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추천작품

200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089회 작성일 08-02-16 02:24

본문

  

엄마의 알바
손현주
  

그 남자가 사라졌다. 아무런 암시도 없었다. 물론 월급도 엄마의 통장에 꽂히지 않았다. 그 남자는 작은 건설회사 현장 소장이다. 그 남자가 다니던 건설회사는 걸핏하면 부도를 냈고,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부도를 달고 다니는 그놈의 운 때문에 늘 생활이 불안정했다. 그런 불운 때문에 언제부턴가, 우리 집에선 아빠의 존재가 '그 남자' 쯤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번에도 부도가 아닐까 불안했다. 그 남자의 핸드폰은 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메시지만 줄기차게 들렸고, 현장 사무실에서는 결근이라는 말만 했다. 엄마는 참다 못해, 그 남자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되던 날. 9살인 건민이와 16살인 나를 앞세우고 기흥 건설현장으로 갔다.엄마의 앙다문 입과 부릅뜬 두 눈이 엄마의 분노를 짐작케 했다. 어쩌면 엄마는 그 남자의 외박보다,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엄마의 통장 때문에 더 화가 났는지 모른다. 암보험, 신용카드비, 종신보험료, 그리고 적립식 중국펀드, 이동통신비, 아파트 관리비 등 크고 작은 자동이체비가 통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엄마의 예측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건설 현장 주변은 4월의 황사바람과 쌓아 놓은 공구리 모래가 뒤섞여 희부옇게 앞을 볼 수 없었다. 건설현장 관리 사무소에 도착한 엄마가 인부들에게 겨우 물어 그 남자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그 남자가 있는 곳은 비닐하우스에 회색 덮개가 씌어 있는 함바집이었다. 순간 엄마는 유원지 두더지 잡듯 냅다 뛰었다. 나와 동생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엄마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엄마가 들이닥쳤을 때 주방 입구 쪽에서 그 남자의 두툼한 등이 보였다. 그 남자와 마주 앉은 아줌마도 함께 보였다. 아줌마는 조악한 꽃무늬로 도배된 앞치마를 입고 있었고, 그 남자는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하우스 입구에서 두 손을 불끈 쥐고, 느릿느릿 그 남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 때 꽃무늬 아줌마가 먼저 눈짓으로 사인을 했는지, 그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 남자는 놀란 황소 눈을 하고 우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안전 모자 때문인지 그 남자의 얼굴은 낡은 장판처럼 눈 밑에 기미가 얼룩져 있었고, 거뭇한 턱수염은 그 남자를 더욱 초췌하게 만들었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 숫자보다 많은 그 남자는 엄마의 기습적인 습격에 얼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엄마는 다짜고짜 그 남자의 뒷덜미를 휘어잡고 주방 뒷문으로 끌고 나갔다. 그 남자는 복날 개 끌려가듯 휘청거렸다. 우린 식탁의자에 앉아 아줌마가 따라주는 주스를 홀짝홀짝거렸다.

"뭐? 8000만 원? 단단히 미쳤구만. 언놈이 당신 좋으라고 원금의 열배를 쳐주냐구." 엄마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함바 집을 뒤흔들었다. 엄마는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처럼 악다구니를 쳤다. 과포화 상태에 차오른 엄마의 분노는 비닐하우스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쩌면 그 남자는 엄마의 저런 목소리 때문에 가출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시달릴 그 남자를 어딘가에 숨겨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죗값은 엄마한테 치러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우스 문이 덜컥 열리며 엄마는 그 남자를 향해 '그 돈 다 갚을 때까지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 라는 한 마디를 내뱉곤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남자가 사고를 친 건 순전히 세상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오십줄에 들어선 그 남자는 언제까지 건설회사 소장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종종 엄마에게 내비치곤 했었다. 그러던 중 그 남자의 친구가 열배짜리 작전주식이 있다고 꼬드긴 게 화근 이었다. 그 남자의 친구는 그 남자의 위태로움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그 남자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엄마 몰래 사채까지 빌려, 작전세력이 있다는 주식을 몽땅 샀다가 거짓정보에 깡통이 됐다고 했다. 엄마는 집에 와서도 설마 주식이라도 남아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때까지 엄마는 '깡통 계좌'의 뜻을 몰라 증권사에 전화까지 해 '깡통'의 뜻을 알아냈다. 그 남자가 산 주식은 이미 상장폐지 된 종목이 되어 있었다. 그 바람에 엄마의 분풀이는 끈질기게 내 귀를 물고 늘어졌다. 서울역 지하에만 깡통이 있는 줄 알았지, 니 아빠가 깡통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같이 박복한 년이 또 있을까, 로 시작되는 팔자타령을 국수 가락 늘어지듯 반복했다. 그 남자의 월급은 얼마간 엄마의 통장에서 구경할 수 없다. 나는 엄마의 분통 터지는 마음은 알지만 은근히 그 남자가 걱정됐다. 그 남자가 대박 날 주식을 사 놓고 한동안 얼마나 흐뭇해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 남자는 너무 순진하고 돈 복이 없다. 순전히 이번 깡통사건은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려는 그 남자의 노력의 결과다. 그 남자를 배신한 건 세상이었다. 늘 엄마에게 기죽어 살던 그 남자의 마지막 승부수가 돌이킬 수 없는 패배로 끝났다는 게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렇다고 아빠를 집에 못 들어오게 할 순 없잖아, 용서해주면 안될까? 나는 끝음절을 길게 빼며 물었다. 내가 용서해준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니? 중요한 건 통장에 메울 돈이라구. 엄마 적금이랑 보험이랑 깨면 되잖아. 노후 자금 깨면 니년이 엄마 노후보장 해줄래? 나는 엄마의 노후보장 이야기에 갑자기 혀가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한 마디 더 거들었다간 각서라도 들이밀 태세였다. 엄마는 그 남자가 없어도 전혀 곤란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엄마가 그 남자에게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모성애를 발휘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엄마의 모성애는 그 남자에게 발휘되지 않았다. 엄마의 최대 관심사는 돈이었다. 엄마는 통장에 들어 올 돈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 남자는 가끔씩 우리에게 안부를 전하는 정도의 전화만 드문드문 올 뿐, 집에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남자가 지금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바늘방석일 게 뻔하다. 엄마의 잔소리가 두려워서겠지만, 그보다는 최소한 식충이는 되지 않겠다는 그 남자의 박약한 의지다. 엄마가 내질렀던 말들을 진짜로 받아들인 그 남자에 대해 엄마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가족 모두는 그 남자가 없어져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없어지고 보니 그 존재의 가벼움에 깜짝 놀랐을 정도다. 오히려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되어서 게임을 하지 못했을 때가 훨씬 더 당황스럽고 슬펐다. 그나저나 컴퓨터보다 소중하지 않은 가장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그 남자가 없는 일상이 우리 집에서 시작됐다.



엄마의 긴 한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는 그 남자를 만나고 온 뒤부터 전투에 나가는 군인처럼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날부터 동네에 있는 정보지를 종류별로 걷어 와 빨간 펜으로 직업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우리 집 수화기는 하루 종일 엄마의 침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16년이나 집 안에서 푹 쉰 아줌마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40대의 엄마를 반겨주는 곳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되는 파출부와 식당 종업원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는 파출부일과 식당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야간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엄마의 자존심은 거기까지였다.

"나도 처녀 땐 비서 일 까지 했는데…."

엄마는 결혼 전 구멍가게만한 회사에서 비서 일을 했다는 것에 꽤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엄마는 동네 정보지에서 찾지 못한 일거리가 '인터넷'에 꼭 있을 거라는 나의 속삭임에 용기가 났는지 그 날 밤부터 정보의 바다를 헤엄쳤다.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만 하는 엄마는 동생의 받아쓰기 숙제도 내게로 넘겼다. 그 남자가 사고치는 바람에 엄마와 나의 좋은 시절도 종치고 말았다. 며칠동안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던 끝에 엄마가 찾아낸 일은 바로 '역할 대행 알바'였다. 이색 알바에 엄마는 호기심이 발동했고, 재미있게 다양한 일들을 경험 할 수 있다는 직업적 특성에 점점 매료되어갔다. 특히 잘하면 하루에 몇 탕씩 뛸 수도 있다는 '몇 탕'에 엄마는 흥분했다. 엄마의 머릿속 셈은 누구보다 빠르다. 엄마는 열 군데쯤 되는 '역할대행사이트'에 가입을 하고 자신 있게 자기소개를 올렸다. 이름은 황미단 나이는 40대 초반, 학력 고졸, 두 아이의 엄마, 전직 비서, 엑스트라 단원, 연극단원, 가사에 전념하다 남편이 사고치는 바람에 절박한 심정으로 구직 자리 알아봄. 그러다 시간이 자유로운 아르바이트 발견으로 시작된 엄마의 자기소개는 아줌마 티를 팍팍 풍겼다. 동네 아줌마들끼리 일당 2만원을 받고 종일 촬영현장에서 벌벌 떨다 온 것도 경력이라고 올린 엄마가 너무 한심했다. 그것도 모자라 6년 전에 찍어 놨던 이미지 사진까지 사이트에 과감히 올렸다. 엄마는 대단한 사업이라도 하는 양 수선을 피웠다. 얼마 전 TV에서 '역할대행'이라는 신종직업의 문제점을 본 기억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역할대행'하면 꼭 애인대행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나는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엄마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엄마, 꼭 그 일 해야 돼? 그 일 문제가 많다던데…."

"엄마는 몸이 약해서 식당일 같은 건 못해. 가게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 앞에서 붙박이처럼 깁밥 마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구. 혹시 니가 말하는 문제가 애인 대행인가 뭔가 그거 말하는 거 아니니? 정신 차려 이년아, 40대 아줌마한테 애인대행 시킬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니? 오히려 그런 놈 있으면 내가 매달릴 판이다. 그러니까 괜한 상상 그만하고 이제부터 집안일이나 거들 생각 해."

엄마는 건전한 '역할 대행' 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하긴 푹 쉰 김치 같은 엄마를 애인대행 시킬 남자는 없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엄마는 6년 전에 찍었던 이미지 사진을 과감하게 사이트에 올린 것이 내심 신경이 쓰이는지 미장원부터 갔다. 엄마의 영양가 없는 푸시시한 바가지 파마머리가 요즘 유행하는 상고 단발로 쌈박하게 바뀌었다. 엄마의 최상급 촌티가 미용사의 가위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가짐만은 프로 못지않았다. 엄마에게 드디어 알바가 생긴 건 사이트 가입 후 이틀 뒤였다. 엄마가 맡은 알바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학교 급식 대행 도우미로 말하자면 엄마 대행이었다. 의뢰인은 은행원 엄마였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엄마를 대신해 학교에 가 주는 것이 엄마의 첫 일이였다. 두 시간 남짓 학생들에게 밥 퍼주고 청소해주는 대가로 3만원을 받은 엄마는 첫 월급을 받은 사람처럼 감격해 나와 동생의 속옷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정말 엄마의 말처럼 역할대행은 건전해 보였다. 부모대행, 예식장 하객 대행, 실험 보조 알바, 맛 테스터 등의 일회용 알바들이 꾸준히 들어왔다.

엄마의 외출이 점점 잦아지면서 반찬도 빨래도 엉망진창이 되는 날이 많았다. 내 체육복은 제때 세탁되지 못해 체육시간에 벌점을 받기 일쑤였다. 엄마는 한 달 만에 목표대로 하루에 세 건씩 일을 맡아 잘 나가는 역할대행인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점점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일이 많아지면서 내 성적이 떨어지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엄마에게 늘어난 건 일뿐이 아니다. 잔소리까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거의 내 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신문에 끼어온 슈퍼 전단지 미끼 상품을 체크해 1리터에 1000원 하는 우유와 한통에 800원하는 배추, 열개들이 팩에 1000원 하는 계란을 사러가는 일도 내 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엄마의 취미 생활이 나의 의무가 되고 만 것이다. 엄마에게 불만이라도 말할라치면 '이것도 훈련이다' 라는 말을 꽁무니에 달았다. 엄마가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계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공부 못하면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인간 되는지 알지. 비싼 학원비 내고도 형편없는 성적표 내밀 거면, 아예 때려치워. 애써 번 돈 축내지 말고, 그런 인간은 니 아빠 하나면 족한 거 알지? 엄마 사정 빤히 니가 알면서 형편없는 성적표는 가져오지 않길 바란다. 최소한 양심이란 게 살아있다면 말이다."

반복되는 말, 말, 말…. 그 말들이 해파리처럼 내 가슴을 쏘았다. 나 역시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오고 싶진 않았다. 나는 악을 쓰고 싶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엄마가 우리 집 가장이기 때문에 대들 수 없다.

내 보송보송한 생리대 값도 엄마 주머니에서 나오고, 한 달에 한 번 월례 행사로 가는 사우나비도 엄마의 싸구려 인조 악어 지갑 속에서 나온다. 그 남자가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엄마는 이렇게 잔인한 말들을 내게 쏟아내지는 않았을텐데….



아침부터 동생이 밥투정을 부려 엄마에게 혼이 났다. 징징대는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는 길에 오늘 학교 급식 당번이 자기라는 걸 동생은 뒤늦게 말했다. 헉, …나는 동생이 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건민이 학교 급식 당번이래. 엄마가 대뜸 한다는 소리가 건민이 급식 당번 갈 새가 어딨어. 오늘은 팔순 회갑잔치에 며느리 대행까지 해야 돼. 지금 팔순 노인네 모시러 분당까지 가야 된단 말야. 니가 대신 건민이 급식당번 하러 가면 안될까? 잠시 조퇴하고 말이야. 니만 믿는다. 딸깍. 나는 일방적인 엄마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때 엄마 대행 알바 아줌마라도 붙여줘야 되는 거 아닌가. 엄마는 분명 그 대행비가 아까워 나더러 가라고 하는 거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나저나 건민이의 급식이 문제다. 오전 수업 내내 건민이의 급식당번 때문에 시계를 자주 봤다. 분침이 12시를 향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배도 살살 아픈 것 같다. 정말 엄마는 대책이 안 선다. 이럴 때 알바를 쉬는 것도 미덕인데…. 결국 나는 담임선생님께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했다. 다행히 건민이의 학교는 담 하나 사이로 가깝게 있다. 하지만 16살인 내가 건민이 엄마 대행으로는 너무 어린 것 같다. 더구나 건민이가 엄마 대신 누나가 오는 것에 대해 쪽팔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건민이 학교 쪽으로 옮겼다. 건민이의 교실은 2층이다. 아직 점심시간이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다. 복도에 서성이는 아줌마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학생이 급식 당번하러 왔어?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짤막하게 네, 라고 했다. 아줌마와 나는 급식이 나오는 엘리베이터로 가서 국솥과 밥이 담긴 식기를 급식대에 올려놓고 밀고 왔다. 교실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수업이 끝난 모양이다. 나와 아줌마는 급식대를 밀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교실에서 건민이부터 찾아보았다. 건민이가 뒷자리에서 웃지도 않고 서있다. 건민이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건민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 때 담임 선생님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누구? 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건민이 누난데요. 나는 수줍게 조용히 말했다. 담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엄마 대신 왔구나. 학교는? …조퇴했어요. 엄마가 보낸 것 맞지? …선생님도 기가 찬 지 재차 묻는다. 요즘 세상에 동생 급식도우미로, 딸년 학교까지 조퇴시키며 보내는 엄마는 세상에 우리 엄마뿐일 거다. 급식을 나눠주는 데 건민이가 보이지 않는다. 자리에도 없다. 건민이는 분명히 누나가 온 게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은 것 같다. 애들이 급식을 받아가며 배시시 웃는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 애가 장난 궂게 건민이 누나 맞죠? 라고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내내 건민이가 보이지 않았다. 건민이는 급식이 끝나지도 않은 시간에 집으로 간 모양이다. 나는 청소까지 끝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없는 집은 사막처럼 휑하다. 거실 바닥 한 가운데서 달팽이 유리 상자를 앞에 두고 건민이가 자고 있다. 달팽이는 엄마가 알바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지자 건민이를 위해 사주었다. 유리 상자 속에 담긴 톱밥 밑에 나뭇잎들을 깔고 달팽이를 키웠다. 키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달팽이가 수 십 개의 알을 낳았다. 그때까지 달팽이가 자웅동체인줄 몰랐다. 그런데 어제 아침 달팽이가 갑자기 새끼들만 놔 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달팽이의 유리 상자 속에는 이제 어미 잃은 새끼들만 꼬물거리고 있다. 건민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건민이가 급식 당번 얘기를 할까봐 겁이 났다. 다행히 건민인 잠이 든 사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무 말이 없다. 우리 가족의 처지를 건민인 벌써 이해한 걸까?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다.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엄마가 부인대행을 하고 만 것이다. 그건 순전히 그 남자의 가출과 관계가 있다. 그 남자는 지금 세 달째 가출중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함바집 아줌마가 갈 곳 없는 그 남자를 거두고 있다는 소문이 인부들의 사이에서 나돌았다. 엄마는 그 남자의 소문에 반신반의했다. 아주 핑계거리 하나 제대로 생겼네. 이 참에 하우스에다 살림을 차리지…. 허긴 무일푼인 니 아빠를 거둘 여편네가 어디 있겠니? 다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지. 엄마는 소문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정말 다행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나는 재빨리 집어삼켰다. 엄마는 그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거친 소리를 퍼부었다. 엄마의 꿈틀대는 입술을 바라봤다.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엄마의 입술에는 립스틱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나는 엄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내버려뒀다. 그래야 엄마의 활화산 같은 가슴이 휴화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사고를 친 건 순전히 함바집 아줌마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직무유기한 그 남자를 대신해서 남의 부인노릇 이라도 해보고 싶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엄마의 부인대행 알바를 눈치 챈 건 순전히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스팽글이 달린 검은 색 원피스와 손톱 때문이다. 엄마는 스팽글 원피스를 신주단지 모시듯 장롱에 걸어두고 여러 번 입어보고 대어 보았다. 이거 옆집엄마한테 빌린 옷인데 어울리니? 멋이라고는 담을 싼 엄마가 옷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뭔가 수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였다. 특히 16년 동안 엄마의 손톱은 정확히 1센치를 넘어 본 적이 없는 요리용 손톱이었다. 그런데 요리에 방해되는 긴 손톱에 반짝이 매니큐어라니, 익숙지 않은 손톱이다. 엄마? 어디 좋은 데 가? 모임 알바가 있어서, 왜? 엄마가 안하던 짓을 하니까 수상해서 그러지? 외모도 생존경쟁이라는 거 모르니? 나는 엄마의 '생존 경쟁'이란 말에 엄마가 꾸미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나는 대뜸 엄마 혹시 애인대행 하는 거 아냐? 라고 물었다. 왜에? 엄마는 애인대행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니?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20대 아가씨들 욕할 거 하나도 없어. 취직이 안 되니까 그 일이라도 하는 거라구. 그렇다고 돈 안 되는 패스트푸드 알바를 대졸자가 하기엔 무리가 있지? 어쩌겠니, 노는 입에 거미줄 치느니 이 일이라도 하는 거지. 그리구, 애인대행 부탁하는 남자의 입장도 한 번 생각해봐라. 오죽 외로우면 애인까지 대행하겠니? 참 기가 막혀서. 엄마가 점점 막 나가려는 것 같다. 엄마가 언제부터 남자들의 외로움을 대서양만큼 이해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다른 남자들의 외로움은 훤히 보면서, 그 남자의 외로움은 나보다도 모르다니. 엄마가 돈맛을 알더니 확실히 달라졌다. 이건 16년을 살아온 나의 감이다. 엄마는 이제 슬슬 경계를 넘으려고 한다. 애인 역할이라도 들어오면 하겠다는 뜻인데 이건 아니였다. 문제아는 용서해도, 문제 엄마는 용서가 안 된다. 나는 그날부터 엄마의 뒷조사에 들어갔다. 엄마가 누구를 상대 하는지 알려면 핸드폰이 최고다. 아직까지 엄마는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 나는 엄마가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를 하는 동안 엄마의 핸드폰의 메일을 열어 보았다. 문자 메일 함에는 '급식 대행 일당 3만 원, 예식장 하객 대행 등 하고 많은 대행 인생들이 가득했다. 그 중 내 눈을 번득이게 한 문자가 하나 눈에 뜨였다. ' 모임에 함께 가줄 부인 대행 일당 10만 원, 외모는 수수한 분을 원해요.' 바로 이거였다. 이 문자 때문에 엄마의 위험한 일탈이 시작 된 거다. 어쩌면 스팽글 원피스와도 무관하지 않은 문자 같았다. 엄마같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부인대행하다, 진짜 어느 놈팡이의 부인이 되어 버리는 날엔 우리 가족은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다. 그 남자 옆에서 살림만 하며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였다. 엄마가 아는 세상이란 우리 동네지리와 빠꿈이처럼 미끼 상품 찾아내는 기술을 가진 정도였다. 엄마가 3D업종 싫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럴 땐 그 남자가 원망스럽다. 8천만 원이라는 사채를 쓰지 않았더라면 엄마도 대행 알바를 하지 않았을 텐데…. 엄마의 부인대행은 스팽글 원피스를 입는 날이 D데이였다. 그 날 엄마는 온 종일 누워 오이 마사지에다 황토팩까지 하는 바람에 건민이 밥 주는 것조차 잊었다.

엄마는 이날 오후 어디서 구했는지 못 보던 헤어 세팅기를 가져와 오징어 다리 말 듯 머리에 굵은 세팅을 했다. 내 눈엔 엄마가 알바를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애인을 만나러 나가는 것 같이 보여 속이 뒤집혔다. 엄마의 머리에서 세팅 기구를 풀자 구불구불한 웨이브 머리가 그런 대로 우아한 아줌마로 변신하게 했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낯선 엄마의 모습이다. 스팽글 원피스와 세팅 머리의 조화는 그럭저럭 설거지 냄새를 지우게 했다. 엄마가 이번 알바에 공을 기울이는 게 어쩜 그 남자에 대한 반란은 아닌지 궁금했다. 엄마는 현관문을 나가기 직전까지 어떠니? 때깔 좀 나니? 나는 떨떠름하게 그…그래, 이제 그만 좀 물어봐. 지금 선 보러 나가는 사람처럼 왜 그래, 평소답지 않게…. 엄마의 수더분한 외모이기에 가능한 알바였지만 상대방이 남자라는 게 아무래도 기분이 찜찜했다.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저씨의 독특한 취향이다. 이왕 돈쓰는 것 여우같은 아줌마를 대행으로 쓰면 폼 날 텐데, 엄마같이 시골집 장독 같은 아줌마를 돈까지 줘가며 부인대행이라니 희한한 아저씨다. 이해가 안가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 때문이라지만 그 남자의 부인 역할은 걷어차고 남의 부인 역할이라니…. 이건 콩가루 집안이 될 불길한 징조였다. 그날 밤 엄마는 적당히 붉어진 얼굴을 내밀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거실 소파에서 뒤척였다. 엄마가 비척비척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엄마의 몸에서 들큰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엄마는 술 한 잔만 해도 얼굴빛이 감홍 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여간하면 술을 입에 안 대는 엄마다. 소파에 잠시 기대 앉아 있던 엄마가 갑자기 꾸륵꾸륵,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엄마는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나는 벌떡 일어나 엄마에게 달려가 등을 두들기며 한마디했다. 아우 술 냄새, 술도 못 마시면서 뭐야? 솨아아아, 하는 물소리와 함께 이년아! 누군 속 버려가며 술 마시는 줄 알아! 비즈니스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엄마의 알바가 비즈니스라니… 남들이 이 말을 엿들었다면 분명 엄마를 큰 회사 CEO쯤으로 오해 했을 거다. 나는 엄마가 목욕탕에서 씻고 있는 동안 안방 침대에 가서 미리 누웠다. 엄마의 심리상태가 궁금했다. 엄마가 위태로운 길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만 했다. 한참이나 뒤척였는데도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살금살금 거실 쪽으로 나가 보았다.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네, 정 사장님, 오늘 즐거우셨다니 다행이에요. 제가 모임에서 실수나 하지 않았나 몰라요, 그런데 애 엄마는 어디에?… 네, 애들하고 외국에요."



엄마의 말투는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엄마의 목소리는 낚싯대에 걸려 파닥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튀었다. 엄마의 저런 행동이 여우짓처럼 보여 맘에 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쩌면 평범함 속에 자신을 감춰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추측컨대 전화 속 상대는 분명히 오늘 엄마를 부인으로 빌려간 남자가 분명했다. 대화는 그로부터 5분이나 더 길어졌다. 나는 아저씨의 정체를 알았다. 한때 신문을 도배하듯 문제가 되었던 기러기 아빠였다. 세상에 기러기 아빠들이 얼마나 많으면 부인대행이라는 신종 직업들이 나왔을까. 엄마는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돈을 벌고 있는 거다.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엄마의 간들거리는 목소리 속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더는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엄마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으러 거실로 나갔다. 엄마는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여전히 헤실헤실 거렸다. 엄마의 저런 웃음은 뿅 갈 때만 짓는 미소다. 자기가 무슨 사랑에 빠진 10대도 아니고. 내가 계속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엄마 옆을 기웃거리자 엄마는 그제서야 나의 필을 접수했는지 전화를 끊었다. 누구야? 묻는 말에 엄마는 니가 알아서 뭐할래? 하며 일침을 놓는다. 나는 다시 작전을 바꿔 뜬금없이 엄마에게 퀴즈를 냈다. 엄마, 내가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긴데, 한번 들어봐. 여자가 타락하는 방법은 허락이라는데, 이해돼? 허락의 의미가 뭔지 말이야. 엄마는 나의 돌발 퀴즈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게, 뭘 허락한다는 거야? 어디서 요상한 얘기는 듣구 와선… 그 한마디 말만 얼버무리며 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엄마는 분명히 그 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뻔하다.

엄마의 핸드폰에는 그 뒤에도 기러기 아빠와 몇 번의 만남을 거듭한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위험 수위를 넘은 건 아닌 것 같다. 기러기 아빠의 문자는 대게 이런 식이다. '거래처 손님 3명 집으로 초대할 예정, 음식은 간단한 술안주 정도로 해 주세요.' '백화점 선물 세트 코너에서 뵙죠.' 지극히 착한 문자였다. 그런데 문자는 착한데 엄마는 날로 불량해지고 있다. 엄마의 불량기는 식탁에서부터 티가 났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아예 삶은 달걀과 야채를 식탁에 쌓아 놓고 우리더러 밥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가끔 쉬는 날엔 손이 많이 가는 잡채와 미더덕 찜, 해파리냉채, 깐풍기 등을 해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생과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라곤 참치 캔과 도시락 김, 마른 멸치가 전부다. 이건 정말 불량엄마 3종 식단이다.

엄마의 외모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열여섯 살 딸내미를 둔 아줌마답지 않게 확 피어났다. 더구나 진절머리 나도록 해대던 잔소리도 요즘 들어 부쩍 줄었다. 잔소리가 줄어든다는 건 우리에게 관심이 멀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히려 엄마의 변화가 막연한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더구나 엄마는 간간이 창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뱉기도 했고, 괄괄하던 목소리도 어느새 조근조근해지며 소녀 취향의 징조까지 보였다. 그토록 즐겨하던 미끼 상품 메모도 식탁에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전단지 보는 습관이 엄마에게서 내게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슈퍼로 미끼상품을 사러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터덜터덜 슈퍼를 가는 사이에도 나는 혹시 엄마와 기러기 아저씨가 만나는 건 아닌지 신경이 곤두섰다. 슈퍼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식탁에 엄마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한 통의 문자가 보였다. 나는 얼른 주변을 살피고 엄마의 핸드폰에 찍힌 문자를 열어보았다. 세상에, 드디어 엄마의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했다. 'S호텔 1205호로 가세요. 열쇠는 카운터에 맡겼어요.' 이보다 결정적일 수는 없다. 드디어 기러기 아저씨의 수작이 슬슬 가동됐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울렁거렸다. 나는 엄마가 이 문자를 못 보도록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욕실에서 엄마가 젖은 머리에 수건을 싸매고 나왔다. 나는 잽싸게 핸드폰을 제 자리에 두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엄마의 젖은 머리에서 여자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았다. 괄괄했던 엄마의 이미지가 그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여자의 변신은 무죄인가 보다. 엄마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더니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나풀거리는 하늘색 원피스를 장롱에서 꺼내 입고 그 길로 외출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저녁때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아 냉장고 속에 있는 캔 맥주를 꺼내 마셔댔다. 맥주를 홀짝거리는 동안 온갖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S호텔 1205호의 문을 여는 엄마가 떠올랐고 지난번 사회숙제도 생각났다. 학생의 타락은 가정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라고 했던 생각이 바뀌려는 순간이었다. 확 그 남자에게 불어 버릴까, 하는 갈등이 잠시 생겼지만 맥주 한 캔을 비우는 사이에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가정의 평화를 깨는 딸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문자를 지우지 못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엄마는 기러기 아저씨에게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기러기 아저씨의 정중한 입맞춤과 애무를 거부할 엄마라면 굳이 호텔에 가지 않았겠지. 나는 한 주가 지나도록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침시간에 엄마의 얼굴을 볼까 봐 알람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앞당겨 놓았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늦도록 만화방에서 죽치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잔소리가 간간이 있었지만 무시했다. 꼭 필요한 대화는 단답형으로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현관문을 열자 안방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침대 바닥에 소주병이 나뒹굴었고, 엄마는 침대위에 쓰러져 울먹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곤 또다시 흐느꼈다. 혹시 아저씨가 엄마를 차버린 건 아닐까? 온갖 추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아무리 어른스러운 16살이라도 이만하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에 있는 대로 독기를 품고 침대 이불 사이에 벌개진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엄마를 향해 정신병자처럼 소리를 질렀다.

"엄마, 기러기 아저씨랑 정말 바람났어? 딸 앞에서 못 마시는 술까지 먹고, 질질 짜기나 하고. 내가 진작부터 역할대행 문제 있다고 했지?"

"너, 말 다 했어? 김 다솜. 니가 엄마 맘을 알아?"

엄마는 내 앞에서 부끄럼도 없이 울음 반, 비명 반으로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뻔한 스토리 아냐. 엄마가 그 아저씨 부인 알바 하면서 진짜 애인 돼 버린 거잖아" "그래 너 말 잘했다. 엄마는 애인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니?"

"안되지. 엄마는 엄연히 아빠가 있잖아. 빈털터리 된 아빠 내쫓고 나니까 후련해! 그래서 남의 남자 기웃거리는거야?" 엄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뺨을 후려쳤다.

"그래 니가 그렇게 위하던 니 아빠, 얼마 전에 하우스 아줌마랑 진짜 살림 차렸단다. 이제 속 시원하니? 니 아빠 때문에 엄마가…."

엄마는 끝말을 다 잇지 못했다. 엄마의 벌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남자가 아줌마랑 살림을 차리다니. 깡통 찬 남자를 거둬주는 천사 아줌마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방심했다. 돈 없는 그 남자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방치하다니. 그래도 엄마에게 이해가 안되는 게 있었다.

"그럼 아빠가 미워서, 아저씨가 있는 호텔에 간 거야?"

"그…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니가 뭐 탐정이라도 되니? 핸드폰까지 뒤지게, 미안하지만 기러기 아저씨 부탁으로 급한 서류 전달하러 간 거네요. 그 호텔에 거래처 손님이 투숙하고 있었거든. 이제 됐니?"

엄마는 술김에 하고 싶은 말들을 죄다 쏟아내고 침대로 푹 쓰러졌다. 이제 나도 남의 역할 대행해주는 거 지겹다! 지겨워! 라는 말만 엄마는 되풀이했다.

엄마는 한 주가 지나도록 몸살을 앓았다. 일 주일 새에 그렇게 여윌 것 같지 않은 엄마의 볼은 홀쭉해졌고, 눈은 퀭했다. 그 사이 엄마의 핸드폰에는 엄마를 찾는 고객들이 꽤 있었다. 그 중에 기러기 아저씨 문자도 보였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미단 씨가 절 좋아하는 마음은 알지만 가정이 있으시잖아요. 저도 이번 달 말쯤 와이프한테 갈까 생각중이에요.' 나는 엄마가 몸살까지 난 이유를 알았다. 엄마는 기러기 아저씨라는 못 올라갈 나무를 넘본 셈이었다.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신세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엄마가 아저씨에게 거절당해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짝사랑만한 엄마가 철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 남자쯤으로 여겼던 아빠까지 잃어버릴 상황이니 더욱 처량해보였다. 불운은 언제나 양파 속처럼 벗겨도 벗겨도 끝을 알 수 없다. 내 예상이 빗나간 건 다행이지만 실연당한 엄마를 바라보는 건 더 끔찍했다.

엄마의 알바가 시들해졌다. 종일 누워만 있는 엄마는 위험한 놀이를 하다가 다친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엄마는 손톱의 매니큐어가 허옇게 칠이 벗겨져도 새로 바를 생각을 안했다. 얼굴에는 우뭇가사리 같은 기미가 일어나도록 마사지하는 것도 잊어 버렸다. 나는 차라리 엄마가 예전처럼 팔랑거리며 다시 돌아다녀 주길 바랐다. 엄마의 상심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함바집 아줌마가 한동안 그 남자를 돌봐준 건 고맙지만 이젠 엄마를 위해선 그 남자를 돌아오게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남자를 찾아오는 일이다. 아줌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원래의 제자리로 그 남자를 되돌려놔야 한다. 나는 엄마의 마음도 나랑 같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자존심 있는 엄마는 그 남자가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 한 일부러 데리러 가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세상에 무일푼이던 그 남자를 가끔은 소중히 여기는 여자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엄마는 괴로웠을지 모른다. 가장이 없다는 건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 되었을 때보다 더 위험스러운 일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남자의 핸드폰 컬러링에서는 '즐거운 나의 집'이 경쾌하게 울렸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뿐이리…' 노래가사가 2절까지 넘어가는데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책임한 그 남자를 찾아 엄마 대신 내가 함바집으로 가기 위해 현관문으로 나서는데 현관 옆에 놓여진 오리나무 잎사귀에서 사라진 어미 달팽이를 발견했다. 달팽이는 오리나무 잎사귀 위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톱밥으로 바닥이 깔린 유리 상자 집보다, 매끈한 오리나무 잎이 더 좋은지 긴 더듬이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함바 집에 도착했을 땐 인부들도 보이지 않았고 요란스러운 포클레인 소리도 잠잠했다. 나는 찌그러진 함바집 비닐 문 틈 사이로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전구만 켜 있는 어두운 실내에서 함바집 아줌마가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줌마가 나를 보자 찬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아빠 여기 계세요? 내 말이 끝나자 아줌마는 묵묵히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주방 안쪽에서 그 남자가 나왔다. 그 남자는 색이 허옇게 바랜 여름 티셔츠를 9월 끝 무렵인데도 입고 있었다. 철 지난 티셔츠를 보자 갑자기 마음이 울컥 했다. 그 남자는 나를 보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아줌마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남자는 내게 미안하다, 라는 한마디를 짤막하게 했다. 나는 그 남자에게 가슴 속에 담아 놓은 말들을 쏟아냈다.

"엄마도 너랑 생각이 같니?"

그 남자는 담배 한대를 피워 물고는 조용히 물었다.

"엄마 지금 많이 아파. 아빠가 정말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 남자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때가 낀 누런 비닐 여행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그 남자와 내가 함바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때까지 그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아빠 대신 아줌마에게 인사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주방 쪽으로 갔다. 그런데 주방 바닥에 아줌마가 철퍼덕 앉아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인사할 맛이 안 나 도로 주방 밖으로 나왔다. 아줌마를 보자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사랑이란 언제나 상처투성이인 것 같다.

그 남자가 6개월 만에 집으로 귀환했다. 그 남자가 돌아 왔는데도 환영식은 고사하고 엄마는 방에서 코빼기도 안 비쳤다. 그 남자는 멋쩍어서인지 건민이 방으로 들어가 귀환의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요일이라 아빠는 늦잠을 잤다. 나는 엄마가 늦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부엌에선 따뜻한 음식의 온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에게 엄마는 자존심을 너무 세운다는 생각이 들어 안방 문을 힘껏 열었다. 그런데 안방에도 엄마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의 오른 손엔 생활 정보지가 쥐어졌고, 왼손엔 두툼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 장바구니를 풀어헤쳤다. 나는 엄마 곁에 바짝 다가가, 아빠가 집에 오니까 좋지 좋지? 솔직히 말해봐? 나는 엄마의 소맷부리를 붙잡고 대답을 재촉했다. 얘가 왜 이래? 빨랑 가서 세수하지 못해! 그리고 건민이나 깨워. 나는 엄마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엄마는 끝까지 그 남자를 깨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식탁을 준비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의무가 하나 더 생겼다. 위태로운 엄마와 깡통 찬 저 남자를 이어주는 역할 대행 알바에 나설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건민이와 아빠를 깨우러 방으로 가던 중 힐끗 오리나무를 보았다. 달팽이가 어느새 오리나무에서 내려와 유리상자 반대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달팽이를 손끝으로 살짝 집어올려 유리 상자 안으로 깊숙이 넣어 주었다.



추천1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