서조차 그것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자유좌석이 되자, 선생님과 가장 먼 거리에 앉아 내 꽁무니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으려면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던 셈이다.
한 번은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 격분한 나머지 볼에 검은 점이 있는 영수를 향해 의자를 던지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녀석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넌 죽은 목숨이야, 속으로 외치며 의자를 높이 쳐들었다. 그렇지만 막상 의자를 쳐들고 녀석을 향해 던지려고 하자, 의자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녀석의 신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나는 의자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민정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정말 용기도 없이. 순간 나는 갑자기 떠오른 환상을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정의 다음 행동은 내 우려를 씻어 주었다.
"정말 왜 이러는 거니, 얘는 참!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러면 녀석은 어떻게 했던가. 되레 커다랗게 웃어 제끼고 했다. 사실 민정의 목소리는 약간 독기가 서리기는 했지만 위엄이라고는 없는 계집아이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녀석은 민정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기 위해서라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환한 서울역은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사는 궁전 같다. 시중을 드는 신하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고 무슨 축하의식이 있는지 한번씩 팡파르가 울린다. 해마다 명절 때면 인사를 드리고 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몇 일 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원한 적은 없지만 서울역의 외곽경비를 담당하게 된 경비병이다.'
창으로 내비친 서울역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민정에 대한 회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민정에게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민정에게 과자나 연필을 줄 수 있는 문방구집 아들도 아니었고 단지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민정이 모르는 이야기들을 짤막하게 해줄 수 있었다. 동전 한 닢을 주운 후에 일어나는 이야기나 스케이트를 타고 미지의 땅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북구의 소년에 대한 얘기를 해줄 수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암수 딴 그루와 한 그루를 배우는 생물시간이었다. 나는 민정으로부터 쪽지 하나를 받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남자답게 살 것임을 맹세한다.'
이 쪽지를 읽는 순간 나는 여성스러운 남성으로서 살아온 민정의 고통을 한 순간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사회는 여성스러운 남자가 살 곳이 못되었다. 남성이 취해야 할 행동이나 말투, 여성에게 허용된 것들이 모두 정해져 있는 사회였다. 그 점에서 볼 때 민정의 결심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는 분명한 색깔을 필요로 하는 사회였다. 검다든지 빨갛다든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회색분자로 낙인찍혀 이쪽 저쪽으로부터 공동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거면 이거다, 저거면 저거다 확실하게 말을 해야지, 사람이 물에 술탄 듯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이면 남성의 옷을 입고 언어를 써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내자식이 되어 가지고 말이야, 하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게 되고 따돌림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따돌림과 비웃음을 받았으면 그랬을까. 혹시 식물들의 양태가 민정을 자극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 나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흐릿해서 알 수 없지만 난 약간 부정적이었다. 정말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마 그건 어려울 거야, 라는 비웃음이었다. 그 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나도 은근히 민정의 그런 태도를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런 일에 부딪힐 때 내가 고심하게 되는 것은 늘 이면의 목소리다. 그것은 내 속에 있긴 하지만 어쩌면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나를 친구들 속에 있지 못하게 했고 외톨이거나 불순한 녀석으로 생각하게끔 했다.
다시 북쪽 창을 통해 서울역을 보았다. 멋지게 차려 입은 여자가 출구를 통해 나온 한 남자를 붙들고 사정을 하는 듯한 태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연인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청탁을 하려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남자는 매정하게 여자를 뿌리치고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여자는 잠시 울고 섰더니 다시 다른 남자에게 다가가 조금 전과 똑같이 사정하는 태도가 되어 있었다. 그래, 저 아름다운 여자는 늘 저런 모습으로 저 자리에 서 있을 거야. 사람은 한 순간 태도를 바꿀 수 없고, 천성을 바꾸는 것은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힘들 거야. 그래서 난 그 때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 해 겨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민정을 따라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기 위해 학교 앞 서점으로 갔다. 카드를 고르는 동안 옆에 있던 여학생들이 남자애들이 웃긴다, 카드를 다 사고, 라는 비아냥 소리를 했다. 이 말에 신경이 쓰여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민정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과연 남학생들은 한 명도 없었다. 여학생들만이 펴놓은 카드 위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민정은 그들 사이로 손을 내밀어 이것 저것 고르는 것이 어떻게 크리스마스 카드 사는 일이 여자 애들만이 하느냐고 반박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눈사람, 털장갑, 빨간 십자가가 매달린 교회, 문인화 중의 하나인 대나무가 그려진 연하장을 사서 은사님들과 친구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처음 사 보는 카드였기 때문에 문구를 쓰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고,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따위의 말도 모르고 있었다.
"무어라고 쓰지?"
내가 물었을 때 민정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당신께도 하늘의 축복과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라고 쓰면 되는 거야."
그 때 화장실 쪽에서 무언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나는 상황실을 떠나 화장실을 향해 갔다. 형광등 빛에 반사된 타일 벽, 연두색의 화장실 칸막이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밤이면 바삐 움직이는 쥐들 때문인가 생각했다. 그 때 다시 샤워장에서 기둥이 부러질 때처럼 우지끈하는 소리가 났다. 샤워장을 향해  걸어갔다. 대형거울 안에 활력이라고는 없는 내 모습과 대원들이 사용하는 역기와 벽에 걸린 수건들이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난 기운을 좀 내라, 어깨 좀 쫙 펴고, 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지만 그런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난 지금껏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지도 못하고 호감을 주지도 못했다. 민정이 아니었다면 난 여전히 친구가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샤워장 안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이것들은 낮 동안 생긴 소리들이며 벽 틈이나 천정에 숨어 있던 잡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 생긴 소리였다. 이제 날 방해하지마.


* 장종권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07-3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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