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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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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인상
댓글 0건 조회 4,450회 작성일 02-07-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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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망




     1 )

침착한 여인의 향수처럼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가운데 서 있다가 사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무결(無缺)한 표정이 되어 정오의 햇살과 바람
에 나무 잎사귀들이 사리고 흔들리는 광경을 전람회의 관람
객처럼 바라보았다.

침묵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 내면에 흐르는 선율을 느낀다.
때로 그것들이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절망적일 때도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거나 그렇게 구현되어야 하는 자체 플랜(plan)의 확장성
을 따르는 것이라고 묻어둘 때가 있다. 신음소리를 낸다고 달
라질 이유가 없고, 절규한다고 비가역을 향해 떠난 그들이 되
돌아올 수는 없는 것.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건, 또 그
본질과 섭리가 어떻게 존재 속에 깃들어 있건 존재하는 분포
나 배열이나 정도에 시간은 부적절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

태도라는 것, 시각이라는 것, 관념으로 파악되는 대부분의
사유(思惟)라는 것들에 대해 우주의 거성이나 퀘이샤, 또는
성운과 수 만의 은하와 그들 모든 현상에게 결부되어 있는
거대한 규모의 시간, 그 의미를 계측하듯 깊이 하나의 방향으
로 천착(穿鑿)하여 침몰한다. 무한히 펼쳐지는 깊이와 무한히
가중되는 무게가 존재의 주계열에 유성우처럼 쏟아진다. 사유
(思惟)는 불완전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완전하고 순수한 단
계로 이행하는 유일하고 비장한 모색이며, 종(種)의 역사 이
래 한번도 우리의 두뇌에서 유리(遊離)되어본 적이 없는 가련
한 중독성을 지닌 유희였던 것이다.




       2 )

인간이 (혹은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유기체 모두가) 왜 행복
을 추구하고 그에 집착하도록 되어 있으며, 왜 그러한 방식으
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렇게 인정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들어왔다. 아리스토텔
레스(Aristotles BC 384 - 322) 이 후, 또는 노자(老子)나 공
자(孔子) 사상이 중원 대륙을 휩쓴 이 후 모든 인간은 마치
행복을 추구하도록 입력된 자동인형처럼 되어 달리 어떻게
해석할 방도가 없는 것처럼 되었다. 혹은 그렇게 설명될 수
밖에 없는 행위인자로 취급되었으며 그렇게 인식해야 했었
다. 그럼에도 인간이 그렇게 집착하고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는 실제로는 감각불능의 추상적 명제일 뿐 아니라
다만 궁핍과 고통, 또는 한 사람의 정서가 요구하는 상상(想
像)에 불과하거나 집단표상에 의해 촉구된 상상적 충족에 대
한 끝없는 갈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완전한 의미의 행복
을 실현한 존재는 대지에 거류(居留)한 적이 없고, 또 그 흔
적을 남긴 일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
며, 그것이 위선이 아님을 느낀다. 그러므로 어쩌면 충족된
모든 것은 충족되지 아니한 모든 것에 비해 열악하며 또 비
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험 내에서 행복에의 욕망은 다만 유추되거나 추측된 인간
에 대한 얼마간의 이해를 권고할 뿐이다. 행복에의 욕망은 욕
망 그 자체보다 하위의 개념이며,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허무를 욕망하는 니이체적 욕망보다 더 협소
한 단층이다. 인간이 지니고 행하는 많은 의도와 의지와 행위
속에는 행복해지기 위한 욕망을 취하거나 그에 따르거나 포
착된 것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다양하고 지대하며, 보다
근원적일 뿐 아니라 보다 포괄적으로 존재의 포스터를 그리
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포스터, 삶의 포스터에 그려지는 인
간의 실상(實相)은 단지 내부, 혹은 배후로부터 지시되는 바
를 옮겨 실행하는 생존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며, 실제 키
워드를 누가 쥐고 있는 지도 알지 못하는 비정체적(非正體 :
unidentity) 항등(恒等) 함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류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우리가 아무리 예리한 자기검토를 해 보아도 의무의 윤리
적 근거 이외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 저러한 선행이나 희생
을 치르도록 할 수 있을 만큼 큰 힘을 가진 것을 도무지 발
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애(自己愛)의
어떤 숨은 충동이 의무의 탈을 쓰고 의지 결정에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
리는 우리를 기만하는 거짓 동기를 가지고 <스스로 속여>
이를 즐겨 고상한 것으로 자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리 애
써 검토해 보아도 이 숨은 동기를 완전히 들추어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윤리적인 가치에 관해 논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볼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없는 행위의 내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그의 견해처럼 인간의 내부적 코드는 우리의 감
각기관을 통해 밝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해야 하
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을 탐구하든, 과학에 심취하든, 혹은 예술을 통하여 무
엇인가를 표출하든 우리는 정말로 우리에게 스며오는 감각을
지각하는 내부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촉발하는 외부의
그 어느 하나도 정확히 ≪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랜 세월동안 진지하고 안타까운 자
세로 학문을 탐구하고 사유하여온 나에게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역시, 내 이름을 걸고, 혹은 내게 허락된 진실을 걸고
내가 가장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조차 분명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전
혀 없다는 것을 고해(告解)한다. 그리고 이 고해를 슬퍼하거
나 기뻐하지 않는다.

세상을 사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아는 바가 없
으며, 자신의 심연과 영혼의 피부와 자아의 의식에 대해 다만
피상적으로 경험(교육과 체험) 내용만으로 부당한(injustice)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제어하는 시간에 대
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이 그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생장하
며 사멸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에 유용한 물질의 구성과 생
성에 대해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너와 나에게 너
와 나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성에 대하여, 그 피부조직이나 신경물질에 대하여,
또는 꽃의 진화에 대하여, 곤충의 변이와 탈각을 촉구하는 대
부분의 과정에 관하여, 생명체의 발원과 우주의 네 가지 힘에
대해, 그 근원과 구조와 현상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에 관해,
혹은 파이온 입자와 뮤온 입자와 그 강력작용(strong
interaction)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는 다양한 하드론 입자들
의 그 최극의 운동과 구성에 대해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어
느 누구도 ≪안다≫라고 말할 위치에 있지 못하며 그럴 자격
도 없다. 죄가 있어서도 아니고 열정이 부족해서도 아니며,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한 겹을 펼치면 다른
한 겹이 펼쳐지는 무섭고 황홀한 이야기와 같이, 하나를 꺼내
면 다른 하나가 튀어나오는 러시아 인형과 같이, 인간은 지상
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무한의 나선형 계단을 무한히 오르
거나 무한히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만 인간(人間)
이라는 존재에게 주어진 최종적이고 유일한 본성으로 남을
것이다.




     3 )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 이미 누군가에 의해 주창되어
기성의 패러다임이 되어버린 일반의 통념에 대해 그것이 과
연 그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 반감을 가지고 검토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또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검증과정을 거쳐 그것이 진
실이거나 진리임을 스스로 보증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지식과 견해는 모두 허위이며, 사기이고 누군가로부터 차용한
겉포장이거나 표절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누가 주장했든, 어
떤 체제, 어느 학파에 의해 관장되고 보호를 받든 그것이 내
스스로의 검증을 통해 나에게 이해되고 나를 납득시키지 못
한다면 그것은 진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닌 것이다. 자신의 시
각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지성
으로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올라가거나 내려
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한 사람을 통하여 만인에게
드러나는 속성을 지녔다.

진리는 평범하고 단순한 것, 진리는 우리의 주위를 언제나
서성거리며 일상과 함께 거류(居留)하고 모든 곳에서 많은 대
중과 함께 집단표상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대부분의 삶으로부터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권
한을 지닌다. 그러함에도 진리는, 혹은 진리라고 인정되는 대
부분의 명제와 의미들은 평범으로부터 예리하게 끄집어내어
만인의 정서에 호소하는 어떤 비범함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
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아무렇게나 뒹구는 나뭇잎이
나 휴지조각과는 다르며, 누구에게나 물결치는 욕정이나 저속
한 싸구려와는 다른 것이다. 적어도 진리는 평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증서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적어도 고된 탁마의 예술이며, 노력과 집중의 정선이거나 그
결정(結晶)인 것이다.




      4 )

인간은 인간의 삶이 주어진 그 때부터 먹고 마시며 배설하
고 호흡해왔다. 우리가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며, 그 기능은 내 의지를
관할하는 자의식(自意識)과 별개의 것이다. 그토록 내 의지와
무관한 신경계의 활동까지 행복에의 의지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삶을 향해 열려 있는 끈질긴 절규를 들
려주어야 한다. 양쪽 손목이 리프트 체인에 끼인 채 거의 절
단된 상태의 생(生)을 바라보는 이의 호흡이나, 혹은 부모에
게 철저히 버림받은 아이들의 거칠고 일그러진 욕설과 눈동
자, 또는 일종의 처절한 저항과도 같은 집요한 운명적 배신을
몇 번이고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이의 가슴을 들려주어야 한
다. 삶은 삶을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하는, 또는 그 불멸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의 일부일 뿐이다. 숨을 쉰다는 행위 하나
에도 무수한 원인과 이유가 따르고 끝없는 질문과 끝없는 견
해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영원한 질문과 영원한 견해와 관
계없이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유기체는 먹고 마시고 배
설하며 호흡할 뿐 아니라 사유(思惟)하고 행위하며 지향한다.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삶으
로서 바람직한 상태도 있을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삶을 지속
하는 이유를 그들 스스로 알지 못한다. 삶에서 행복에의 의지
가 작용하는 범위는 극히 일부분이며 이는 우리의 본성에 귀
속될 만큼의 양(量)에 이르지 못한다.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
운 삶은 무수하다. 행복에의 의지로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는
생각은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
람들의 몫이다. 삶은 행복이나 불행과는 무관하며, 또 극히
단순하고 정교하다.



http://sang1475.com.ne.kr
철학과 삶이라는 이름의 개인 홈페이지



* 장종권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07-3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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