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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가 번역한 <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를 소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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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자서전: 나의 여동생과 나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성균 옮김/ 까만양/ 2013년 03월 01일/ 440쪽/ ISBN-10: 8997740067/ISBN-13: 9788997740062
<저자소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1844년 10월 15일 독일 중동부 라이프치히와 나움부르크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마을 뢰켄의 목사관에서 부친 카를 루트비히 니체와 모친 프란치스카 니체의 장남으로 태어난 니체는 10월 24일 목사관 바로 옆에 있던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니체는 다섯 살 때인 1849년 7월 30일 부친이 사망하자 니체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들만 남겨진 가족과 함께 나움부르크로 이사하여 살았다. 니체는 열네 살 때인 1858년 나움부르크에서 도보로 1시간가량 걸리는 곳에 있던 가톨릭계열의 기숙사형 중등교육기관인 슐포르타에 입학하면서 두 살 어린 엘리자베트와 처음으로 떨어져 생활하기 시작했다. 특히 슐포르타의 엄격하고 금욕적 규칙에 적응하느라 힘겨웠던 니체의 억압된 청소년기는 향후 그의 사상과 사랑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 1864년 입학한 본(Bonn) 대학교 고전문헌학과의 리츨 교수를 따라 1년 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전학한 니체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하면서 철학과 음악에도 심취했다. 1869년 리츨 교수의 추천을 받아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바젤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채용되어 1870년에 정교수가 된 니체는 1872년 『비극의 탄생』을 발표하면서 고전문헌학자 겸 철학자 겸 작가로서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즈음 리하르트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 부부와 깊은 교분을 나누던 니체는 1878년 완성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원고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대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바그너 부부와 결별하고 말았다. 1882년 로마에서 처음 만난 루 살로메와 나누기 시작한 사랑에 실패하고 그녀를 중상(中傷)하던 모친과 엘리자베트와 주고받던 편지마저 끊어버린 니체는 심신의 극심한 고통과 고독에 시달리면서도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했다. 1888년 가을부터 니체는 심해지는 과대망상과 정신적 긴장감에 쫓긴 듯 집필에 몰두하여 겨울에는 『니체 대 바그너』, 『반그리스도』, 『우상들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찬가』를 속속 완성했다. 1889년 1월 3일 결국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채찍질 당하는 늙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혼절한 니체는 1월 17일 독일 예나의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니체는 출판되지 못한 첫 번째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대신할 두 번째 자서전을 비밀리에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자서전은 집필된 지 무려 20년이 지난 1908년에 출판된 첫 번째 자서전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난 1951년에야 비로소 출판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럴지라도 이 자서전은 19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하는 위대한 철학자 겸 시인인 니체의 극렬하고 심대한 내면세계를 가차 없이 보여주는 진귀한 보물로 평가될 수 있다.
<책소개>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는 여동생과의 근친성애, 코지마 바그너와 루 살로메의 관계, 니체가 매독에 걸린 사연과 그의 성욕과 성적 환상들과 체험들에 대한 고백 그리고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쇼펜하워, 바그너, 루터, 셰익스피어, 마르크스 등에 대한 평가들이 잠언 형태의 글로 실려 있어 니체 연구자는 물론 니체 애호자들의 주목을 끈 문제작으로, 니체의 극렬하고 심대한 내면세계를 가차 없이 보여주는 진귀한 보물이자 니체의 저작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자서전에 녹아있는 니체 정신의 비극성과 심대함은 니체의 다른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에 비해 하등 뒤지지 않으며 어떤 대목들에서는 더욱 비극적이고 더욱 극렬한 성격마저 드러낸다. 또 그만큼 더 니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도 풍부하다. 예컨대, 청소년 니체를 사로잡았던 “백작부인”의 환상은 그가 슐포르타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규율을 그만큼 힘겹게 감내했고, 그것이 “금욕주의”에 대한 그의 극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 자서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니체 특유의 여성관(女性觀)을 형성시킨 사건들과 배경들도 이 자서전의 곳곳에서 역력하게 확인된다.
<차례>
니체의 저작들
니체의 인생행로를 좌우한 여성 네 명
서문
제1장. 나의 인생에 처음부터 개입한 여동생
제2장. 나의 신, 루 살로메
제3장. 황폐한 자궁, 문화와 법, 국가
제4장. 여동생과 루 살로메, 철학, 고독
제5장. 사랑과 실연, 광기와 운명
제6장. 쇼펜하워, 역사, 바그너, 예술
제7장. 사랑과 성욕, 백작부인, 유라시아 소녀, 인간본성
제8장. 발각된 나와 여동생의 내연관계, 지식과 경험, 마르크스
제9장. 사랑과 권력, 초인과 영원회귀
제10장. 내가 바라는 것들
제11장. 나의 적들
제12장. 루 살로메의 의미와 나의 강령
에필로그 : 그녀에게 바치는 기도
니체 연보
번역자 후기
찾아보기
<추천사>
“니체의 저서들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발휘한다.” ― 조르주 바타유.
“니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 겸 디오니소스로 선언하면서 최후로 절규하는 곳은 … 이성의 한계점이나 비이성의 한계점도, 그들의 작품이 소실되는 지점도, 그들이 공유하는 꿈속도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자체적으로 해체되는 곳, 작품이 존재할 수 없어지는 곳, 작품이 침묵하기 시작해야 하는 곳, 그리하여 철학자가 움켜쥔 쇠망치를 떨어뜨리는 곳이다.” ― 미셸 푸코.
“생각은 곧 창조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가르친 가장 위대한 교훈이다.” ― 질 들뢰즈.
“[니체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비록 그 운명이 그에게 완전한 고독밖에 용납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그 운명을 꽉 움켜잡았다.” ― 콜린 윌슨.
“니체야말로 부조리 미학의 극한적 결론들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낸 유일한 예술가로 보인다.” ― 알베르 카뮈.
“니체의 정신은 자유로웠으므로 니체는 자유란 그냥 주어지는 위안이 아니라 그것을 열망하는 인간이 치열한 사투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위업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 알베르 카뮈.
“니체는 심연(深淵)으로 하여금 산정(山頂)들의 언어로 말하게 한다.” — 가스통 바슐라르.
“하늘 없는 영웅적인 풍경, 관객 없는 거대한 연극, 정신의 고독이 내지르는 가장 몸서리쳐지는 절규, 그 절규에 대항하여 점점 더 거세지는 침묵. 이것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니체를] 인간정신의 역사에서 알려진 도덕들에 대한 가장 위대한 비판자 겸 심리학자로 만든 것은 바로 ‘디오니소스 미학(美學)’이었다.” ― 토마스 만.
<출판사 서평>
니체의 극렬하고 심대한 내면세계를 가차 없이 보여주는 진귀한 보물이자
니체의 저작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제작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는 여동생과의 근친성애, 코지마 바그너와 루 살로메의 관계, 니체가 매독에 걸린 사연과 그의 성욕과 성적 환상들과 체험들에 대한 고백 그리고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쇼펜하워, 바그너, 루터, 셰익스피어, 마르크스 등에 대한 평가들이 잠언 형태의 글로 실려 있어 니체 연구자는 물론 니체 애호자들의 주목을 끈 문제작으로, 니체의 극렬하고 심대한 내면세계를 가차 없이 보여주는 진귀한 보물이자 니체의 저작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영역한 오스카 레비는 이 책이 지닌 의미에 대해 “지상에서 가장 영예로우면서도 가장 절망적인 인생들 중 하나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보고서이다.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하여간, 독자들은 이 책의 한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생각에 잠길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야기가 유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겪은 상처들과 주름들을 폭로하는 장면이 우리의 위장(胃腸)을 부풀리는 구경거리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니체의 저작들 중 가장 문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책은 지금까지 에스파냐어판(1956, 1980, 1996년), 일본어판(1956년), 포르투갈어판[1990년; 브라질(1992년)], 히브리어판(2006년), 중국어판(2009)으로도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독일어판(1993)으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만큼 이 자서전은 비극적 운명을 겪은 만큼 진위를 의심할 수 없는 니체의 자서전으로서 위상을 서서히 회복해왔다.
* 우여곡절을 겪은 니체의 두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와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1888년 가을부터 뭔가에 쫓기듯이 그러나 일진광풍처럼 집필에 몰두한 니체는 해가 바뀔 즈음 무려 다섯 권이나 되는 저작들, 『니체 대 바그너』, 『우상들의 황혼』, 『반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찬가』를 탈고했다. 그 저작들 중 니체가 만44세 생일인 1888년 10월 15일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13일 완성한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첫 번째 자서전이었다.
그러나 이 첫 자서전은 니체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되지 못했다. 왜냐면 처음에는 니체가 집필한 원고들의 타이핑과 교정을 주관하던 친구와 출판업자가, 이어서 니체의 모친과 외삼촌이, 그리고 나중에는 여동생이 개입하여 출판을 보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일피일 출판이 미뤄지던 『이 사람을 보라』의 원고는 집필된 지 무려 20년이 흐른 1908년에야―더구나 니체의 광기가 여실히 드러나거나 모친과 여동생과 제부 푀르스터가 부정적으로 언급된 문장들과 단락들은 모두 삭제된 상태로―비로소 처음 출판되는 비운을 겪었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혼절한 후 예나의 정신병원에 감금되다시피 입원(1889년 1월 17일~1890년 3월 24일)해있던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출판이 보류됐다는 사실을 알고 낙담했다. 그리하여 니체는 자신을 “실제로 곁에서” 감시하던 모친과 -- 그리고 멀리 대서양 건너 파라과이에서도 모친과 주고받는 편지들과 지난 기억들을 통해 자신을 “심정적으로” 감시하던 여동생 -- 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두 번째 자서전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집필했고, 이번에는 각별히 조심하여 그 원고를 비밀리에 병원에서 “밀반출”하여 출판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자서전도 첫 번째 자서전만큼이나 --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지난하고 착잡하며 기구한 우여곡절들을 겪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니체가 독일어로 집필한 이른바 “육필”원고가 행방불명되는 안타까운 사태마저 겪었고, 1951년에야 비로소 미국의 시인 겸 출판편집자 새뮤얼 로스가 보어스 헤드 북스(Boar's Head Books)라는 출판사를 통해 “그나마도” 영어판으로만 겨우 출판함으로써 가까스로 빛을 볼 수 있었다.
* 명예훼손의 소송 가능성 때문에 비밀리에 번역되다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가 처음 출판될 때까지 겪은 기구한 우여곡절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뉠 수 있다. 먼저 전반부는 니체가 예나의 정신병원에서 비밀리에 원고를 집필하여 “밀반출”한 1889년 1월 17일~1890년 3월 24일부터 오스카 레비가 그 원고를 새뮤얼 로스의 손을 거쳐 1923년에 입수하여 영어로 번역한 1927년 3월까지 약 38년간의 세월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오스카 레비가 영어본 원고의 서문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기억해둘 사항은 레비가 독일어본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비밀리에”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왜냐면 레비의 딸인 모드 로젠탈 로스(Maud Rosenthal Roth)는 자신과 어머니가 1908년부터 아버지의 원고를 타이핑하고 교정하는 작업을 담당했지만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의 원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비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번역작업을 하던 당시 영국에서 시행되던 명예훼손에 관한 법률들에 의거하면 독일에서 활동하던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영국의 법원에도 충분히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약 레비가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의 독일어본 원고를 입수했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사실이 엘리자베트에게 알려지면 그녀가 명예훼손에 관한 법률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농후했고, 그럴 경우 레비의 딸과 아내도 소송에 휘말릴 수 있었다. 왜냐면 엘리자베트가 자신과 오라비의 근친연애 내지 근친성애를 언급하는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의 출판을 그대로 두고 보았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 소각될 운명에 처했던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의 극적 출간!
레비가 완성한 영어본 원고를 독일어본 원고 함께 미국의 새뮤얼 로스에게 우송한 1927년 3월 이후부터 로스가 보어스 헤드 출판사에서 원고를 출판한 1951년까지 약 24년간의 세월에 해당하는 이 후반부의 사연은 특히 새뮤얼 로스라는 인물의 이력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1927년 봄 로스는 드디어 런던의 오스카 레비로부터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의 독일본 원고와 영어본 원고를 우송받았다. 그러나 로스는 그 원고를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왜냐면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아직 생존해있었고, 미국의 명예훼손에 관한 법률을 통해서도 엘리자베트가 충분히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원고의 출판을 저지한 또 다른 사연들도 있었다.
그 무렵 로스는 잡지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몇몇 작가들의 에로틱한 작품들을 작가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투 월스 먼슬리》에 연재했는데, 그 작품들 중에는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소설 『율리시스 Ulysses』(1922)도 포함되어있다. 특히 로스가 《투 월스 먼슬리》에 연재한 『율리시스』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대목들을 위주로 축약하여 편집한 것이었다. 조이스는 로스가 추진하던 『율리시스』의 축약연재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강제명령을 받아냈다. 그래도 굴하지 않은 로스는 이듬해인 1928년에도 영국의 작가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애인 Lady Chatterley's Lover』(1928)를 -- 적어도 미국에서는 최초로 -- 작가의 동의를 받지 않고 해적판으로 출판했다.
그즈음 뉴욕악덕근절협회(New York Society for the Suppression of Vice, NYSSV)의 감시망에 포착된 로스는 1928년에 판매를 위한 외설물 소지 혐의로 고발되어 뉴욕의 경범죄자 노역장(勞役場)에서 3개월을 복역했다. 이듬해인 1929년에는 뉴욕악덕근절협회가 아예 로스의 사무실을 급습하여 로스가 출판한 도서들과 출판을 준비하던 원고들을 압수하고 로스를 외설물 배포혐의로 고발했다. 그 결과 1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로스는 뉴욕악덕근절협회가 압수해간 원고들과 도서들을 소각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낙심했다. 그때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의 원고들도 압수된 다른 원고들과 함께 소각되었다고 생각한 로스는 출판업을 접었고, 압수되지 않고 남아있던 도서들과 원고들을 자신의 창고에 보관해두었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로스는 다시 외설물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1933년부터 외설물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1934년에 다시 고발되어 20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고, 급기야 미국연방수사국에 검거되어 1936~1939년까지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 석방된 로스는 창고에 보관했던 재고도서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1940년부터 우편판매를 위주로 하는 도서판매업을 시작했고, 1940년대 후반부터는 출판업도 재개했다. 그즈음 창고에서 재고도서들을 확인하던 로스의 아내가 “부주의하게 취급되어 파삭파삭해지고 여러 군데 벌레들이 갉아 먹어서 훼손된 레비의 영어본 원고와 서문의 복사본”을 우연히 발견했다. 로스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원고의 훼손된 부분들을 복원하고 관련내용들을 조사하고 대조한 끝에 1951년 처음으로 출판했다.
* 근친연애와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 위작(僞作)이냐 정식저작이냐?
니체가 집필한 지 무려 62년 동안 독일, 캐나다, 영국, 미국을 떠돌며 대서양을 세 번이나 건너는 기나긴 여행 끝에 마침내 빛을 본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 환영과 찬사도 받았지만 더 많은 의혹과 비난에 휩싸였다. 더구나 이 책에 수록된 니체의 놀라운 고백들―니체와 여동생의 근친연애 내지 근친성애, 소문만 무성했던 니체와 코지마 바그너 또는 루 살로메의 내밀한 관계, 니체가 매독에 걸린 사연, 니체의 내밀한 성욕과 성적 환상들과 체험들―은 니체학자들과 니체숭배자들의 의혹과 비난을 더욱 부추겼다. 그렇듯 이 책을 의심하고 비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니체학자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동한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이었다. 그는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아예 “위작”으로 규정해버렸다. 그 결과 이 책의 의미는 왜곡되고 진가는 축소되면서 지금까지 니체의 정식저작으로 “공인”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어왔다.
그런데 카우프만이 이 책을 “위작”으로 규정한 이유들은 그가 니체학자로서 얻은 명성을 감안하면 허술하다 못해 차라리 궁색하다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가 이 책을 “위작”으로 규정하면서 열거한 이유들은 대체로 니체가 독일어로 직접 쓴 ‘육필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출판업자 새뮤얼 로스의 착잡한 이력이 의심스럽다는 것, 오스카 레비의 니체에 대한 식견과 번역능력 및 번역과정이 의심스럽다는 것, 니체가 고백하는 사연들이 실제로 발생한 일들과 시간적?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대목들이 발견된다는 것, 그리고 ― 아마도 그에게 가장 심한 곤혹감과 반감을 안겨주었을 ― 니체의 근친연애와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들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년간 이 책을 연구한 미국의 독일어문헌학자 겸 언어학자 월터 스튜어트는 이 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니체만이 쓸 수 있는 니체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스튜어트는 『니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비판적 연구』라는 연구서에서 카우프만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면서 카우프만의 주장을 불성실한 편견과 오해의 소산들로 평가한다. 카우프만이 위작이라고 주장을 하는 까닭은 아마도 카우프만이 펴낸 니체의 전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들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들 중 어떤 것들은 카우프만을 위시하여 니체를 존경하거나 숭배하는 니체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에로틱하게 -- 즉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 ― 보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카우프만과 그의 지지자들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에 담긴 니체의 고백들을 그렇게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것들로 바라본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이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이 책을 불성실하게 읽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니체가 사용한 “근친연애 또는 근친성애”라는 단어만 보고도―니체의 고모도 그랬듯이!―미리 겁을 집어먹거나 혐오감을 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튜어트도 지적하듯이, 그리고 이 책의 내용들을 감안하더라도, 니체와 여동생의 “연애”는 흔히 “터부”시되고 “죄악”시되는 “근친상간(近親相姦)”으로 치부될 만큼 “선정적이거나 외설적인”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둘이 나눈 오누이간의 애정은 둘이 처한 환경에서는, 오스카 레비도 인정하듯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적으로도 근친연애나 근친결혼은 고대 이집트나 고대 로마에서는 금기가 아니었고 기독교 시대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금기로 규정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심각한 편견과 반감에 사로잡힌 카우프만과 그의 지지자들이 이 책을 정확히 비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소치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품은 그런 뿌리 깊은 편견과 반감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이 책을 위작으로 치부하는 이유들 역시 즉흥적이고 불성실한 태도의 소산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예컨대, 그들이 가장 빈번하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대이유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니체가 “독일어”로 직접 쓴 “육필원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그것이 니체의 자서전을 위작으로 규정할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저자의 “육필원고”가 없다는 사실만 따진다면 위작으로 규정되어야 할 저서들은 실제로 수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저 호메로스의 서사시들부터 헤라클레이토스와 탈레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물론 기독교경전들과 불교경전들도 저자의 육필원고가 없으므로 모조리 위작이라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카우프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미국에서 처음 출판한 새뮤얼 로스의 이력을 문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로스가 처한 환경과 상황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세간의 평판과 소문만으로 그를 평가하는 편견과 오해의 소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된 “우여곡절의 후반부”가 증명하는 바이다. 로스는 그를 오해하는 자들이 아는 만큼 위조와 날조를 일삼는 사기꾼이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유의미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시를 쓰고 나름대로 독학(獨學)하면서 언론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도 진력한 불운한 출판인이었을 따름이다. 그가 이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범한 실수를 정직하게 시인하는 대목(제5장 14절)은 그가 적어도 사기꾼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특히 카우프만은 로스가 『율리시스』를 해적판으로 잡지에 연재하여 출판법 위반했듯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도 위조했을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그 당시 통용되던 미국의 출판법에 따르면 로스의 『율리시스』 연재는 전혀 위반이 아니었고, 단지 그의 잡지에 연재된 내용들이 외설적인 것들이라는 이유로 뉴욕악덕근절협회가 그를 외설물 제작자 겸 판매자로 낙인찍었을 따름이었다. 카우프만은 오스카 레비의 번역능력까지 트집을 잡는데, 그것은 도리어 오스카 레비에 대해 카우프만이 실로 무지했다는 사실만 반증할 따름이다. 그렇듯 카우프만이 제기하는 의혹들은 모두 그의 편견과 불성실에서 빚어진 오해와 무지의 소산들이었다. 그의 의혹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들이었는지는 월터 스튜어트의 저서가 여실히 입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오스카 레비뿐 아니라 스튜어트도 결론짓듯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니체”만이 쓸 수 있는 자서전이다. 설령 그것이 ‘만에 하나’라도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카우프만이 의심하는 자서전에 언급된 사건들의―니체의 착각과 망상이 빚어낸―시공간적 오차들이야말로 오히려 누가 보더라도 어설프게 보이는 위조자가 “위조의 미덕”―정확성과 치밀성―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반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조되었을 가능성은 완전히 무색해진다.
* 진짜 니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풍부한 내용들
이 자서전에 녹아있는 니체 정신의 비극성과 심대함은 니체의 다른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에 비해 하등 뒤지지 않으며 어떤 대목들에서는 더욱 비극적이고 더욱 극렬한 성격마저 드러낸다. 또 그만큼 더 니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도 풍부하다. 예컨대, 청소년 니체를 사로잡았던 “백작부인”의 환상은 그가 슐포르타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규율을 그만큼 힘겹게 감내했고, 그것이 “금욕주의”에 대한 그의 극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 자서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니체 특유의 여성관(女性觀)을 형성시킨 사건들과 배경들도 이 자서전의 곳곳에서 역력하게 확인된다.
비록 니체가 “직접 쓴 육필원고”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실 때문에 그동안 “진짜” 니체의 자서전으로 정식공인을 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비극적 운명을 겪어왔을망정, 이 자서전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들만으로도 니체를 애호하거나 니체에게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일독해볼 만한 충분하고 또 넘치는 가치들을 지닌 진귀한 보물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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